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은 8,760시간이다. 하지만 내 머릿속 기억을 모두 꿰맞추면 매년 시간의 길이는 제각각이다. 하루하루 생생한 1년이 있는가 하면, 1년이 하루 같은 해도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의 기억이 선명하다면, 2학년의 기억은 모두 합쳐 봐야 겨우 이틀이 될까 말까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잠만 잤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물론 곰곰이 추억거리를 찾으면 몇 개쯤은 떠올랐다. 월요일마다 수덕사 숲길을 거닐었고, 읍성 전투 같은 것도 구경했다. 백설공주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나의 옷을 수선해 주었고, 그녀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점점 야위어 볼 때마다 안타까웠다. 백설공주에 대한 내 사랑은 점차 측은함으로 변했다. 그리고 토요일 오후에 영화! 아, 내가 잠깐 착각했다. 그렇다. 나는 고2 때 잠보다도 영화에 푹 빠져 살았다. 그때 보았던 영화를 왜 잊고 있었을까. 내 상상의 지평선을 활짝 열어 준 영화들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영화관이란 낯선 곳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영화관에 가게 된 이유는 해미읍성에서 촬영한, 그러니까 우리가 출연한 영화가 서산 극장에서 상영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영화 상영 소식을 듣자마자 설레는 마음으로 토요일 오후에 서산 극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영화를 볼 수 없었다. 얄궂게도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였다. 미리 알았더라면 옷과 머리를 어른처럼 꾸미고 갔을 텐데 미성년자 관람 불가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촬영할 때 여자가 발가벗고 뛰어다닐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출연한 영화를 못 본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다음 금요일에 다시 영화관에 가기로 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토요일이면 우리가 출연한 영화 상영이 끝나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금요일 오후가 되었다. 나는 가방을 곱슬의 자취방에 내던져 놓고, 잠바와 바지를 재빨리 갈아입고, 머리는 로션을 발라 반듯하게 넘겼다. 우리는 우르르 극장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하지만, 검표원은 우리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고 표만 받았다. 왠지 모르게 조금 억울했다.
극장 안으로 들어가자 이상한 냄새가 진동했다. 잘 발효된 두엄에 정액을 뿌린 것 같은 퀴퀴한 냄새였다. 담배 연기가 자욱했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 천장은 아득히 높아 금방이라도 사천왕상이 떨어질 것 같았다. 낡은 빨간 의자에 앉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드디어 영화가 시작되었다.
거대한 신세계가 스크린에 펼쳐지는가 싶더니, 이내 졸음이 쏟아졌다. 우리가 출연한 영화는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낮에는 어설픈 칼싸움, 밤에는 옷 벗고 뒹구는 장면이 전부였다. 감독의 숨은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극장에서 편히 쉬었다 가게 하는 것이 감독의 솔직한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졸린 눈을 부릅뜨고 우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우리가 나오는 장면이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얼굴은커녕, 뒷모습만 크게 나왔다. 우리만 누가 누군지 간신히 알아봤을 정도였다.
반전은 다음 영화였다. 홍금보와 성룡이 주연한 코믹 영화에 나는 홀딱 반했다. 뚱뚱한 몸으로 돌려차기를 하거나 공중 두발차기 하는 홍금보가 신기했고, 빠르게 몸을 움직이며 각종 장애물을 이리저리 빠져나가는 성룡의 액션은 지금껏 보지 못했던 신세계였다. 특히, 성룡이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쏜살같이 달리는 차와 차 사이를 질주하는 장면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옆에 앉아있던 대호가 벌어진 입을 억지로 닫아 주지 않았다면 나는 그때 정말 턱이 빠졌을지도 모른다.
“우쒸! 그리 좋아?”
극장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해미터미널에 내렸는데도 나는 영화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런 나를 보고 대호가 정신 차리라고 하면서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응 너무 재밌어. 홍금보와 성룡 멋지지 않냐?”
“다 사기꾼들이야.”
“그러니까 영화지.”
그날 이후, 나는 토요일 오후만 되면 어김없이 극장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대호와 단추구멍이 같이 다녔지만, 얼마 안 가 대호는 지겹다며 따라오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단추구멍과 나는 영화관에 꾸준히 다녔다. 단추구멍의 집이 서산이었기에 순순히 따라왔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단추구멍은 극장 의자에 앉자마자 곯아떨어졌고, 영화 두 편이 끝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깨워야만 일어났다. 나는 단추구멍에게 토요일 오후의 자유를 되돌려 주었다. 그 이후로 나 혼자 극장에 갔다. 동시상영관은 늘 한 편은 에로물, 다른 한 편은 액션물을 상영했다. 에로물도 조용히 혼자 보고 있으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커다란 스크린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여인의 나체를 보고 있으면 성스럽기까지 했다. 이따금 뚱뚱한 여인의 나체라도 나오면 복권에 당첨된 것처럼 좋았다. 그 모습을 머릿속에 사진처럼 담아뒀다가 집에 와서 밤에 이불속에서 재생하곤 했다. 나는 아직도 김태희보다 이영자가 더 아름답다. 나만의 독특한 취향이다.
백설공주와도 극장에 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백설공주는 영화 한 편도 채 보지 못하고 극장에서 나와야 했다. 기침을 너무 심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토요일 오후 극장 안은 사람들로 붐볐고, 당시에는 여자나 남자나 대부분 극장 안에서 담배를 피웠다. 백설공주는 가을이 되자 얼굴이 더 수척해졌다. 백설공주가 아니라 흑설공주처럼 된 듯했다.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팠다.
내가 성룡과 홍금보에 열광했던 이유는 백설공주가 시들어가는 모습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학교나 집에 있으면 왠지 서글픔이 밀려왔다. 하지만 성룡과 홍금보를 보고 있으면 그 서글픔이 말끔히 사라졌다. 나는 성룡보다 홍금보를 더 좋아했다. 단지 뚱뚱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태풍이 북상해도 토요일 오후면 어김없이 극장으로 향했다. 홍금보와 성룡이 뜸해질 무렵, 갑자기 람보가 나타났다. 우수에 찬 전직 특수 요원이 목숨 바쳐 싸웠던 국가에서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시원하게 복수하는 장면은 마치 내가 미호씨를 향해 M60 기관총을 발사하는 것처럼 짜릿했다.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다. 그해 12월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토요일이라 어김없이 극장으로 향했다. 외설과 예술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영화가 끝나고 시작된 미국 공포 영화를 본 이후로는 극장에 가지 않았다. 강물에서 수영하는 남자의 목을 전지가위로 삭둑 자르는 장면에서 나는 구토를 하면서 극장을 뛰쳐나갔다. 버스를 타고 간신히 집에 도착해서 월요일 오후까지 토사곽란으로 고생했다. 그 이후로는 극장 특유의 퀴퀴한 냄새를 맡으면 속이 울렁거려 극장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
아무튼 나는 그때 일주일에 두 편씩 영화 80여 편을 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었고, 그 경험이 지금의 내 행복에 귀한 밑천이 되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다.
영화관에 발길을 끊은 후에도 단추구멍 집에는 꾸준히 갔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는지 추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줄기차게 단추구멍 집에서 캘리포니아 사막을 달렸다. 달리다가 해가 떨어지면 천국인지 지옥인지 알 수 없는 캘리포니아 호텔에서 쉬곤 했다. 춤을 추었고, 노래를 불렀다.
“아버지가 안 보이시네? 어디 가신 거야?”
“일주일 전에 서울 가셨어.”
서울대학교에 다니던 대학생이 경찰서에서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다가, 소문은 끝내 사실로 밝혀졌다. 그 사건 때문에 서울 가셨다고 했다.
“아참, 아버지께 네 얘기 하니까 전혀 문제없다고 하시던데?”
“뭔 얘기?”
“아이큐.”
굳게 믿었던 단추구멍이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나는 단추구멍을 노려봤다. 그리고 곧바로 가방을 들고 그의 방에서 나오려고 일어났다.
“앉아.”
단추구멍의 말에 뒤돌아봤다.
“앉으라고. 내 얘기 들어봐.”
나는 못 이기는 척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사람의 머릿속은 우주보다 더 넓고 복잡하여 그 누구도 확실히 들여다볼 수 없대. 그래서 아이큐, 시험 등수 따위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건 아주 위험하댔어. 그리고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듯이 누구나 한 가지 이상 남보다 뛰어난 장점이 있다고 하셨어. 다만, 그것을 찾지 못해서 방황하는 거래. 너처럼.”
나는 그때 단추구멍의 말이 괜히 듣기 좋게 어른들이 흔히 하는 말이라 여겼다. 머리가 좋은 사람과 머리가 나쁜 사람 정도는 구분할 수 있을 나이였기 때문이었다. 선천적으로 똑똑한 사람은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공부도 잘하면서 운동도 잘하고 전교생 앞에서 웅변도 잘하는 중학교 때 친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달라지는 게 뭔데? 나는 베어보다 한문 선생님이 더 솔직했다고 생각해. 너의 아버지와 베어가 말하는 그 장점은 뭉게구름이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해. 나는 내가 뭐를 잘하는지 잘 알고 있어. 구름의 종류를 구별하는 것이지. 하지만 그 능력으로 먹고 살지는 못해. 그게 현실이야. 너도 마찬가지야. 너의 꿈은 경찰이지만 너는 글을 읽지 못해. 그런데 너의 꿈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네 인생은 어떻게 될거 같아?”
단추구멍이 고개를 숙였다. 단추구멍의 방에서 나오려고 문을 열었다.
“그래도 난 포기 안 할 거야. 하는 데까지 해봐야지.”
단추구멍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가 문을 닫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