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고 합시다!
히어링 시간과 결과의 상관관계
제가 어렸을 때 즐겨 보았던 코미디 프로그램 중 유머 1번지가 있습니다. 아, 유머 1번지를 기억하신다고요? 하하. 전 독자 여러분들의 나이를 대강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이란 코너도 기억하시는지요? 유머 1번지 맨 뒤에 등장하는 코너로서 개그맨 (故) 김형곤이 회장으로 나오고, 아직 현역으로 활동 중인 개그맨 김학래가 아부꾼 이사로, 개그맨 (故) 양종철이 철없는 이사로 등장하는 바로 그 코너입니다. 특히 개그맨 양종철은 이사 회의 중에 졸다 말고 갑자기 “밥 먹고 합시다”를 외쳐서 우리의 배꼽을 잡게 했습니다. (故) 김형곤, (故) 양종철 모두 제가 참 좋아하던 개그맨이었습니다. 비록 10대 소년이었지만, 이 코너를 통해 저는 조직 생활과 간부들의 고충, 현실 정치 비판에 대한 유쾌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故) 양종철의 “밥 먹고 합시다”란 대사가 그저 ‘뜬금없다’는 생각에 재미있게만 여겼는데, 산재전문 변호사가 된 이후 돌이켜보면 의미 있는 대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뉴욕 산재보험 시스템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히어링’이란 제도인데, 판사의 체력이 히어링의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제 가설입니다.
‘히어링’이란 행정판사의 중재 하에 청구인과 종업원 상해 보험사 간의 치료와 보상 문제를 해결하는 절차입니다. 히어링이 잡힐 때마다 행정 판사의 집회 하에 청구인과 청구인 쪽 변호인, 보험사의 변호인이 출석합니다. 사건 하나마다 히어링이 한 번 내지 수 번 잡힐 수 있습니다. 사건이 복잡할수록, 해결해야 할 이슈가 많을수록 그 히어링의 수는 늘어납니다. 히어링은 짧게는 수분, 길게는 1시간 이상 걸릴 수도 있습니다. 날짜와 시간, 장소는 행정법원 (Workers' Compensation Board)에서 정해서 청구인과 보험사에게 각각 통보합니다.
문제는 ‘히어링’이 열릴 시간대에 대해 청구인이 통제할 권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주어지는 대로 받는 것이지요. 저는 오전 시간대 히어링과 오후 1-2시 사이에 잡히는 히어링이 다른 시간대에 열리는 히어링이 비해 판결이 빠르고 연기(adjournment)가 적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몸의 상태가 인간의 생각에 영향을 주는 까닭에 판결도 시간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재미있는 심리학 연구 결과가 있었는데,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립니다.
스탠퍼드 대학의 조너선 레 바브 교수 연구진은 이스라엘 교도소에서 하루 동안 진행되었던 가석방 심사의 결과를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심사에 투입된 판사들에게서 동일한 패턴이 나타나는데, 이들은 오전 9-10시 사이, 그리고 오후 1- 2시 사이에 심사를 한 죄수들을 다른 시간대보다 월등히 높은 확률로 많이 석방시켰다고 합니다. 심사를 시작한 오전 9-10시 사이, 그리고 점심식사 직후인 오후 1-2시 사이에 판사들은 가장 좋은 컨디션과 높은 집중력으로 심사에 임하였다는 것이지요. 때문에 심사 시간대 (즉, 판사의 체력)에 따라 석방 확률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체력과 정신력은 같은 에너지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 심리학 연구의 결과입니다. 몸의 상태가 인간의 생각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체력이 좋을 때 우리는 가장 효율적으로 능률적인 사고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의 국제 축구 경기 중 특히 후반전에 아나운서들이 곧잘 "우리나라 선수들의 체력이 바닥이 났습니다. 이제 정신력으로 승부해야 할 때입니다"란 멘트를 하곤 하는데, 심리학적으로는 근거가 불충분합니다. 체력과 정신적은 같은 에너지원에서 발생하므로, 체력이 떨어지면 정신력도 떨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히어링은 결국 청구인 쪽 변호사와 보험사 쪽 변호사가 중립적 자리에 있는 판사를 설득하는 과정입니다. 위 연구 결과를 비추어 볼 때, 체력이 좋은 상태의 판사를 가장 설득하기 쉽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체력이 좋지 못한 상태의 판사는 정신적으로도 매우 지친 상태이므로 결정에 있어 매우 소극적일 것입니다. 따라서, 히어링에서 판사의 마음을 사로잡거나 원하는 바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판사의 상태를 파악해야 합니다. 아침 식사 후 충전되어 있을 오전 10-11시, 그리고 점심식사 지후 다시 충전되어 있을 오후 1-2시 사이에 판사들의 몸상태가 가장 좋을 것이므로, 이때 열리는 히어링에서 최선의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제 가설이 심리학 연구로 뒷받침된 것입니다.
AI에 의해 많은 노동력이 대체될 미래에도 판사는 CEO 등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인간이 담당할 것으로 미래학자들은 예견합니다. 중요한 의사결정은 여전히 인간의 몫으로 남겨둘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판사는 기계가 아닌 인간인 까닭에, 인간의 보편적 심리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성공적인 히어링을 이끌기 위해 풍부한 의사 소견서와 증언, 변호사의 경험과 지혜, 전략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판사의 몸상태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체력이 소진되어 빠른 판단을 하기 힘들어하는 판사님들에게 전 외치고 싶습니다.
“밥 먹고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