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301호 청년 19화

연륜있는 믹스커피

by 김승수

새벽부터 시작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아침이었다. 관리인은 비가 오는 날이면 가만히 서서 빗소리를 들으며, 믹스 커피 한잔을 마시곤 했다. 오늘도 역시 관리실에서 꺼내온 믹스 커피를 타고 커피를 마시는 충이었다. 그때 쓰레기 봉투를 들고 도민이 내려왔다.


“안녕하세요. 비가 제법 오네요.”

“301호네요. 그쵸? 가만히 서서 들으면 빗소리가 제법 듣기 좋답니다.”

“빗소리 좋죠....”

“막 일어났나 봐요? 머리에 까치집이 생겼네.”


도민이 황급히 손으로 머리를 빗질하자 관리인이 가볍게 웃었다.


“안 바쁘면 커피 한잔할래요? 내가 교직 생활하면서 믹스 커피는 기가 막히게 타기로 유명

했거든요”

“네. 주시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도민이 관리인의 호의에 감사해하며 빗소리를 감상하는 동안, 관리인이 금세 커피를 타서 도

민에게 건냈다.


“우리 취준생 301호의 구직 활동은 어떻게 진행 중인가요? 잘되나요?”

“아 그게 최근에 면접을 봤었는데, 잘 안됐어요.”

“아이고, 얼굴도 훤하고, 이렇게 착한데 뭐가 문제였을까?”

“아침부터 칭찬해주시니 부끄럽네요. 흠.. 그러게요. 뭐가 문제였을까요?”

“다음에 또 좋은 기회가 있을 거예요.”

“저 혹시, 관리인님께서는 좋아하거나 취미 같은 게 있으신가요?”

“취미라... 평생을 학생들 가르치는 일만 했어서 취미라고 할 건 없죠.”

“교사셨어요?”

“왜요? 할아버지 관리인한테는 안 어울리는가?”

“아뇨 아뇨. 그런게 아니라 관리인님이 다른 일을 했었을 거라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당연히 예전에는 다른 직장이 있으셨을 건데요.”


관리인은 당황해하는 도민을 바라보며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럴 수 있죠. 나도 가끔 지금 하는 일이 너무 천직이라, 선생 했다는 걸 가끔 까먹는답니다. 흠 보자... 취미는 없어도 좋아하는 일은 있네요, 애들이 이쁘게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랍니다.”

“애들이 커가는 모습이요? 그건 관리인님이 뭔갈 하시는 게 아니잖아요. 보통은 운동을 좋아한다거나, 독서를 좋아한다거나 그러지 않나요?”

“뭐, 그 말도 틀린 건 아니죠. 그치만, 말 그대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니 내가 기분 좋으면 된 거 아니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애들 커가는 모습 구경하는 게 제일 좋답니다. 여기 사는 803호 승우 커가는 거 보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요. 애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커서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한답니다.”


도민이 별생각 없이 툭 내뱉은 질문에 관리인의 대답은 세월이 느껴지는 듯했고, 도민은 그저 멍하니 관리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네요. 자기가 좋아하면 되는 거죠. 멋있네요. 뭔가.”

“멋있긴요. 그냥 할 일 없는 늙은이니깐 하는 소리죠.”

“그래도요. 뭔가 느낌 있었어요.”

“하하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니 다행이네요. 나는 이제 건물 주변 순찰하러 가야 해서 먼저 갈게요. 종이컵은 종이류에. 알죠?”

“네. 당연하죠. 커피 잘 먹었습니다.”

“그래요. 고생해요. 301호,”


도민은 관리인이 편의점으로 향하고 나서도 빗소리를 들으며 믹스 커피 한잔과 함께 잠시 동안 여운을 더 즐겼다.


며칠 뒤, 도민의 두 번째 면접이 있던 오후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여행사였고, 지난번 면접 본 회사에 지원서를 넣을 때 같이 지원서를 넣었던 회사였다. 오늘도 도민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정장을 입고, 왁스로 가르마를 만든 상태로 면접에 임했다. 이미 한번 면접을 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지난번 면접날에 비해 차분한 상태로 면접을 하고 나온 도민이었다. 지난번과는 달리 취미나 좋아하는 일에 대한 질문을 받지 않은 도민이었지만, 유난히 면접에 집중하지 못해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왔는지조차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비 오는 날 관리인과 나눴던 대화와 당당하게 자신이 배우 지망생임을 밝히던 옆집 이웃의 등장은 흘러가는 대로 살아오며 자신의 행복을 위한 행동이나 목표는 필요 없다 여기던 도민에게는 꽤 충격적이었다. 그로 인한 여파가 도민의 두 번째 면접에 영향을 준 것이었다. 자신에게는 없지만, 옆집 여자와 관리인은 가지고 있는 '좋아하는 일'이라는 개념은 도민에게 있어 면접 때 남들보다 눈에 띌 수 있는 어떠한 행동이나 취미에 불가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남들의 시선은 신경쓰지 않은 채 온전히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진 상태로, 당당하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말했다. 이러한 모습들은 도민의 일상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기에 도민에게는 강렬하게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도민은 자신이 사는 동네에 도착해있었다. 도민은 멀리서 노란색 유치원 차랑이 정차하는 것을 목격했고, 승우를 마중 나가고자 버스로 뛰어갔다. 늘 그렇듯 아이는 가장 마지막에 내려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선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이가 있었다.

“승우야!”

아이가 들릴 일 없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를 찾아 고개를 돌렸고, 아이는 도민을 찾을 수 있었다.


“어? 아저씨?”

아이는 예상치 못한 인물이 버스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잠시 놀랐지만, 다른 아이들처럼 버스에서 내렸을 때 맞이해주는 사람이 있음에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유치원은 어땠어?”

“네, 재밌었어요. 근데 아저씨가 왜 여기 있어요?”

“아저씨도 집 가는 길이었는데, 승우 유치원 버스가 있길래 승우 기다리고 있었지.”

“아저씨, 근데 머리가 왜 그래요?”

“왜? 머리 이상해?”

“음.. 안 어울리는 것 갈아요.”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순수한 눈빛으로 말하는 아이의 평가에 도민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오늘 면접 제대로 못 본 게 머리 때문인가보다.”

“면접이 뭐에요?”

“아저씨도 승우네 엄마처럼 회사 다니려면 면접이라는 걸 봐야 회사를 다닐 수 있거든.”

“그럼 좋은 게 아니네요?”

“아냐. 회사를 다녀야, 엄마처럼 돈을 벌 수 있거든.”

“그래도 회사 다니면 늦게 집에 들어오잖아요.”

“음... 그렇게 말하니깐 좋은 게 아니긴 하네.”


도민과 아이가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서로가 가까워지는 사이 둘은 약국을 지나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다. 오피스텔 앞에서는 관리인이 주차장 근처를 청소하고 있었다. 도민의 곁에 있던 아이는 관리인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승우 왔구나. 오늘도 잘 놀다 왔어?”

“네!”

“그래? 다행이구나. 301호도 같이 있었네요. 요즘 승우랑 붙어있는 시간이 많네.”

“어쩌다 보니 승우랑 자주 마주치네요. 아 저는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올라가 봐요. 승우도 형이랑 같이 올라가.”

”네! 안녕히 계세요.“


도민은 승우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린 후 엘리베이터에 탑승했고, 익숙한 듯 3층과 8층 버튼을 눌렀다. 3층에 도착하자 아이와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선 301호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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