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마신 술 때문인지 몇 번의 알람 소리에도 일어나지 않던 도민은 창문 넘어 들리는 자동차 클락션 소리에 슬며시 눈을 떴다. 도민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누운 상태로 기지개를 폈다. 5분 정도 더 누워있던 도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2L짜리 물병을 통째로 들어 올려 마시기 시작했다. 그때 휴대폰에서 문자 알림음이 들렸다. 도민은 충전기에 연결된 휴대폰을 들어 올려 눈으로 문자를 확인했다.
[하늘 투어 합격자 발표]
안녕하세요. 하늘투어 채용 담당자입니다
금년 상반기 신입사원 공채 채용결과 불합격을 안내드립니다.
좋은 결과를 전해드리지 못한 점 사과드리며, 하늘투어에 많은 관심과 입사 지원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마주친 현실에 도민은 한숨이 나올 뿐이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경험한 불합격 통보는 꽤 차가웠고, 작아지는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도민은 오늘 하루만큼은 쉬면서 자신을 달래줄 필요가 있다고 느껴, 조용히 장바구니를 챙겨 밖으로 나셨다. 도민은 살면서 처음으로 취업의 문턱에서 미끌어지며 하루가 시작되었지만, 컬처타운 밖의 세상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족발값은 비쌌고, 카페에는 노트북을 켠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도민은 각종 가게를 지나고, 신호등을 건너 동네 할인 마트에 도착했다. 자연스레 눈은 할인하는 상품으로 향했다.
‘왕만두 5000원’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냉동고의 문을 열어 왕만두가 든 봉지를 집어 들었다. 비록 면접에서는 떨어졌지만, 할인하는 왕만두 하나만으로도 다시금 기분이 좋아져 슬며시 웃음이 세어나왔다. 고작 할인 상품 하나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도민은 속으로 ‘인생 별거 없네!’라고 외치며 자신을 위로했다.
집으로 돌아온 도민은 곧장 식사를 준비했다. 냄비에 물을 담고선 육수를 내기 시작했고, 냉장고에서 말라가는 대파와 양파를 꺼내 손질하여 만둣국에 넣을 수 있게 손질하였다. 화려한 칼질은 아니지만 제법 칼을 잡아본 태가 나는 칼질이었다. 도민은 오늘만큼은 자신에게 휴식을 주고자 했기에, 큰맘 먹고 손에 잡히는 대로 왕만두를 넣기 시작했다. 보글보글 끓는 물 사이로 왕만두가 익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의식의 흐름은 다시 도민을 면접장으로 돌려보냈다. 도민이 생각하기에 자신이 불합격한 이유는 두 가지 정도였다. 첫 번째 이유는 자신이 하늘투어에 입사하고 싶은 이유에서 면접관이 진심이 느껴지지 못했을 것이었고, 두 번째로는 자신이 유일하게 답하지 못한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가?' 질문이었다. 도민은 이 두 가지 이유를 돌이켜 보다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른다는 게 문제네.’
도민은 또다시 돌아온 ‘좋아하는 일’에 대한 고민에 머리가 아파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서 완성된 만둣국을 그릇에 옮겨 담았다. 생김새는 그럴싸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간의 요리 경험을 바탕으로 맛은 보장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301호의 문에서 미세하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도민은 휴대폰을 보며 밥을 먹고 있었기에 작은 소리에 잠시 흠칫할 뿐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잠시 후, 한 번 더 작게 노크 소리가 틀렸고 이번에는 남자아이의 목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아저씨, 저 승우예요. 문 좀 열어주세요”
도민은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문을 열어주었다. 아이는 문밖에서 도민을 바라보며 조용히 서 있었다.
“승우야 무슨 일 있어? 아저씨가 밥을 먹고 있느라 잘 못 들었어.”
“도와주세요.”
“응? 무슨 일 있어?”
“네. 오늘 엄마 생일 선물 사야 해요.”
“오늘이 엄마 생신이셔?”
“네. 맞아요.
“엄마 생신도 챙겨주고 기특한데? 선물 살 돈은 있어?”
“돈은 있어요.”
아이는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지폐 몇 장을 꺼내어 도민에게 자랑하듯 보여주었다.
“음. 그럼, 아저씨가 뭘 도와줘야 하니?”
“선물을 뭘 사야 할지 모르겠어요.”
“선물 고르는 걸 도와주면 될까?”
“맞아요.”
“그래 그래. 도와줄게. 근데 승우야 내가 밥을 먹고 있어서, 밥만 금방 먹고 도와줘도 될까?”
“네.”
“고마워. 안으로 들어와서 기다릴래?”
“감사합니다.”
아이는 90도 인사를 하고선 조용히 도민의 방으로 들어왔다. 아이는 도민이 밥을 먹는 동안 암전히 벽에 기대어 돈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부모님 이외에 본인의 집에 누군가 들어온 것이 처음인 도민은 어색한 분위기를 폴고자 괜스레 말을 건냈다.
“돈은 어떻게 모았어?”
“심부름 하거나. 엄마 말 잘 들으면 엄마가 500원씩 주세요.”
“그래? 얼마나 모았어?”
“7500원이요.”
“많이 모았는걸? 엄마 선물로는 얼마나 쓰려고?”
“음, 전부 다 쓸 수 있어요!”
“진짜? 그거 다 쓰면 나중에 승우 먹고 싶은 거 못 먹잖아. 괜찮아?”
아이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잠시 고민했다. 도민은 고민하는 아이의 모습이 귀여워하며, 마지막 하나 남은 만두를 먹어치웠다. 잠시 후, 아이는 조심스레 손가락 6개를 펼쳐 보였다.
“그럼... 6000원이요. 친구랑 과자 사 먹기로 했거든요.”
“하하하 그래 과자 사먹을 돈은 남겨둬야지. 선물은 뭘 사야힐까? 엄마는 어떤걸 좋아하셔?”
“엄마는 일을 좋아해요.”
“음 그런 거 말고, 먹을 거라던가, 물건이라던가 그런 거 있잖아.”
“모르겠어요. 그래서 아저씨한테 왔어요.”
“그래? 그러면 일단 같이 나가볼까?”
“좋아요.”
도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하게 그릇을 정리하고선, 아이와 함께 문밖을 나섰다. 도민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떤 선물을 사야 힐지 고민했지만, 적은 금액에 성인 여성을 만족시킬 수 있는 선물이 떠오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휴대폰으로 선물을 주고받다 보니 밖에서 선물을 사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컬처타운’ 밖을 나온 둘은 말 없이 걸었고, 집화점 앞에 멈춰 섰다. 도민은 아이에게 둘러보며 엄마가 좋아했던 것을 찾아보라고 하였다. 집화점을 빙글빙글 돌며 둘러보던 아이는 마음에 드는 것이 없는지 금세 도민에게 돌아왔다.
“여기는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 그럼 다른 곳도 가보자.”
“네.”
둘은 잡화점에서 나와 또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었다. 행선지를 정하지 않고, 걷던 둘은 고소한 빵 냄새에 아이의 걸음이 느려지면서 멈춰 섰다.
“먹고 싶어?”
“네. 그치만 빵을 먹으면 엄마 선물을 살 돈이 부족해서 안돼요.”
“그럼, 엄마랑 승우랑 같이 먹을 수 있는 빵을 여러 개 사는 건 어때?”
“으음...”
“아니면 케이크는 어때? 돈이 걱정이면, 아저씨가 돈을 조금 보태줄게”
“안돼요! 그럼 제가 사는 게 아니잖아요.”
“단호한걸? 그럼 다른 거 사러 길까?”
“네.”
아이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놀랐지만, 엄마를 위한 마음이 그만큼 크기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며 도민은 또다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얼마도 채 지나지 않아, 도민은 아이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이상해 뒤를 돌아보았다. 뒤를 돌아보니, 아이는 빵집 바로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도민은 가게로 돌아가 아이에게 말을 건냈다.
“혹시 빵 먹고 싶어?”
“먹고 싶긴 한데, 참아야 해서 냄새만 맡고 있어요.”
“아저씨가 사줄까?”
도민은 빵 앞에서 이성과 싸우고 있는 아이가 기특하면서도 귀여워 아이의 손을 잡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하나만 딱 사줄게. 아저씨도 먹고 싶은데, 혼자 먹으면 민망하니깐 승우 것도 사주는 거야. 하나만 골라 오는 거다?”
아이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슬며시 진열대 앞으로 가 생크림 빵을 하나 골라왔다. 빵을 먹고 싶은 생각이 없던 도민은 대충 눈앞에 보이는 소보로 빵을 집었다. 계산을 하고선 둘은 다시 가게를 빠져나와 빵을 하나씩 들고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도민은 빵을 입에 물고 우물우물하고 걷고 있었는데, 빵을 든 반대편 손의 손가락에 뭔가가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옆을 보니, 아이가 한 손에는 생크림 빵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도민의 손가락은 잡고 있었다. 빵으로 인해 아이의 마음이 열렸다는 것이 마냥 신기하게 느껴졌고, 도민도 지금 상황이 싫지 않았기에 아이의 호의를 즐기기로 했다. 또다시 행선지가 없이 걷고 있던 와중에 아이가 약하게 소리쳤다.
“어! 이거다!”
도민은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고, 형형색색의 꽃들이 잔똑 모인 가게가 보였다.
“저 이걸로 할래요.”
“꽃?”
“네, 저번에 엄마람 같이 유치원 가는데, 예쁘다고 좋아했었어요.”
“승우야 너 나중에 여자친구한테 사랑받겠다.”
“네? 왜요?”
“그냥 그런 게 있어. 그럼 들어가 보자.”
둘은 여전히 손을 꼭 잡은 채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에 들어가니 30대 중반의 여자로 보이는 사장님이 꽃을 손질하며 둘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이 친구가 엄마 생신 선물로 꽃을 선물하고 싶다고 해서요.”
“어머 예뻐라. 엄마가 엄청 좋아하시겠다. 우리 꼬마 친구는 무슨 꽃을 찾아요?”
“예쁜 꽃이요.”
“여긴 다 예쁜 꽃밖에 없는데 어쩌지? 그럼 엄마가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는 알아요?”
“노란색이요.”
“노란색 꽃이 또 예쁜 게 많아요.”
“저 혹시 이 친구가 7500원 밖에 없는데. 그 안으로 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제가 7000원으로 해드릴게요.”
“7000원이요? 잠시만요?”
도민은 아이가 마지노선으로 잡은 6000원이 벗어났음을 인지하고, 아이에게 조용히 밀을 건냈다.
“승우야. 선생님이 7000원으로 예쁘게 꽃다발을 만들어 주신다는데, 괜찮아? 7000원 쓰고 나면, 과자 못 먹을 텐데?”
아이는 다시 한번 빵집 앞에서 지어 보였던 표정을 보이며, 잠깐 고민하더니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괜찮아요. 과자보다는 엄마 웃는 게 더 좋아요!”
“그래? 그럼 말씀드리고 기다리자.”
“선생님, 7000원 여기 있어요. 이쁘게 만들어 주세요.”
“당연하지. 선생님이 이쁘게 만들어 줄게요.”
도민은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몇 장과 500원짜리 동전을 내미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며. 아이가 엄마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도민은 아이의 당찬 대답올 떠올리며 아이의 어른스러운 모습에 잠시 감탄했다. 잠시 후 꽃다발을 들고 여주인이 돌아왔다.
“자 여기 있어요. 중간에 있는 꽃은 해바라기고, 옆에 있는 작은 꽃들은 안개꽃이에요. 엄마한테 꽃 드릴 때, ‘엄마가 내 태양이에요. ’라고 이야기해주면 100점.”
“네...”
“어렵나? 하하하”
“해바라기 이쁘네요. 승우야 엄마가 좋아하시겠다.”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살포시 꽃냄새를 맡았다. 아이와 도민은 그렇게 가게 문을 나섰다. 돌아가는 뒷모습에 한 손은 꽃다발을 한 손은 도민의 손을 잡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