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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영희 Aug 09. 2021

수세미

초록의 긴 몸

기억의 첫 페이지를 넘기면

초록의 긴 몸이었다

여름이 가을로 바뀌면서

파란 수세미는 누렇게 익어갔다


채 마르지 않은 그물 위로

오래 묵은 찌든 때의 자국이 다가온다

수많은 팔의 저울질에 더러움이 씻기고

그물 사이사이 비눗방울 끈적임마저 말끔히 지웠다


찢긴 망 위에 쌓인 통증

닳아버린 뼈를 움켜쥐고 숨을 토해낸다

까맣게 번진 그을림에

더는 소모할 힘이 없어 구멍 난 슬픔을 들키고 말았다


계산될 수 없는 시간

왕성했던 긴 몸이 생의 안부를 묻고

허물어진 몸을 바로 세워 보려 하지만

온몸을 다 적셔 순종하던  그의 마지막 호흡은 쓰레기였다


오래전부터 수세미가 놓인 자리에

색색의 아크릴 수세미가 환하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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