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내일은 몇 시 출근이더라
"4월 26일부터 정식 출근하시면 됩니다."
첫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회사에 면접을 본 지 약 1시간 만에 온 메시지 내용이다. 좋으면서도 굉장히 당황스러웠지만... 난 돈 없는 백수였기 때문에 길거리에서 메시지를 보자마자 아무도 없는 곳을 보며 여러 번 허리를 숙여 감사함을 표현했다. 그렇게 난 두 번째 직장에 입사를 하였고, 그 감사함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출근을 하자마자 유니폼을 갈아입고, 신발을 갈아신으며 마음속으로 "면접 볼 때 분명 매장엔 좋은 사람들만 있다고 했으니까 별일 없겠지? 아, 이런 곳에서 일을 하다니 난 정말 행복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했다. 다들 나이대도 꽤 있으시고, 베테랑들만 있다고 하시니 많은 걸 배울 수 있겠구나 하는 설렘에 부풀어 있었다. 옷을 다 갈아입고 문을 열고 나가자 다른 직원분들이 보였고, 난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최은나라고 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 "저희도 잘 부탁드려요. 일 시작하시기 전에 교육 먼저 해드릴게요."
매장에서 쓰는 물건들의 위치, 점심은 어떻게 해결하는지, 근무시간, 하는 일 등등 많은 걸 수첩에 적으며 하나씩 외워갔고, 익숙해진 모습으로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3개월이 지나있었다.
근무를 하면서 정말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중엔 만나지 않을 것만 같던 종류의 사람도 있었다. <내 정보를 캐묻는 사람, 자그마한 일에 역정을 내는 사람, 나이가 어리다며 무시하는 사람, 계산을 하려 자신에게 뻗은 내 손바닥을 자기 손톱으로 긁는 변태 같은 사람> 난 아직 정말 몇 년 안 살았고, 일도 몇 개월 안 했지만 남들이 말하는 '인류애가 사라진다.'라는 말을 바로 인정하게 되었다. 누군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임에도 이미 인류애가 박살 나버린 나는 그에 대한 기대도, 그를 위한 웃음도 없었고, 결국 없는 정마저도 사라지는 느낌을 늘 받게 됐다.
하루는 같이 일하는 실장님에게 살며시 다가가 사회생활에 대해 조심스레 물었다.
"실장님, 원래 사회생활이라는 게 이런 거예요?"
- "그럼 이게 사회생활이지, 이런 것도 못하면 은나쌤은 나중에 어떻게 살아갈래?"
?... 아니, 내가 어떻게 살지 방법을 전수해달라고 했었나? 나는 분명 사회생활이 이런 거냐고 단순한 질문을 던졌을 뿐인데도 되려 대차게 까이고 말았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린 항상 본인이 쓴 것들은 스스로 치우고 가자라는 암묵적인 룰이 있다. 어느 날 마감시간에 실장님과 나, 둘만 매장에 남아있었는데, 실장님이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날다람쥐처럼 매장 문을 열고 뛰어가는 게 아니겠는가. 순간 당황감과 웃김이 합쳐져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실장님을 향해 "실장님! 다 치우신 건 맞으시겠죠?!"라고 소리쳤고, 실장님도 웃으며 고개를 세게 흔드시고는 사라지셨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남은 내가 매장 문을 닫아야 하기에 의자에 앉아 영업 종료 시간을 기다리는데 핸드폰에 카톡 알람이 '까똑"하며 울렸다. 뭐지, 누구지. 연락 올 사람이 없는데. 하며 미리보기로 내용을 본 순간 입꼬리에 걸려있던 웃음기가 살아지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최종 마감은 마감인 사람이 체크해야죠. 자꾸 물어보길래 톡 남겨요. 선생님이 정리 안 했을 때도 전 남아서 다 점검하고 퇴근합니다.'
누군가 내 머리를 주먹으로 세게 친다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내가 기억하고 있던 뛰어가신 실장님의 모습은 이게 아니었는데. 하며 순간적으로 속에서 불을 내뿜었다. 하지만 이런 거에 기죽을 내가 아니지. 사회생활에 좋은 부분은 아닐 테지만 난 꼭 이걸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으로 긴 장문을 적어 실장님께 전송했다.
'실장님, 실장님이 하신 말씀 어떤 부분에서 이야기하시는 건지 저도 압니다. 그렇지만 제가 먼저 퇴근할 때, 하나라도 더 마감하고 가겠다는 절 그냥 보내신 건 실장님이세요. 그 부분에 대해선 배려해주신 거라 생각하고 항상 감사합니다. 저는 그냥 단순히 각자의 몫은 각자가 치워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나가실 때 물어본 거였습니다.'
이렇게 보낸 후 3분이 지났을까. 실장님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네, 저는 제가 정리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말한 거예요. 저도 사람이다 보니 놓칠 때가 있겠지만 정리에 대한 부분에선 제가 더 많이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중략) 불만사항 같은 거는 평소에 시간 있을 때 말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집에 조심히 들어가세요.'
이러고 나서 다음 날까지 회의를 했고, 그 대화 속에서 실장님은 나를 다른 직원과 비교하셨다. 나는 대화하기 싫냐는 실장님의 물음에 '아니요?'라며 두 눈 크게 뜨고 대답하기도 했다. 그렇게 겨우 상황을 마무리했다.
자, 여기까지가 실장님과의 스토리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실장님을 안 좋게 볼 수도 있고, 날 재수 없는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이 이야기를 적은 이유는 '누가 더 나은 지 평가해주세요!'가 아니라 직장을 다니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평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실장님과 너무나도 잘 지내서 탈입니다. 실장님 제 마음 아시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직장에선 경력이 없고, 갓 입사한 사람은 저마다 인턴, 교육생, 실습생이라는 호칭을 갖고, 직급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모든 걸 배우기 마련이다. 아까 했던 이야기 속에서 내가 실장님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아마 실장님도 날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고, 이렇게 그 직장이라는 곳에선 어이가 없는 일도, 이해하지 못하는 일도 생긴다.
직장상사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 하기 싫은 일도 도맡아서 하는 것, 회식에서 술을 마시기 싫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마셔야 하는 것. 우린 그것들을 자연스레 사회생활이라 부르며 익숙해지고,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당연시 여기기 시작하며, 괜찮지 않으면서 괜찮다고 말한다. 나는 십 대를 벗어나자마자 직장을 갖게 됐고, 사회생활이라는 걸 바로 배웠지만 아직도 속이 부글부글 거릴 때가 많다.
내가 실장님께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던 것처럼 자신이 생각하는 것들을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쯤 있겠지만 그렇게 많지 않을 거라고 감히 추측해본다. 싫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고, 괜히 안 좋은 소리를 했다간 나중에 불이익을 받을까 봐. 하지만 그게 나쁜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 행동이 미래의 날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라면 꼭 해야만 하는 거니까. 그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고, 현실이고, 사회인 거니까.
우린 아마 이런 날을 계속 경험해야 할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고, 몸이 따라주지 않아 할 수 없이 일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그날들을 보내는 시간 속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내가 하고자 하는 말, 내가 하는 생각, 내 존재 자체를 잃지 않는 것이다. 물론 직장상사나 중요한 일에선 숨길 줄도 알아야겠지만, 무조건적으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돼. 내가 힘들더라도 참아야 해. 이것도 못하면 나중에 더 큰 곳에서 사회생활을 어떻게 하겠어.' 하는 생각들은 버렸으면 좋겠다.
내가 지금 이런 것들을 견디며 살아가는 이유는 단 하나, 내가 행복하게 살기 위함과 내가 하고자 하는 것들을 위한 것이지 남을 위한 행동이 아니니깐.
나는 앞으로 직장생활, 사회생활을 하면서 누군가 내게 '그렇게 하면 뒤에서 남들이 욕해.'라고 한다면 '뭐, 어쩌라고. 너도 뒤에서 욕 겁나 먹어.' 하는 생각을 갖고, '할 줄 아는 게 이런 것밖에 없어?'라고 한다면 '할 줄 아는 게 많다는 양반이 그렇게 귀한 시간에 하는 거라곤 잔소리밖에 없냐?'라는 마음을 갖고 살 거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난 정말 시들어버린 채소처럼 살 지도 모르니깐.
참... 사회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다보니 괜히 울적해진다. 이 글을 보는 당신도 아마 내일... 출근이겠지? 내일 하루도 같이 열심히... 잘... 이겨내보자... '퇴사'라는 단어를 항상 맘 속에 품고선 말이다...
"나 내일은 진짜 꼭 퇴사한다. 일 때려치우고 놀면서 살 거야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어? 아니, 가오도 없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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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큼, 그래서 저 내일은 몇 시 출근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