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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독순 Oct 26. 2024

빈티지가 아닌 빈티지 옷가게(9)

기억의 나열

  길모퉁이로 지나갈 일이 생길 때면 나는 에둘러 크게 돌아갔다. 블랙스타는 밤낮없이 손님들로 북적였다. 인류애를 가지라며 재이가 조언했지만 나는 밥알이 목구멍 뒤로 넘어가질 않았다. 목구멍 뒤로 넘어가질 않던 밥알들은 다시 내 입 밖으로 튀어나와 간장 종지보다 작은 나의 그릇 안에 모조리 담겨 나의 낮은 자존감을 두 눈으로 목도하게 했다. 정말이지 못난 건 나라서 블랙스타를 견제하는 일이 어느 순간 부질없게 여겨졌고 무엇보다 업종이 달랐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블랙스타를 미워하기로 작심해서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미워하다가 어느 한 손님이 “카페에서 추천받고 왔어요”하는 한마디에 금세 기분이 풀려 다시금 나의 낮은 자존감에 화들짝 놀랐다. 드디어 조금씩 밥알이 내 목구멍 뒤로 넘어갔고 매출도 꽤 늘어나 일주일에 한 번 받던 짝도 두 번으로 늘려 강은의 계좌로 송금하는 날 또한 늘어났다.


  예금주 한강은 앞으로 150,000원 송금했습니다, 하고 메시지를 보내면 십분 뒤 예금주 김루리 앞으로 150,000원 입금되었습니다, 하고 매번 복사 붙여넣은 사무적인 답장만이 돌아왔다. 재이의 도움을 받고 매출은 늘었는데 걱정거리가 해소되진 않았다. 대학가인데 원격 수업 탓에 버려진 동네처럼 한적했다. 학생들이 자취방으로 쓰던 빌라들은 텅텅 비었고 술집들은 폐업했다. 하필이면 어느 한 술집이 불이 나는 바람에 좁은 골목 안으로 소방차 몇 대가 비집고 들어와 아수라장이 되었다. 정말이지 엉망이었고, 올라가는 매출이 거품처럼 가라앉을까 노심했다. 그러니까 우리 매장에는 단골이라고 부를 만한 손님이 거의 없었다. 기억력이 좋은 편인데도 한 번 이상 본 얼굴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손에 꼽힌 유일한 손님이 첫 방문자였던 중년 여성이었다.


  중년 여성은 처음 보는 얼굴들 틈에 끼인 채 지난번에 산 옷을 그대로 입고 나타나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돌아갔고 나는 고맙다는 인사 대신 비밀 이벤트를 만들어 할인해 주었다. 그러고 나면 왠지 불안감이 더욱 증식되었다. 어디에서 오는 불안일까, 고심하다 보면 결국 불안이 불안을 야기한 거라 아무런 해결책도 찾을 수 없었다. 불안해하는 나를 불안정하게 보던 재이는 심신안정을 위해 독서를 권했고, 나는 종합 베스트셀러 1위인 나폴레옹 성공 비법에 관한 서적을 샀다. 하지만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을 읽어도 나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고 백열 스탠드 아래로 반사돼 빤질거리는 표지를 한참이고 뚫어지게 응시하고서야 깨달았다. 나폴레옹 시대도 아닌 내가 왜 그의 성공 비법을 배우려는 걸까. 책을 펼쳐 덮자 나폴레옹이 탄 백마의 목도 함께 꺾였다. 나는 강은을 찾아갔다.


  “12년.”


  손가락은 열 개라 강은은 어쩔 수 없이 입으로 숫자를 세었다.


  “요즘 너무 불안해요.”


  한 가지 일을 십 년 넘게 끌고 간 건 놀라운 인내였다. 더군다나 무얼 하나 진득이 매듭짓지 못하며 살아온 나 같은 성격엔 십 년이란 시간은 그저 십년 같은 욕에 불과할 테니까. 거기다 이 년을 더 했으니, 정말 이 년이었다. 이 년아, 너는 왜 이 년도 못할 일을 이 년이나 계약했느냐, 이 년아, 하고 강은의 정수리를 비추는 노란 할로겐전구가 나를 업신여겼다. 반대로 노란 할로겐전구가 내뿜는 빛에 둘러싸인 강은이 책 표지에 그려진 나폴레옹 같아 보였고, 무언가를 정복한 영웅적인 경외감이 순수성으로 피어나 고결해 보였다. 일 년 차엔 귀천이 없더라도 십 년 차가 되면 귀천이 생기겠지. 무려 십이 년 차인 강은에겐 귀천이 생겨 마호가니 의자에 걸터앉아 자신을 감싸던 모든 불안을 덜어내어 나를 불러들였다. 그런데도 나의 불안만큼은 가시지 않았고, 마음속에 머무는 이 불안한 이물들을 강은에게 모두 고하고 나면 조금이나마 풀릴까 싶어 입을 열었다.


  “어떤 손님이 그랬어요. 여기 옷들 방사능 유출된 거 아니냐고. 혹시 후쿠시마산 옷이 아니냐고. 옷에도 후쿠시마산이 있나요?”


  강은은 대꾸하지 않았다.


  “제가 방사능에 피폭이 되면 남자친구도 죽는 건가요?”


  강은은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알아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죠. 근데 왜 불안할까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번아웃 증후군에 관해 들어본 적 있다. 프로이트가 주장한 ‘강박성’과 얼추 비슷한데,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다양한 정신질환은 누구나 한 가지 이상을 두려워한다던 그의 가르침과 유사하다며 철학과를 나오지도 않은 강은이 자신이 이제껏 쌓아놓은 옷더미 안에서 설파했다. 강은은 박식했고, 하지만 현학적이진 않아 나를 이해시켰다.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할 때 신체적ㆍ정신적인 극도의 피로감으로 인해 무기력증, 자기혐오, 직무 거부 등에 빠진다’는 이 정신질환에 관해 설명하며 나를 진단했다. 그래서 내가 번아웃 증후군에 걸린 거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히려 이 일에 정말 몰두하고 있는 건지 되물었다.


  “루리 씨, 이 일이 맞으세요?”


  깊이 생각해 본다.


  나는 나약하고 무언가를 혼자서 해내지 못하고 주변에 기댄 채로 살아간다. 만약 인생 이야기를 써야 한다면 내 인생이 얼마나 하찮은지 열거하기보다 나로 인해 주변인들이 얼마나 돋보이게 살아온 지 양보할 자신은 있다. 가르치는 일보다 가르침 받는 일이 내게는 편하고,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 같은 건 내 인생에 있어 별로 필요치 않다. 최신 화장법을 따라 해 본 적 없고 루리야, 너는 참 예뻐, 같은 본능에 기인한 미적 표현 역시 들어본 기억이 없다. 아마 재이에게서도. 내가 아주 뚱뚱했던 시절로 되돌아가 물만 먹었는데 살이 쪘다고 우긴다면, 물만두를 먹어 살이 쪘을 거라며 빈틈없이 면박을 줬겠지. 번아웃은 몰라도 갓 구워진 ‘번’과 타자를 물 먹이는 투수의 ‘아웃’은 좋아하고 심지어 나의 존재와 같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증후군이란 명사와 용어 역시 좋아한다. 좋아한다와 사랑한다의 차이는 무엇일까. 좋아해, 사랑해, 좋아한다, 사랑한다의 간극. 이제는 좋아하는 마음이 서론이면 사랑하는 마음은 결론이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한때는 좋아하는 마음이 서론이면 사랑하는 마음은 본론이구나, 하고 믿었었다. 그러다가 좋아하고 사랑해서 결국 혼자가 되었을 때, 이별이 본론이구나, 하며 비어버린 내 긴 줄거리에 씁쓸함만 밀어 넣기 급급했다. 타인에게 쏟아내는 관심은 말라버린 혀처럼 처음과 끝에만 머문다. 건조해서 딱딱하고 차가워 미묘하다. 처음과 끝은 언제나 허탈해 불안만을 자라나게 하고, 그 불안이 다 자라났을 땐 설렘이란 착각을 불러일으켜 마음에 균열을 낸다. 이 불안은 오로지 내 안의 불안에서 기인해 해결할 도리가 없다. 아주, 아파서 돌아볼 겨를조차 없다. 생명의 가치가 위대하고도 때때로 절망을 가져다주는 건 하나의 죽음이 하나의 슬픔만을 불러일으키지 않아서겠지. 알아. 아랫배가 몹시 쓰라렸고 눈의 뒤편이 갑자기 매웠다.


  “좋아해요. 이 일.”


  나는 두 손을 꽉 쥐었고, 강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약해도 돼요.”

  “약을 하진 않을 거예요. 감옥 가긴 싫어서.”


  농담을 떨구자 한결 마음이 채워졌다. 그제야 강은의 차림도 눈에 들어왔다. 카프 레더의 엔지니어 부츠를 반절 덮은 윤기가 배인 피콕그린 색감의 치노팬츠, 한때 유행했던 돌체앤가바나의 두툼한 홀 가먼트 니트를 빼입은 강은이 마호가니 의자에 눕다시피 앉아 있었다. 가슴팍엔 밀라노가 영자로 음각된 플레이트가 번쩍였다.


  “이게 루리 씨 매력이에요.”


  로 끝나면 좋았을 일을, 강은은 구태여 이성적인 호감 표시는 절대 아니라며 구구절절 해명했다. 그래서 졸린 걸까. 재이의 10년식 소나타에 올라타면 금세 졸음이 몰려오고, 이제까지 재이는 단 한 번 경적을 울린 적이 없다. 아주, 방어운전. 재이는 단 한 번 나를 예쁘다고 말한 적 없고 반대로 단 한 번 예쁘지 않다고 말한 적도 없다. 그래서 내가 예쁜지 묻기로 결심했고 먼저 강은에게 테스트해보았다.


  “제가 예쁜가요?”

  “매력 있어요.”

  “예쁘단 말이죠?”

  “매력 있단 말이죠.”


  아주, 철벽 방어. 이 점은 정연 선배와 닮았다. 국문학과를 다니며 배운 건 문학 읽기지만 나는 문학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거의 없다. 이경과 내가 가장 좋아한 건 문학 읽지 않기와 어학 읽기였다. 우리 둘은 문학보다 어학이 체질이라 편집자를 꿈꿨고 이미 사양사업에 접어든 출판사로부터 채용 공고가 뜨면 부리나케 지원했는데 매번 칼같이 잘려나갔다. 옹졸한 학점과 사투를 벌여서 이길 만큼 졸렬한 마음가짐을 가져서 사양사업으로 접어든 출판사들이 우리를 거절하자 망하라고 소리쳤고, 교수는 양 볼 가득 독이 오른 나를 교수실에 앉혀두곤 김승옥이 쓴 『무진기행』이나 최인호의 「타인의 방」에 대해 리포트를 써 보라 권했지만 읽는 대신 안개로 자욱한 무진으로 떠나거나 낯익은 방에 갇힌 채로 낯선 것들을 불러내 여류작가라고 지칭하는 낡아빠진 교수들과 맞서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나는 나 스스로 차별하기로 마음먹어서 예쁘다는 형용사만큼은 반드시 내 귀로 듣고 싶고, 예쁘지 않은 사실은 죽도록 인정하기가 싫어서 정연 선배가 남기고 간 그림자 위에 가만히 서서 내가 만들어낸 그림자와 포개어 예쁨을 자문자답해 보았다.


  이경과 나는 먼 과거에 알았을까. 먼 미래에 나는 가게를 열고 너는 꿈 없이 출근하게 될 줄. 둘 다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나쁘지 않아 나쁘다고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결국 나빠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 연약하고 나약하게 여겨져서 나는 이 모든 관념적인 기분을 가장자리로 밀어낸 뒤 강은에게 고맙다는 인사로 대신했다.


  “한 번 돌아보세요.”


  나는 발끝을 세워 발레리나처럼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공중에 뜬 하얀 컨버스의 앞코로 지면을 구르곤 마호가니 의자에 걸터앉은 강은을 내려다보며 손을 펼쳐 흔들었다. 작별 인사. 마호가니 의자에 걸터앉은 강은이 시야에서 조금씩 멀어져 갔다. 돌아온 나는 서랍에 둔 노트를 꺼내 과거를 숫자로 나열해 보았다. 아주, 솔직하지 못하게.


1. 오래됐다
2. 오래돼서 낡았다
3. 오래돼서 낡고 유행이 지났다
4. 오래돼서 낡고 유행이 지나 촌스럽다
5. 오래돼서 낡고 유행이 지나 촌스러운데다 비싸다
6. 오래돼서 낡고 유행이 지나 촌스러운데다 비싸고 냄새가 난다
7. 오래돼서 낡고 유행이 지나 촌스러운데다 비싸고 냄새가 나 세탁해야 한다
8. 오래돼서 낡고 유행이 지나 촌스러운데다 비싸고 냄새가 나 세탁해야 해서 귀찮다
9. 오래돼서 낡고 유행이 지나 촌스러운데다 비싸고 냄새가 나 세탁해야 해서 귀찮아 짜증이 난다
10. 오래돼서 낡고 유행이 지나 촌스러운데다 비싸고 냄새가 나 세탁해야 해서 귀찮고 짜증 나는데 환불도 안 된다
11. 오래돼서 낡고 유행이 지나 촌스러운 데다 비싸고 냄새가 나 세탁해야 해서 귀찮고 짜증 나는데 환불도 안 되고 피부병까지 걸린다
12. 오래돼서 낡고 유행이 지나 촌스러운데다 비싸고 냄새가 나 세탁해야 해서 귀찮고 짜증 나는데 환불도 안 되고 피부병까지 걸려 치료비가 나간다
13. 오래돼서 낡고 유행이 지나 촌스러운데다 비싸고 냄새가 나 세탁해야 해서 귀찮고 짜증 나는데 환불도 안 되고 피부병까지 걸려 치료비에 악령도 씌인다
14. 오래돼서 낡고 유행이 지나 촌스러운데다 비싸고 냄새가 나 세탁해야 해서 귀찮고 짜증 나는데 환불도 안 되고 피부병까지 걸려 치료비에 악령도 씌어 정신이 혼미해진다
15. 오래돼서 낡고 유행이 지나 촌스러운데다 비싸고 냄새가 나 세탁해야 해서 귀찮고 짜증 나는데 환불도 안 되고 피부병까지 걸려 치료비에 악령도 씌어 정신이 혼미해져 취업에 실패한다
16. 오래돼서 낡고 유행이 지나 촌스러운데다 비싸고 냄새가 나 세탁해야 해서 귀찮고 짜증 나는데 환불도 안 되고 피부병까지 걸려 치료비에 악령도 씌어 정신이 혼미해져 취업 실패로 나락으로 간다
17. 오래돼서 낡고 유행이 지나 촌스러운데다 비싸고 냄새가 나 세탁해야 해서 귀찮고 짜증 나는데 환불도 안 되고 피부병까지 걸려 치료비에 악령도 씌어 정신이 혼미해져 취업 실패로 나락으로 가 주식에 손을 댄다
18. 오래돼서 낡고 유행이 지나 촌스러운데다 비싸고 냄새가 나 세탁해야 해서 귀찮고 짜증 나는데 환불도 안 되고 피부병까지 걸려 치료비에 악령도 씌어 정신이 혼미해져 취업 실패로 나락으로 가 주식에 손을 대 또 나락으로 간다
19. 오래돼서 낡고 유행이 지나 촌스러운데다 비싸고 냄새가 나 세탁해야 해서 귀찮고 짜증 나는데 환불도 안 되고 피부병까지 걸려 치료비에 악령도 씌어 정신이 혼미해져 취업 실패로 나락으로 가 주식에 손을 대 또 나락으로 가 비트코인에 손을 댄다
20. 오래돼서 낡고 유행이 지나 촌스러운데다 비싸고 냄새가 나 세탁해야 해서 귀찮고 짜증 나는데 환불도 안 되고 피부병까지 걸려 치료비에 악령도 씌어 정신이 혼미해져 취업 실패로 나락으로 가 주식에 손을 대 또 나락으로 가 비트코인에 손을 대 또다시 나락으로 간다
21. 오래돼서 낡고 유행이 지나 촌스러운데다 비싸고 냄새가 나 세탁해야 해서 귀찮고 짜증 나는데 환불도 안 되고 피부병까지 걸려 치료비에 악령도 씌어 정신이 혼미해져 취업 실패로 나락으로 가 주식에 손을 대 또 나락으로 가 비트코인에 손을 대 또다시 나락으로 가 빈티지 옷가게를 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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