어른들은 흔히 말했다. 나쁜 일이 있으면 곧 좋은 일이 생긴다고. 나쁜 일만 연속으로 발생하면 살아낼 방법이 없어 천지신명님이 다 조정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 삶을 되돌아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나쁜 일이 연속으로 찾아와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도 종종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가 그랬다. 불행은 쉴 틈도 주지 않고 연달아 찾아왔다.
맨 먼저 나의 정신적 지주였던 외삼촌이 돌아가셨다. 오늘내일하며 1년 넘게 버티던 외삼촌이었다.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병색이 완연한 몸으로 새 학년이 되면 담임 선생님에게 나의 폭력차단회로의 존재를 알리러 어김없이 학교에 오시던 외삼촌이었다. 나는 당연히 다시 볼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3학년 여름이 시작되기 전에 외삼촌은 끝내 돌아가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년에는 찾아뵐 선생님도 없으니, 자신의 임무를 마쳤다고 여기고 편안히 떠나가셨는지도 모른다.
외삼촌의 장례식은 초라했다. 좁은 장례식장이 휑했다. 그보다 더 내 가슴을 후벼 팠던 건 외삼촌의 영정 사진이었다. 1년 전부터 오늘내일하면서도 영정 사진 하나 찍어 놓지 않았던 것이었다. 얼굴엔 뼈만 앙상했고, 눈동자는 이미 풀려 있으며, 입은 반쯤 벌어진 채, 죽기 직전에 찍은 사진이었다. 외할머니가 작년에 돌아가시자 외삼촌은 요양원으로 들어갔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장 가까운 친척은 엄마였다. 변변한 영정 사진 하나 미리 챙기지 못한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미호씨와 대판 싸운 곱슬은 해미로 돌아오지 않았다. 설령 돌아왔다고 해도 더는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곱슬이 사라진 이후로 쿤타는 점심시간만 되면 커다란 하얀 나이키 가방을 메고 혼자 교문을 나갔다. 명백한 무단 조퇴였다. 교문을 나서는 쿤타의 뒷모습은 쓸쓸했다.
그리고 그즈음 나의 백설공주도 사라졌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백설공주를 보지 못했다. 그녀가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몰랐다. 아무튼 단추구멍과 해미 천변에서 술을 마시며 왜 그녀가 사라졌는지 깊이 토론했다. 토론이라기보다는 나의 하소연에 가까웠다. 술기운에 혀가 꼬여 나조차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단추구멍은 내 말을 다 알아듣고 있었다.
“향옥이가 널 더 좋아했어.”
언제 왔는지 대호가 나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향옥이가 누구야?”
“백설돼지.”
나는 그제야 백설공주의 이름을 알았다.
“나를 좋아한다며 왜 말도 없이 떠나?”
“난 니가 이래서 좋아. 순진한 자식.”
대호가 내 목을 감으며 말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돌아선다는 앞뒤 틀린 그 말이 아리송해~’
그때 쿤타가 노래를 부르며 다가왔다.
“이은하나 병든닭이나 똑같아. 사랑해서 이별하는 거지, 사랑도 하지 않았는데 이별하냐?”
어디서 술을 마셨는지 쿤타는 잔뜩 취해 있었다.
“나도 해미를 죽도록 사랑했지. 그래서 떠나려고. 누구 한 명 죽이고.”
쿤타는 이은하 아리송해 노래를 이어서 불렀다. 단추구멍과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잔을 비웠다. 나는 마셨고, 게워냈고, 다시 마셨다. 그렇게 서너 번 화장실을 들락거리다가 필름이 끊겼다.
눈을 떠보니 목화여인숙이었다. 곱슬이 있던 방보다 좁은 방에 쿤타와 대호가 누워 있었다.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나를 단추구멍이 업고 온 게 분명했다. 나는 몰래 방에서 나와 곧바로 성으로 향했다. 성벽을 올라가 뛰었다. 알코올 때문에 가슴을 뚫고 나올 듯이 심장이 지랄발광했다. 천주교 순교자들이 고개를 숙인 채 성문 안으로 들어오는 환상이 보였다. 죽음 앞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은 자들의 영혼이 내 앞을 가로막았지만, 나는 뛰었다. 그들은 죽었고, 나는 살아있기 때문이다. 죽을 줄 알면서도 십자가를 밟지 않은 그들을 이해하려고 했던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2년 동안 가깝게 지낸 백설공주가 왜 떠났는지도 모르는 나였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난다고?’
해가 떴다. 성벽 잔디밭에 누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배가 고팠다. 터미널 매점으로 향했다. 터미널 매점에서 빵을 사 먹고 학교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이미 1교시가 시작되었다. 쉬는 시간에 몰래 들어가려고 개구멍 밖 벚나무 숲에 누워있었다. 그때 몰린눈과 철민이가 개구멍을 빠져나오더니 담배를 물었다.
“씨발 망했다. 쿤타가 쓰는 드라이버는 일자래. 나비가 눈치채면 어쩌지?”
“그땐 죽기 살기로 나비와 한판 쪼개는 거지. 별수 있냐.”
“그래. 뭐 너라고 나비 되지 말라는 법 없잖아. 그치.”
“짜식!”
몰린눈이 철민이에게 알랑방귀를 뀌자, 철민이가 몰린눈의 목을 감아 돌리면서 웃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몰랐다. 그들은 신발 뒤꿈치로 땅을 찍더니 그곳에 담배꽁초를 묻고 개구멍으로 다시 들어갔다. 나도 개구멍으로 들어와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자리에 앉았다. 쿤타는 책상에 누워 자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대호네 반으로 갔다. 혹시나 먹을 것이 있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대호의 가방도 비어있었다. 그때 단추구멍이 들어왔다. 단추구멍도 밤새 술을 마신 탓에 아침에 헐레벌떡 등교하느라 아침 밥을 먹지 않아 배고프다고 했다. 우리는 개구멍으로 몰래 학교를 빠져나와 또와집에서 라면을 먹었다. 라면을 먹자, 머리가 맑아지고, 세상이 똑바로 보이기 시작했다.
“쿤타 왜 그랬대?”
미어캣이 또와집에 들어오더니, 오백 원어치 도넛과 튀김 포장을 주문하더니, 기다리는 동안에 천연덕스럽게 우리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쿤타가 왜?”
대호가 트림하면서 되물었다. 그러자 미어캣이 특유의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지 말라는 표정이었다.
“야 뭔데 말해 봐.”
단추구멍이 답답하다는 투로 재촉하자, 미어캣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젯밤에 천변에서 쿤타가 드라이버로 나비를 찍어서 지금 나비 서산병원에 입원했어. 정말 모르는 거야? 그럼 쿤타 혼자? 와 대단하다. 근데 대호 너도 있었다던데. 뭐가 뭔지 도통 모르겠다.”
그때 또와집 아주머니가 미어캣에게 튀김을 담은 봉지를 내밀었다. 미어캣은 봉지를 들고 나갔다. 나는 오전에 벚나무 숲에서 들은 이야기를 대호와 단추구멍에게 했다.
“철민이가 뭔 짓을 꾸미고 있어.”
단추구멍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도 곧바로 학교로 들어왔다. 나비가 드라이버에 찔린 것도, 병원에 입원한 것도 모두 사실이었다. 드라이버는 곧 쿤타를 의미했다. 하지만 쿤타는 어젯밤 우리와 함께 있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떠도는 사건의 소문은 이랬다. 쿤타와 나비가 해미 천변에서 만나기로 했다. 쿤타를 만나러 간 나비에게 뒤에서 누군가가 보자기로 얼굴을 가리고 드라이버로 그의 등을 마구 찔렀다. 보자기로 얼굴을 가린 자는 덩치가 곰보다 더 크다고 했다. 덩치가 곰보다 더 큰 인간은 해미에서 대호와 나비밖에 없다. 당연히, 쿤타와 대호의 짓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쿤타와 대호는 그날 밤 나와 같이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쿤타는 점심시간이 되자 자기보다 더 큰 책가방을 들고 드넓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 밖으로 사라졌다.
나비는 2주 정도
병원에 입원했다. 그동안 우리는 누명을 벗기 위한 증거를 찾았다. 먼저 드라이버였다. 쿤타가 사용하는 드라이버는 일자였다. 하지만 나비의 몸을 찌른 드라이버는 십자였다. 그리고 우리가 같이 모여 있었다는 증인을 확보했다. 바로 여인숙 아주머니였다. 마지막으로 덩치가 곰보다 더 크다는 그 사람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해미 읍내에는 대호만큼 덩치 큰 젊은이가 없었다.
단추구멍은 한참 생각하더니 삽자루파 장비를 의심했다. 장비는 단추구멍에게 원한이 있다. 그걸 철민이가 이용해서 사건을 일으켰다고 확신했다. 단추구멍은 나에게 준 마이마이를 주머니에 넣고 삽자루파 장비를 직접 찾아가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장비도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나비를 덮친 덩치가 자신이라고. 장비의 진술이 녹음된 테이프를 재생시키며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2주는 금방 지났다. 예상했던 대로 나비가 퇴원하자마자 쿤타를 해미 천변으로 불렀다. 우리는 그동안 모은 증거를 가지고 철민이가 꾸민 짓이라는 걸 나비에게 알려주려고 쿤타를 따라갔다.
“그만둬. 어차피 해미 뜨려고 했어. 핑계를 못 찾아 고심하고 있었는데, 잘됐지.”
쿤타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자기보다 더 큰 가방을 메고 드넓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던 쿤타의 뒷모습이 너무나 쓸쓸했기 때문이었다. 쿤타의 마음은 이미 해미를 떠나 다른 곳에 있었다.
“그래 변명이라도 해 보시지?”
나비는 혼자였다. 역시 나비다운 행동이었다. 등에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지 걷는 모습이 마치 통나무처럼 뻣뻣했다. 팔도 잘 움직이지 못했다.
“뭔 변명. 쪽팔리게. 어차피 너랑 맞짱 뜨고 싶었어. 잘된 거지 뭐. 서로 치사하게 연장 쓰지 말자.”
“그래?”
나비가 허탈하게 웃으며 안주머니에서 잭나이프를 꺼내 바닥으로 던졌다. 쿤타도 드라이버를 멀리 물속으로 던졌다. 쿤타가 머리를 숙이더니 나비를 향해 뛰어갔다. 마치 투우사를 향해 뛰어가는 황소 같았다. 하지만 곰과 족제비다. 나비는 달려오는 쿤타의 허리를 감아 메다꽂아 버렸다. 바닥에 쓰러진 쿤타가 비틀비틀 일어나 나비를 향해 다시 돌진했다. 이번에는 나비가 쿤타의 목을 잡고 함께 넘어졌다. 둘은 정수리를 맞댄 채 땅바닥에 쓰러졌다. 나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등의 상처 때문인 듯했다. 쿤타는 비틀비틀 일어나더니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일어나. 야 빨리 일어나란 말이야!”
쿤타가 나비를 향해 소리쳤다. 나비는 천천히 일어났다. 나비의 등에 핏물이 배었다. 드라이버에 찍힌 상처에서 나는 피였다. 나비가 일어나자 쿤타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발을 들어 내려찍었다. 나비는 쿤타의 무릎 부위를 잡아서 뒤로 밀었다. 쿤타가 뒤로 넘어지자, 나비는 쿤타의 가슴을 깔고 앉아 주먹을 날렸다. 이때 단추구멍이 나비의 어깨를 밀쳐 넘어뜨렸다. 찰나의 순간에 쿤타의 얼굴은 엉망이 되었다. 나비는 비틀거리며 해미 천변을 빠져나갔다.
“병든닭. 궁지에 몰리면 한 놈만 패. 그 한 놈이 너보다 강하면 한 곳만 노려. 눈을 찌르든지, 자지를 걷어차든지. 목울대를 누르든지 하면 꼼짝 못 해. 너의 힘을 분산시키지 마. 한 곳으로 집중해. 그러면 대부분은 나가떨어져.”
그 말을 남기고 쿤타는 해미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미호씨도 보이지 않았다. 미호씨의 행방에 대해서는 소문만 무성했다. 누구는 서울의 고등학교로 다시 전근을 갔다고 했고, 누구는 고향인 백령도로 들어가 어선을 탄다고 했다. 하지만 나와 대호는 알고 있었다. 미호씨가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내가 선물 하나 주고 떠날게.”
쿤타가 나에게 준 선물이었다. 새로운 교련 선생님이 왔다. 젊고 활달한 선생님이었다. 교련 검열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교련 교과서를 처음 보았다. 각종 응급조치와 화생방 공격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교련은 정말 재미있는 과목이라는 걸 3학년이 돼서야 알았다.
쿤타가 떠난 날 대호와 나는 오래간만에 빵집에 갔다. 하트 모양의 거울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 액자가 있었다. 수선화를 그린 유화 그림이었다. 하얀 수선화를 보자 백설공주가 생각났다. 우리는 맘모스빵을 시켰다. 40대 아주머니가 쟁반에 빵을 가지고 와서, 미소지었다. 우리는 한참을 앉아있다가, 빵집을 나왔다. 맘모스빵 절반 이상을 남긴 채. 삶은 정말 아리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