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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해미고 25화

17대 1, 전설의 시작(마지막 회)

by 허관

살아 있는 한 삶은 이어졌고,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바쁘게 움직였다. 특별히 목적이 있어서 바쁜 것은 아니었다. 살아가는 일 자체가 바빴다. 해미터미널 사건 이후로도 변한 것은 없었다.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철민이는 계속 설치고 다녔다. 단추구멍과 나는 베어가 시키는 대로 프린트물을 꾸준히 봤다. 프린트물이 공무원 시험과목 요점 정리라는 걸 깨닫기까지 한 달 남짓 걸렸다. 베어가 각 과목 담당 교사에게 부탁해서 만든 아주 소중한 자료였다.


적어도 국어책에 실린 웬만한 시와 수필을 모두 암기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당연히 국어가 가장 쉬울 거라 여겼다. 하지만 국어가 가장 어려웠다. 문법과 고전 문학은 검은 건 글씨라는 것 이외에는 도무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과목도 매한가지였다. 특히 물리와 지구과학은 우주의 언어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포기하지 않았다기보다 포기할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편이 옳았다. 베어가 켜 놓은 빛은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약하고 희미했지만, 그 빛에 매달리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만약 다른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납땜이나 프레스, 도금에 소질이 있을지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품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미 손재주에는 젬병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구름에 관해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나는 이미 그 당시 구름만 보면 대충 날씨를 예측할 수 있었다. 각각의 구름에도 인간처럼 태어나고, 자라고, 자식을 낳고, 죽는 일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암흑 속으로 비치는 빛이 조금 더 밝아졌다. 단추구멍이 가렵다며 다리 깁스 틈으로 볼펜을 집어넣어 긁던 무렵, 신기하게도 글씨에서 단어가 보이고, 우주의 언어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던 거였다. 문법과 고전 문학, 그리고 물리와 지구과학도 시나 수필처럼 점차 흥미로워졌다. 공부를 하면서 틈틈이 단추구멍의 경찰 시험과목을 모두 녹음해 주었다.


대한민국 고등학교에 영원한 전설로 남은 옥상에서의 17대1 사건은 단추구멍이 깁스를 풀고 사흘이 지난 어느날 오후에 발생했다. 지금도 많은 중년 남성이 술 마실 때 단골 안주로 삼는 전설의 진원지가 해미고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단추구멍은 깁스를 풀자마자 몸 상태를 점검했다.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철민이에게 말했다.


옥상으로 따라오라고.


철민이는 단추구멍의 싸움 실력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두머리 자리를 순순히 내줄 철민이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열일곱 명을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각자 손에는 잭나이프와 쌍절곤, 그리고 쇠파이프를 들고 있었다 물론 나와 대호도 옥상으로 올라갔다. 당연히 우리는 구경만 했다.


결과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뭐 싸움도 길지 않았다. 단추구멍의 취권인지 아닌지 모를 몸짓에 철민이를 비롯한 17명이 늦가을 담쟁이잎처럼 모두 우수수 쓰러졌다. 지금은 ‘옥상으로 따라와’ 혹은 ‘17대 1로 싸워 이겼다’고 하면, 너무나 식상한 레퍼토리라 비웃겠지만, 뭐든지 처음에는 멋진 법이다. 그날 단추구멍의 신비에 가까운 몸놀림은 정녕 인간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나도 잘 몰라. 내 눈에는 상대의 주먹이 아무리 빨라도, 아주 느리게 재생하는 슬로비디오처럼 느리게 보여.”


“조직에 들어가면 오야봉은 따 놓은 당상이겠다. 내가 한번 주선해 볼까?”


대호의 말에 단추구멍이 피식 웃었다.


“난 경찰이 될 거야.”


단추구멍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하늘이 주신 재능이야. 국민의 안녕을 지킬 경찰로 너는 타고난 거야.”

단추구멍에게 된통 당한 철민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꾸준히 등교했다. 학교를 졸업하지 않으면 다리 몽둥이 부러뜨리겠다는 아버지의 협박 때문에 학교에 와서 종일 누워만 있었다. 나비는 해미 읍내 시장 상인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아, 최연소 상인회 회장이 되었다.


나비가 상인회 회장으로 선출된 다음 날, 내가 과거 잠시 가출했을 때 다니던 자동차 부품 공장 사장이 해미고에 찾아왔다. 사장은 취업 설명회를 하고 그 자리에서 열다섯 명을 채용했다. 해미중학교 출신인 사장은 대부분 학생을 동네 후배처럼 여겨 살뜰하게 챙겼다. 취업 설명회 내내 사장은 내 눈길을 피했다. ‘혹시 저 녀석이 또 따라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 가득한 얼굴이었다.


철민이는 기회다 싶어 다음 날 사장을 따라 그 머나먼 길을 떠났다. 용산터미널에서 내려 드넓은 용산역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가, 엉덩이가 전철 의자에 녹아들 때쯤 동인천역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한 시간가량 덜컹거리며 달려가다가 내리면, 그제야 해미보다 더 촌구석이라는 걸 느낄 것이다. 그리고 공동묘지가 있는 산등선을 넘을 때는 마치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들어선 것처럼 막막함이 밀려오겠지.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게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지.

“우쒸! 야 나 대학 합격했어.”


대호가 입술을 오므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거대한 풍선처럼 상체를 건들거리면서 손바닥으로 내 머리를 쳤다. 나는 잽싸게 대호의 손에 있는 서류를 빼앗아 봤다. 광주 인근에 있는 2년제 전문대학이었다. 제과제빵학과였다. 대호는 나보다 공부를 더 못 했다. 해미고를 졸업했음에도 2년제 대학에 가야 할 정도로 말이다. 4년제가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와 단추구멍은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좀 늦었지만, 마침내 꿈을 이루었다. 꿈을 이루었다고 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은 아니다. 살다 보니 깨달았다. 불행을 제거하여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마음속 행복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불행도 사라진다는 걸 말이다. 마치, 빛이 없으면 어둠도 없는 것처럼.


*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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