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하지 못함의 자유

by 뉴욕 산재변호사

내 사무실에는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동료들이 여럿 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면서도 때때로 스페인어로 농담을 주고받고, 불만을 나누고, 일상의 조각들을 공유한다. 나는 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가끔은 흐름 바깥에 서 있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약간의 소외감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소외감 너머엔 어떤 자유가 있다.


지나치게 많은 메시지와 해석, 반응이 요구되는 세상에서, 이해하지 못함은 뜻밖의 해방감을 준다. 나는 반응하지 않아도 된다. 해석하지 않아도 된다. 오랜만에, 그냥 존재만 하면 된다. 그들의 말은 나에게 음악처럼 들린다. 의미는 모르지만, 리듬과 억양, 정서가 흘러온다. 나는 그것을 굳이 꿰뚫으려 하지 않고, 그냥 흘려보낸다. 이해의 의무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쉴 틈이 된다.


한 철학자가 말했다. “행복해지고 싶은가? 고독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고독은 꼭 혼자 있을 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타인의 언어 안에 있으면서도 해석이나 반응의 부담 없이 곁에 있는 것, 그 또한 고독의 한 형태다. 이질감이 주는 단절이 아니라, 책임으로부터 잠시 놓여나는 내면의 평화다.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는 곧 내 세계의 한계”라고 말했다. 하지만 모든 한계가 꼭 감옥은 아니다. 어떤 한계는 쉼터이기도 하다. 나는 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내 세계가 좁아지지만, 동시에 부드러워진다. 내 귀는 더 이상 분석이나 판단의 도구가 아니다. 그냥 소리를 받아들이는 창이 된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를 쉬게 만든다.


물론, 이것은 무관심도, 거리 두기도 아니다. 나는 그들의 수고를 존중하고, 그들의 움직임과 집중력, 말소리 속에 흐르는 유대감을 느낀다.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도, 그들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 그리고 함께 일하고 있다는 감각은 분명히 존재한다. 어쩌면 그것이 더 깊은 차원의 이해일지도 모른다. 번역보다 신뢰에 기반한 이해.


우리는 종종 ‘이해’와 ‘동일함’을 통해서만 공존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타인의 신비를 그대로 두고, 나와 다른 세계가 곁에 숨 쉬게 두는 것. 그 관용 속에 진짜 공존이 있다. 그리고 그 차이를 껴안을 때, 나는 오히려 내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번역되지 않는 말들 속에 앉아 있다. 낯선 언어가 흘러가는 그 공간 속에서, 나는 편안하다. 그것은 고립이 아니다. 공동체 안에서 경험하는 고요한 고독이다. 그리고 그 고독 속에서, 나는 요즘 세상에서는 좀처럼 얻기 힘든 감정 하나를 느낀다.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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