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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해미고 23화

구름 밟는 소리

by 허관

날이 선선해지자, 한여름 뜨거운 열기를 머금고 웅장하게 피어오르던 구름이 점차 얇아졌다. 산마루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몽실몽실한 구름도 어느새 하늘 높이 흩어져 자취를 감췄다. 나는 우라지게 맑은 가을 하늘을 보며 해미터미널로 향했다


“야 병든닭. 너 이리 와 봐.”


낯선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짧은 앞머리에 제비 꽁지처럼 길게 뺀 뒷머리, 그리고 하늘색 면바지에 노랗고 빨간 줄무늬 티를 입은 2학년 후배였다. 작달막한 키와 까무잡잡한 얼굴 덕분에 금방 알아봤다. 철민이 곁에서 담배 심부름하던 녀석이었다. 후배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내 얼굴을 향해 오른 주먹을 휘둘렀다.


날아오는 주먹을 재빠르게 피하며 그의 팔목을 잡았다. 이어 후배가 왼 주먹으로 가슴팍을 쳤다. 찰나 숨이 턱 막혔지만, 곧 안정을 되찾았다. 작은 덩치만큼 주먹 힘도 약했다. 후배가 다시 왼손을 휘둘렀지만, 그마저 붙잡았다. 내게 양 손목을 잡히자, 후배는 발로 내 정강이를 걷어찼다. 방과 후라 터미널엔 학생들로 가득했다. 모든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3학년 학생도 있었지만,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돌렸다. 터미널 왼편 오락실 앞 빨간 의자에 앉아있는 철민이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학생 앞에서 덩치가 작은 후배에게 맞아 쓰러지는 내 모습을 연출하려고 철민이가 꾸민 유치하고 뻔한 각본이었다. 나는 후배의 팔목을 잡고 터미널 뒤로 끌고 갔다. 후배가 아무리 발로 걷어차도 나는 후배의 팔목을 놓지 않았다. 머리만 건드리지 않으면, 발목이 부러지는 고통쯤은 참을 수 있었다. 터미널 뒤편 공터에 다다르자, 철민 일당이 진을 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철민이를 보자마자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 나의 미소에 철민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병든닭이 설마 나보고 쪼개는 건가?’


하는 표정이었다. 철민이가 당황하자 주변 똘마니들도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나는 손목을 잡고 있던 후배의 가랑이를 무릎으로 찍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행선지도 확인하지 않은 채 막 출발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철민 일당이 쫓아왔지만, 버스가 출발하자 고래고래 소리만 질러댔다. 하지만 그들이 뭐라 외치는지 들리지 않았다. 버스는 터미널을 빠져나가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운이 나쁘게도 내가 올라탄 버스는 우리 집과 정반대 방향, 그러니까 해미 바닷가 마을로 가는 버스였다. 나는 문득 해미 바다가 얼마나 아름답기에 해미(海美)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궁금해졌다. 버스는 종점까지 달렸다. 하지만 그곳에는 바다가 없었다. 현대 창업자 정주영이란 분이 세계 최초 유조선 건조 공법으로 막았다는 방조제 때문에 해미에서 바다가 사라졌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버스를 타고 다시 해미터미널로 돌아왔다. 집으로 가는 막차가 떠난 지 한참 후였다. 두 시간 삼십 분 동안 밤길을 묵묵히 걸었다. 걸어가면서 나는 다짐하고 다짐했다.


‘졸업하자.’


다음 날 점심시간이 되자, 내가 후배에게 얻어맞고 다닌다는 소문이 학교에 파다했다. 나는 소문을 무시했다. 석 달만 버티면 졸업이었다. 나는 머리가 나쁜 대신에 신경이 둔했다. 하지만 단추구멍은 나와 달랐다.


“어떤 새끼야? 당장 말해?”


단추구멍이 목발을 짚고 우리 반으로 쳐들어와 고함쳤다.


“쪽팔리니까 조용히 해줄래. 내 일은 내가 해결할 거야.”


나는 단추구멍에게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든 졸업하고 싶었다. 베어의 말처럼 구름을 보며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후배가 아니라 초등학생이 시비를 걸어와도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이후부터 터미널에 가지 않았다. 학교에서 우리 동네 쪽으로 삼십 분쯤 걸어가면 시내버스 정류장이 나왔다. 그곳에서 버스를 탔다.


단추구멍도 대호도 만나지 않았다. 학교와 집만 오갔다. 가방에는 베어가 준 서류 뭉치만 고이 들어 있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희망이 보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학교에 가면 베어가 나를 응원해 주었다. 베어는 조회와 종례 시간에 따뜻한 눈빛으로 나에게 믿음을 주었고, 복도에서 마주치면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그러다가 청천벽력 같은 일이 터졌다. 베어가 학교를 떠난 사건이었다. 잠시 떠난 게 아니라 영원히 말이다. 시월 초였다. 건장한 남자 셋이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 왔다. 천안에서 내려온 경찰이었다. 베어를 공직선거법상 공무원 정치 운동 금지 위반으로 체포하기 위해서였다. 베어는 잠깐 말미를 얻어 반 학생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겠다며 영어 수업 중인 우리 반으로 찾아왔다.


“여러분들이 힘겹게 찾아낸 이빨을, 지느러미를, 날개를 잃어버리지만 않으면 된다. 알겠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가슴속 깊이 새겼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은 몸속에 숨은 사자의 이빨로, 지느러미로, 날개로 초원과 바다, 그리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각자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렸다. 베어는 교탁에서 내려와 교실에서 나갔다. 그게 베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이후로 베어를 본 것은 석 달쯤 후, 신문에 실린 사진 속에서였다. 그해 유월,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인 인파 가운데 당당히 서 있는 베어였다. 우리나라를 원래 주인인 국민에게 돌려 달라고 외치는 그의 표정은 결연했다. 그리고 나중에야 단추구멍 아버지도 그 군중 속에 있었다는 걸 알았다.


베어가 사라지자 간신히 붙들고 있던 실낱같은 희망이 힘없이 스러졌다.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갔다. 내가 잠시 꾼 꿈이 얼마나 한심스러운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시 끝없는 잠에 빠져들었다. 등교하자마자 책상에 엎드려 자다가 집에 가면, 밥만 먹고 내 방에 틀어박혀 잠만 잤다.


그러던 어느 날, 등교하는 버스 안에서 깜빡 잠이 드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수덕사에 가게 되었다. 오랜만에 찾은 수덕사가 왠지 모르게 반가웠다. 수덕사 대웅전 뒤편 산봉우리에 뭉게구름이 걸려 있었다. 문득 뭉게구름을 밟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수덕사를 품은 덕숭산은 해발 495미터로 제법 높았다. 가을 산에 걸린 뭉게구름은 좀처럼 예측하기 어려웠다. 어떨 때는 갑자기 발달해 우박이 쏟아지고, 어떨 때는 눈이 내리기도 했다.


등산로는 잘 다듬어져 있었다. 경사가 가파른 곳에는 돌계단이 놓여 있어 오르기에 수월했다. 덕숭산 중턱에는 두 개의 암자가 있었는데, 둘 다 깎아지른 바위 위에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중턱쯤 오르자 첫 번째 암자가 왼편 바위벽 위에 우뚝 버티고 있었다.


하얀 뭉게구름이 점차 회색으로 짙어지더니 이윽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빗물은 계곡을 따라 산 아래로 쉼 없이 흘러내렸고, 나는 젖은 몸을 이끌고 산을 올랐다. 속옷까지 흠뻑 젖어 축축했다. 멈추면 온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계속 팔다리를 움직이며 위로, 더 위로 올라갔다.


두 번째 암자 마당을 지나자 갑자기 온 세상이 새하얗게 변했다. 눈이었다. 나는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넋 나간 듯 산을 올랐다. 마침내 정상에 이르자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바람이 불었지만, 습성 눈이라 날리지 않았다. 나는 정상 표지석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구름 밟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구름 밟는 소리는 나지 않고 뽀드득, 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구름이나 눈이나 비나 모두 같은 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다만 날씨에 따라 모습만 바꿀 뿐이었다. 구름 밟는 소리가 곧 눈 밟는 소리요, 빗소리요, 파도 소리이기도 했다.


정상 표지석을 껴안고 무릎을 꿇었다. 잠시 숨을 고르던 바람이 나의 등을 세차게 후려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눈인지 비인지 모를 무언가가 하늘에서 떨어져 등을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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