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평생 함께할 알약 두 봉지
병을 앓고 있다는 건 좋은 것도 아니고, 자랑할 만한 건 더더욱 아닌데, 어쩌다 보니 누군가에게 내 글을 전하고자 할 때마다 이 키워드가 자연스레 나온다.
알약 두 봉지를 설명하기에 앞서 내 병에 대한 소개를 먼저 해야겠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학기 초에 희귀 난치병을 앓게 됐다. 복통이 심했고, 살이 4주 동안 이십 킬로가 넘게 빠졌다. 밥을 먹으면 배가 아프니 약속이 있는 날엔 전 날 저녁부터 굶었고, 그렇지 않은 날에 무언가를 막 먹어대도 혀까지 돌아버린 건지 짜거나 싱겁다의 기준을 잃어버린 듯 아무런 맛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 날 보며 이상함을 느낀 엄마는 병원에 가자는 말을 꺼내셨고, 난 그에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내가 알아서 다 하겠다고 하며 꿋꿋이 버텼다. 그때의 나에게 심어진 병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때문이었을까, 그곳에 가면 정말 뭐라도 나올까 봐, 내가 아픈 애가 되어버릴 까 봐 무서웠다.
몸은 점점 썩어문들어져 가는데 거울 속에 살이 빠져 말라있는 내가 너무 좋았다. 나도 참 나지, 그런 모습이 뭐가 예쁜 지 한참 동안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사진도 찍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까, 엄마는 그런 내가 못마땅했던 건지, 아니면 정말 불안했던 건지 병원에 가지 않겠다는 내 뒷목을 잡고 택시에 태워 병원으로 향했다. 뭐, 예상했듯이 의사 선생님은 정밀검사를 해보자고 하시면서 엄마와 이야기해 날 입원시켰고 그 끝에 나온 결론이 '모든 소화기관에 침범할 수 있는 궤양성 질환', '희귀 난치병' 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난 진작 몸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를 챘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걸 부정했던 것 같다. 그건 그냥 단순한 두려움 때문이겠지.
보름이 넘는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면서 피를 뽑을 때마다 울었다. 그냥, 그냥 서러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새 학기에 등교할 생각에 설레며 교복과 가방을 정리했었는데, 타이밍이 오자마자 병원으로 등교를 하다니. 아오, 그때 생각만 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매일 같이 반복한 루틴이 방사선과, 채혈, CT 였으니. 만약 치가 떨리지 않는다면 그건 그냥 미친 걸 수도 있다.
그렇게 지옥 같은 하루를 '퇴원'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버티다 그날이 왔다. 병원 밖으로 나온 나는 소풍 가는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집으로 돌아갔고, 편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한 5시간쯤 잤으려나, 일어나 저녁을 먹고 기분 좋게 치우려 하는데 눈앞에 커다란 약봉지가 보였다.
"아니, 도대체 저 약을 언제, 어떻게 다 먹으라는 거야? 약 먹다가 뒤지겄어 아주."
흔한 감기약이나 해열제는 많이 먹어봤지만 내가 눈으로 본, 앞으로 내가 먹어야 할 약은 크기와 개수부터 달랐다. 쉽게 표현하자면 웬만한 아몬드 크기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저걸 목구멍으로 삼키라니, 그냥 약 먹다 목에 걸려 죽으라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느새 내가 그걸 목 안으로 넘기고 있더라. 개수도 많았던 터라 그냥 다 먹어버리자 라는 마음으로 모든 약을 입 안에 털어 넣고 물을 마셨다. 그 순간 "우욱" 하는 소리와 함께 싱크대에서 약을 토해냈고, 그 이후로 약봉지만 보면 몸서릴 치게 됐다.
자, 이제 현재로 돌아와 보자. 3년 정도가 지난 지금, 과거와 다를 바 없이 늘 그랬듯 습관처럼 약봉지를 주머니와 가방 속에 챙긴다. 이거 안 먹으면 예전처럼, 아니 그 보다 더 아플 거라는데 뭐 별 수 있나. 요즘의 나는 익숙한 노래를 부르며 내 처지를 희화하곤 한다. 아마 한 번쯤 들어본 적 있을 거다. "아침 먹고 땡, 점심 먹고 땡." 나에게 땡은 약이고, 밥을 먹을 때마다 그걸 먹어야 하는 내 현실. 난 그 일을 서럽지만 그냥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중이다. 솔직히 아직 약에 대한 거부감이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느낌엔 익숙해지지 못했지만.
고등학생 때 이런 병에 걸리는 건 아마 흔치는 않을 거다. 처음엔 내가 전생에 뭘 잘못했나 하며 울기도 많이 울었고, 아픈 내가 싫어 안 좋은 맘을 수시로 먹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병을 앓고, 약을 먹는 것 또한 내 경험의 일부라 생각한다. 어린 나이에 쉽게 걸리지 않는 병에 걸린 것. 이상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뭔가 소설에 나온 주인공 같지 않은가? 뻔한 클리셰처럼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극복해내는 소녀의 성장 일기 같은 느낌.
이 글을 쓰면서 참 감정이 오락가락하는 것 같다. 아픈 내 스스로가 딱하기도 하면서, 주인공이라 생각하는 걸 보면 제정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려 어떻게든 노력하는 내가 대단해 보인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흔하지 않은 희귀병을 앓는 소녀의 극복기'가 아니라 '두려움과 절망 끝에 얻게 된 마음'이다. 약을 삼키는 건 힘들고, 수시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는 건 최악이지만 병을 앓은 이후로 생각보다 많은 걸 얻었기에. 미친 척 한 번 해보자면 아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 믿었던 과거를 뒤로하고 인정하는 모습과 이런 병을 가지고 있기에 나는 내가 참 좋다. 평생 가지고 가야 할 것들을 쿨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내가 조금 멋있기도 하고. (이걸 자존감이 높은 거라고 표현해도 될까 싶다.)
이처럼 놓여진 현실에 두려움을 느낄 수는 있다. 그건 당연한 거니까. 하지만 그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자신을 한 번 되돌아봤으면 한다. 처음의 나도 그랬듯이 아픈 나를, 불안정한 나를 인정하기까진 정말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그 끝에는 스스로를 멋진 인간이라 칭하는 내가 존재하더라. 세상엔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들, 할 수 없는 일들이 있고, 할 수 없는 일들이라 할 지어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아파도 괜찮다. 불안정해도 괜찮고, 힘들어해도 괜찮다. 딱히 '다 괜찮아질 거야.' 하는 입에 발린 위로는 하지 않겠다. (그딴 거 다 필요 없고) 남이 해주는 위로보단 내가 날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더 좋은 위로가 될 거다.
나는 내가 제일 잘 아니까. 어디가 어떻게 힘들고, 어디가 아프고, 어느 부분에서 불안감을 느끼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 시간은 한없이 지치고, 길고, 힘들겠지만 큰 감정과 이해를 내어줄 테니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