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추억
당신은 비 오는 날을 좋아하시나요?
빗방울 떨어지는 그 거리에 서서...
노래 가사가 생각나네요.
빗방울 떨어지는 날이면 나는 마음이 정돈되고 차분해집니다.
학창 시절 수해를 두 번이나 겪었음에도 여전히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하고 또 사랑합니다.
남들은 축축하게 옷 젖고 빗물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들고 질척한 길을 걸어야 하니 비 오는 게 세상 번거롭고 귀찮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찝찝하고도 불편한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비 오는 날 나가서 어린아이처럼 첨벙첨벙 걷기를 좋아합니다.
때론 눈 딱 감고 우산 없이 우비만 입고 밖으로 나가 굵은 빗줄기 후두둑 후두둑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을 느낄 때면 일탈감이 느껴지기도 해요.
억수같이 폭우가 쏟아지던 날도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비닐막을 단단히 씌운 채 큰아이와 장화 신고 우비에 우산 쓴 채로 걸어서 멀리 누군가의 병문안을 가다가 기상캐스터를 본 적이 있어요.
우리는 그날밤 9시 뉴스 일기에 배경화면처럼 카메라에 또렷이 잡혀 나왔고요.
그도 그럴 것이 아무도 그날은 걷는 이 가 없었으니까요. 여기저기서 우릴 뉴스에서 봤다는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네요.
겁 많고 깜빡깜빡 우산을 매번 잃어버리던 어린 시절의 나는 갑자기 예고 없이 비 오는 날이면 초등학교 현관문 앞에서 아이를 기다리다 우산을 씌워주는 친구들의 엄마를 볼 때면, 그렇게 부럽고 다정해 보였어요.
왜 그런지 나는 정말로 매번 그 귀한 우산을 잃어버리고 비를 처량하게 맞으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어요. 아무리 기억하려고 잊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해도 여지없이 쓰고 갔던 우산은 하교할 때 이미 없었으니까요.
한 번은 하교 후 갑자기 퍼붓는 소나기를 우산도 없이 놀래서 온몸으로 비를 때려 맞으며 집으로 뛰어 오는데, 천둥 번개까지 우르릉 쾅 쾅 겁주는 통에 차가워진 몸이 얼어붙어 오줌을 쌀 뻔했어요. 그날도 그 억수 같은 비를 맞으며 젖은 책가방을 붙들고 악착같이 뛰어가는 애는 나 혼자 뿐이었는데 이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것처럼 무섭고 거리는 온통 안개 자욱한 것처럼 빗물이 무릎위까지 하얗게 튀어올라 겁에 질린 나는 친하지도 않은 애가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까스로 엄청 용기 내어 염치 불고하고 따라 들어가 우선 화장실부터 갔던 것 같아요. 한 3학년쯤으로 보이는 그 애 오빠가 수줍게 건네준 하얀 수건을 받아 몸에 붙은 빗물을 툭 툭 털어내고 젖은 머리를 한번 짜 내고는 지체할 틈 없이 다시 또 내달려 단번에 우리 집 철문 앞에 도달, 꽝 꽝 꽝 대문을 두드리며 엄마를 외쳐 불렀어요.
엄마는 아이고 하면서, 소나기가 오는데 비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와야지 미련하게 다 젖고 왔다고 야단치시는데 나는 무조건 서운하고 서러워 안도감에 왈칵 울음을 터 뜨렸던 적이 있어요.
그 후로 나는 비 오는 날이 너무 무섭고 싫고 또 우산 잃어버리고 야단맞을까 초긴장되는 통에 아주 비를 싫어하게 되었어요.
황순원의 소나기를 교과서에서 접하고 비에 대한 동경이 약간 생겼던 나는 어느 날 좋아하는 교회 학생부 언니 오빠들과 등산하러 갔다가 즐겁게 산을 내려오는데 당황스럽게도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해서 우리는 함께 커다란 금박 돗자리 하나를 머리 위에 추켜올려 붙잡고는 울퉁 불퉁한 산을 비틀비틀 깔깔대며 서로 자빠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아슬아슬하게 내려오게 되었어요.
스릴과 해방감을 동시에 느끼며 산을 내려와 마악 도착한 버스를 집어 타고도 의자에 청바지 입은 엉덩이가 젖고 머리에서 물이 뚝 뚝 흘러내려도 서로 한참을 깔깔 대느라 여념이 없었죠. 좋아하는 오빠들은 왜 비를 맞고도 멋있어 보이는 건지 그저 재밌고 즐겁기만 했어요. 그날 이후로 나는 비를 더 이상 무서워하지도 싫어하지도 않게 되었지요.
꽈다당 꽝 천둥소리는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심벌즈 같았고 번개는 지지직 하는 불꽃놀이처럼 신비롭고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비가 오면 여름인데도 왠지 이불을 따뜻하게 덮고서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엄마가 부쳐주는 김치 부침개를 먹으며 만화책을 보거나 친구에게 편지를 쓰거나 턱을 괴고 티브이를 보다가 스르르 잠이 들곤 했는데 그때 들리는 빗방울 떨어지는 창밖의 빗소리는 자장자장 자장가처럼 일정하고도 포근했어요.
하늘 저 끝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내려오는 비라서 하늘과 가장 맞닿아 있을 거 같은 비라서 더 더 더 친근하고 다정하게 느껴져요.
비 오는 그림을 그리고 비 내리는 창가에서 사진을 찍고 빗소리를 녹음하고 들어보며 아늑하고 푸근한 조명 꺼진 듯한 어슴푸레한 창밖이 나에겐 운치 있고 우산 쓰고 걷는 사람들도, 빗물 웅덩이에 비친 자동차 헤드 라이트의 불빛들도 모두 정겹고 따스하게 느껴져요.
안개 자욱하고 시도 때도 없이 비가 왔다가 그쳤다 하는 나라에서 대수롭지 않은 듯 언제나 비를 맞으며 우산 없이 다니는 영국인들을 보면서도 우산이 몇 번이고 뒤집어지더라도 나는 꼭 꼭 우산의 운치를 느끼고 싶어 우산을 꼭 힘주어 붙잡아 쓰기도 하고 가끔은 한국의 퍼붓는 소낙비가 그립고 봄이면 내리는 이슬비가, 가을이면 가랑비가 또한 차가운 겨울비가 그리워져요.
너무나도 자주 스프링 쿨러처럼 냅따 뿌려대는 비가 거의 매일 오는 이곳에서 사람들이 비 오면 우울하다 하고 이제나 저제나 해 나기를 기다리는데도 나는 상관없이 비 오면 좋고 또 그럴 땐 한국의 비를 그리워해요.
한국의 비는 다른 매력이 있어서 이기도 하고, 아마도 비에 대한 시를 무수히도 써대고 비에 대한 수필도 자주 쓸 만큼 추억이 많았어서 인지도 몰라요.
스무 살 때 쓴 일기장엔 주로 비에 대한 시와 일기가 많아서 비에 관한 시집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비에 대한 노래도 자주 부르고 비 오는 그림도 다양하게 그려보면서 언제나 비를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나는 우산도 장화도 비옷도 다 좋아서 여러 개 갖고 싶어요.
지금도 비 오면 엄마 생각나고 엄마가 해 주신 김치 부침개가 먹고 싶어요.
오늘처럼 비 오는 날은 우산 쓰고 함께 걷고 싶은 사람들과 웅크리고 앉아 따뜻한 보리차를 마시며 차분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사진과 그림자료는 제가 찍은 사진이며
그림또한 직접 그린 그림입니다.
저의 꼬마 제자 이승우의 그림도 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