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 들어온 도민은 기운이 쪽 빠진 듯 옷도 벗지 않은 채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천장 위 LED 조명은 평소처럼 쨍하게 방을 밝히고 있었다. 열심히 왁스로 손질한 머리는 여전히 굳어 있었고, 도민이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잔디가 밟히듯 바스락 소리가 났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도민은 승우와 함께 있을 때를 떠올리며,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보는걸 좋아하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움직이기 싫어서 휴대폰만 만지던 도민은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씻기 시작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기 시작하자, 빳빳했던 머리카락들이 점점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샤워를 마친 도민의 눈앞에는 피로에 절여진 생쥐가 서 있었다.
한참을 누워있던 도민은 문득 맥주 한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어떤 문제가 잘 안 풀리거나, 인생이 고단할 때 술을 마시며 인생을 돌이켜 보곤 했는데, 지금 자신의 모습이 딱 그런 듯하여 오늘은 맥주를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냉장고를 열어 맥주를 찾아보았지만, 냉장고 안에는 말라가는 대파와 양파, 계란 5알 그리고 김치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도민은 간김에 편의점에서 안줏거리라도 대충 사 올 것을 마음먹고 문밖을 나섰다.
편의점에 문 앞에 도착한 도민은 고개를 내밀어 점장이 있는지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편의점 점장이 자리에 앉아 손님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자신이 들어가면 점장이 분명 오늘은 왜 물 안 사가냐고 말을 건낼 것 같았지만, 한시라도 빨리 맥주가 먹고 싶었기에 그냥 들어가기로 했다.
도민의 예상대로 편의점 점장은 도민이 편의점으로 들어가자마자 말을 건냈다.
“오늘은 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 물이 벌써 떨어졌어요?”
“아뇨. 오늘은 물 사러 온 건 아니고, 맥주 사려고요.”
“맥주?”
“네.”
“아아 맞아 맞아. 지난번에 면접 본다는 거, 어떻게 됐어요?”
“아직 결과는 안 나왔는데, 잘 안된 것 같아요."
“아이고, 그래서 맥주 사러 왔구나. 맘 아파서 어떡해. 잠시만 기다려봐요. 내가 저기 손님 결제만 도와드리고 하나 챙겨줄게.”
“예?”
도민이 여전히 정신없는 편의점 점장을 보며 당황해하는 사이 점장은 도민보다 먼저 와 있던 손님의 계산을 완료하고선 도민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점장은 금세 맥주 진열대에서 맥주 4캔을 품에 안고서 돌아왔다.
“자 이거 먹어요. 이게 또 신상 수집가가 요즘 맛들린 맥주인데 한번 먹어봐봐. 먹고 힘내서 거기 말고 더 좋은 회사에 붙어 버리자고. 아 공짜는 아니니깐 맘 쓰지 말고, 먹어보고 맛있으면 나한테 알려주기만 해줘요. 발주할 때 더 넣게.”
“괜찮은데...”
“우리 물 손님, 한번 떨어졌다고 기죽지 말고 다시 하면 돼!”
“아직 떨어진 건...”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 말뜻은 힘내라는 거 아니겠어?”
“감사합니다.”
“시원할 때 먹게 얼른 가져가요. 먹어보고 꼭 후기 알려줘야 해.”
“아.. 네.”
도민은 편의점 점장의 휘몰아치는 말솜씨에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고선 편의점 밖을 나섰다. 정신을 차려보니 안줏거리를 사는 걸 깜빡한 것을 깨달았고, 뒤를 돌아서 편의점으로 다시 들어가려 했으나, 해맑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편의점 점장을 보고선 빠르게 포기하였다. 도민은 감사의 뜻으로 고개 숙여 인사하였고 집으로 돌아갔다.
얼떨결에 신상 맥주 4캔을 받아 들고선 돌아온 도민은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느라 잠시 멈춰 서 있었다. 컬처타운에 자신이 입주한 이후로 두달 가량의 짧은 기간 동안 자신의 삶에 새로운 인물들이 많이 들어오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예상치 못한 변화들에 자신도 모르게 삶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고 있음을 새삼 느낀 도민은 ‘좋은게 좋은거지’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도민은 점장에게서 받은 맥주를 한 캔 들어 올려선, ‘치익’ 소리와 함께 맥주 캔을 땄다. 캔을 따는 동시에 거품이 올라왔고 도민은 흐르는 거품을 해결하고자 곧장 입울 갖다 됐다. 거품을 마시고 나서야, 도민은 비로소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일반 맥주보다 쌉쌀한 맛이 강해서 맥주 겉면을 확인했더니, ‘청정 맥아로 만든 흑맥주’라고 적힌 문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평소 흑맥주를 마시면 한약 맛이 나는 것 같아 거부감이 있던 도민이었기에, 생각보다 맛있다는 생각이 들어 편의점 점장에게 긍정적인 후기를 남길 수 있겠다라고 생각했다.
도민이 한 캔을 다 마셔갈 때쯤, 누군가 301호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 똑. 똑.”
도민은 배달을 시킨 것도 없어서, 승우가 밑으로 내려왔을 수도 있겠거니 라는 생각을 하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승우의 정수리가 보여야 할 자리에는 다리가 보였다. 도민은 살짝 당황해하며 고개를 들었고, 눈앞에는 옆집 여자가 서 있었다.
“옆집...”
“네. 맞아요! 302호”
“어쩐 일이세요?”
“이거 드리려고요!”
고개를 내려서 쳐다본 302호의 손에는 티켓 2장이 들려있었다.
“티켓이네요?”
“저 때문에 시끄러웠다는 게 신경 쓰여서 사과드릴 겸 가져왔어요. 이거 제가 나오는 연극인데 꽤 재밌어요. 아마 오시면 몇몇 대사는 익숙하실 수도 있어요.”
“혹시 그 대사가 제가 밤에 가끔 들은 그 말들인가요?”
“아마도요?”
옆집 여자가 슬며시 웃음을 보이자 도민도 고개를 돌려 가볍게 웃었다. 그때 도민의 눈에 편의점에서 받은 맥주가 눈에 들어왔다.
“혹시 흑맥주 좋아하세요?”
“그럼요. 없어서 못 먹죠”
“그럼 혹시 제가 좀 전에 맥주를 몇 개 받았는데, 한 캔 드실래요?”
“진짜요? 감사합니다. 그럼, 제가 짐만 두고 다시 와도 될까요?”
“다시 오신다고요?”
“네! 짐이 많아서 두고 올 테니, 같이 마셔요.”
“같이요?”
“이왕 마시는 거 혼자 마시면 심심하잖아요. 잠시만요.”
옆집 여자의 예상치 못한 친화력에 놀라 도민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 그녀는 재빨리 집으로 들어갔다. 면접부터 편의점 점장의 선물 그리고 이웃 주민과 함께 마시게 될 맥주까지 하루 사이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어 어안이 벙벙했지만, 도민은 늘 그렇듯 좋은게 좋은거라 되뇌이며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잠시 후 이웃 주민은 체육복 바지로 갈아입은 채 도민 앞에 나타났다.
“들어갈까요?”
“아...아뇨. 집은 좀 더러워서 그렇고. 공원 가서 마시는 건 어때요? 한 5분 걸으면 나오는데?”
“그것도 좋아요!”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해는 이미 사라져서 달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둘은 도민이 늘 달리는 코스에 있는 공원으로 향했고, 쾌활한 이웃 주민은 가는 동안에도 쉼 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잠시 후, 둘은 공원 한켠에 위치한 벤치에 도작하였고, 벤치에 앉아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오? 이거 맛있네요?”
“그러게요. 생각보다 먹을만 하네요.”
“먹을만 한 게 아니라 맛있는데요?”
“그래요? 선물해주신 분한테 맛있었다고 꼭 말씀드릴게요.”
“사과도 드릴 겸 티켓 가지고 온 거였는데, 오히려 제가 선물을 받았네요.”
“저도 혼자 다 마시기 곤란했는데 잘 됐죠. 티켓은 감사합니다.”
“꼭 보러 오세요. 밤마다 시끄럽게 했는데, 얼마나 잘하는지 구경하셔야죠.”
“아니 뭐 그렇게 엄청 시끄러운 건 아니었는데...”
도민은 옆집 여자가 자신이 한 말을 맘에 담아두고 있었던 것 같아 어색한 듯 머리를 긁었고, 화제를 전환하고자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연극은 무슨 내용이에요?”
“그게 좀 심오해요. 한 남자를 절실하게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남자는 이미 결혼한 남자란 말이죠? 근데. 여자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남자에게 자신의 사랑을 강요하는 내용이에요. 어때요? 좀 섬찟하죠?”
“네. 좀 그런 것 같아요. 그러면 주인공이신가요?”
“아뇨. 극에서 저는 주인공 남자의 부인 역을 맡았어요.”
“어쩐지 좀 들리는 목소리가 슬프더라고요.”
“그랬나요? 칭찬으로 생각할게요.”
“부인 역이면 대사가 좀 많겠네요?”
“아뇨. 분량은 별로 없어요. 극이 80분이면, 제가 나오는 건 한 15분?”
“네? 그것 밖에 안돼요?”
“3인극이긴 한데, 거의 주인공들 이끌어가는 극이라 부인이 나오는 장면이 별로 없거든요.”
“근데 그렇게 열심히 연습하세요?”
“열심히 해야죠! 분량이 별로 없어도 저도 극의 일부잖아요!”
“근데, 분량이 적으면 열심히 해도 알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잖아요.”
“그래도 제가 연습을 해야 상대방도 연기할 때 감정이입이 잘되고, 극도 매끄럽게 흘러가죠.”
“그래도 보통 사람들은 공연을 보고 나면, 주인공만 기억하잖아요. 그러면 들인 노력에 비해 좀 아쉽지 않나요?”
“당연히 아쉽죠!”
도민은 예상치 못한 이웃의 담백한 대답에 놀라 질문을 하였다.
“그럼 왜 하세요?”
“재밌거든요. 배역은 작더라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간접 경험해보고, 반대로 캐릭터가 나랑 비슷한 점이 있다면 그 부분을 극대화해 보는 것도 재밌어요. 이 바닥에서 연기하려면 좋아서 하는 거 아니면 못 버틸걸요?”
도민은 또다시 여자를 처음 만났을 때의 감정을 느꼈다. 낮선 사람에게도 당당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왜 좋아하는지도 명확하게 알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자신과 다른 삶을 사는 사람임을 느꼈다.
“진짜 그냥 재미있어서 배우를 하는 거네요?”
“당연하죠. 재밌는 거 하면서 살기도 바쁜데, 다른 것에 신경 쓸 틈이 어딨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희 즐거운 삶을 위해 짠 한번 하시죠. 짠!"
도민과 여자는 맥주잔을 부딪쳤고, 여자는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마셨다. 도민은 그런 여자를 보며 성격처럼 호쾌하게 술을 마신다 생각하며 조용히 맥주를 들이켰다.
“다 마셨으면 저희 일어날까요? 제가 내일도 연습이 있어서 대본 공부를 좀 해야 하거든요. 아! 시끄럽지는 않을 거니깐,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아직 술이 남아서 좀 더 있다가 갈게요. 오늘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그럼 저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저도 즐거웠어요. 연극 꼭 오세요!”
옆집 여자는 도민을 찾아왔을 때처럼 헤어질 때도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도민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왠지 모를 이질감 느끼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