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지가 아닌 빈티지 옷가게(8)

옷가게 이름은 이름

  상호는 ‘네임’이다. 마땅한 상호를 찾지 못하던 내게 이름을 정하지 못하니 이름을 ‘name’으로 짓는 게 어떠냐며 재이가 제안해왔다. 여기 옷들엔 이름이 사라져 없으니 앞으로 네가 이름이 붙여주는 게 어떠냐고. 그런 재주가 있었다. 장난 같은데, 아니 분명 가볍게 시작했는데 종국에는 그럴싸한 이유가 들러붙는 것. 논리가 없는 나와 달리 재이는 논리가 없던 일도 논리를 부여하고, 그게 우리 둘의 관계까지 이어주는 힘이라 믿고 싶었다. 그런데 재이는 모든 일엔 논리를 부여하면서도 우리 둘의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논리를 포기한 듯이 굴었다.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 있을지 모를 어떤 인과 관계를 파헤쳐보기보다 간단히 우연이라 치부했다. 물론 그 우연이 곧 우리 만남의 필연이라며 재차 논리를 펼칠 테지만 나는 조금 더 극적인 게 필요하지 않나 불안했고 어쩌면 어떤 고난이 필요하다고 여긴지도 모른다.

  적어도 우리 둘 사이에 놓인 고난은 몰라도 내 인생에 역경이 시작된 건 확실했다. 나의 창업은, 그러니까 매출만 따져보면 망하는 건 기정사실이라 만약 내가 파산해 지하철 2호선 시청역 2번 출구 16번째 칸 계단에 앉아 노숙하게 된다면 재이가 기꺼이 나를 거둬줄지 상상해 보았다. 포장된 길을 두고 험준한 길을 택한 사람은 자신을 시험해보기보다 자신의 주변인을 시험해보려는 건지 모른다. 나 하나 불살라 주변 사람에게 도덕과 미덕을 일깨워줄 수 있다면, 무료하고 따분한 일상에 최소 일 년 치 안주로 삼을 만한 달고 짠 완벽 조합의 재료를 만들어줄 수 있다면 나쁘지만 않은 결말이 아닐까, 하는 망상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니 결국 이 모든 망상은 매출 하나만 개선되고 나면 말끔히 해결될 일이었다.

  망할 거란 사실을 어떻게 알아낸 건지 대부업체는 하루에도 몇 통씩 스팸 메시지를 보내왔고 ‘힘든 사장님을 유일이 위로할 수 있는 건 금전입니다’라는 문구가 내 현실에 가닿았다. 누가 한 말인지 몰라도 돈으로 행복을 살 순 없다는 건 정말 타당하고 옳은 주장이었다. 행복은 사고팔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 내가 가진 액수만큼 정확히 딸려오는 이자일 뿐이니까. 내 계좌에 매달 환급되는 이자로는 그럴싸한 커피 한 잔 사 먹을 수 없을 노릇이었다. 자, 이게 네 행복의 정량이야, 라고 은행은 숫자란 잔고로 환산해 또렷이 명시해 주었다. 은행에 받을 이자는 없고 줄 이자만 있던 터라 나는 차라리 행복을 돈으로 살 수만 있다면 빚을 내서라도 살 텐데, 행복은 잔고에 딸린 이자라 빚을 질수록 오히려 줄어들어만 갔다.

  11일 510,000원

  12일 20,000원

  13일 10,000원

  14일 5,000원

  15일 0원

  16일 0원

  17일 0원

  18일 0원

  19일 0원

  . 

  . 

  . 

  - (로저비비에의 펌프스) = 184,000원

  개시조차 못 하는 나날이 이어지자 재이는 인플루언서 마케팅을 해 보자고 했다. 인플루언서들이 우리 매장을 방문해 이곳저곳 촬영한 다음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에다 홍보해 준다는 건데 그 광고비가 만만치 않았다. 더군다나 내 자존심도 허락지 않았다. 개업한 지 한 달도 안 된 시점에 백기 들어 투항하고 싶진 않았고 ‘업체에서 제품 또는 서비스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생각을 작성한 글입니다’라는 작은 폰트의 글귀 또한 거슬렸다. 주관적인 생각이라니, 강압적인 생각이겠지. 역시나 인플루언스 마케팅은 아직 아니라고 판단하던 차에 재이가 선뜻 광고비를 지불해 주겠다고 말했다.

  “개업 선물이니까 받아.”

  따지고 보면 요즘 마케팅을 안 하는 가게 또한 드물었다. 모든 장사는 홍보가 중요하니까. 알리려고 노력해야 결국 손님도 알게 되는 거니까. 이건 백기를 든다기보다 적과 맞서기 위한 술수일 뿐이다. 상대가 활을 쏜다고 해서 나까지 조총을 버리고 활을 쏠 필요도 없고 그게 전쟁의 규칙 따윈 아니니까 뭐든지 해봐야 한다. 나는 고심 끝에 재이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마게팅 업체가 보낸 계좌로 돈을 송금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객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총 여덟 명의 인플루언스가 차례로 매장에 방문할 거란 걸 담당자가 친절히 일러주었다.

  첫 번째 인플루언스는 연락을 끊은 지 채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찾아왔다. 랩스커트와 트위드 블루종 차림으로 깨끗한 외양을 가진 여성이었다. 두꺼운 패드 탓인지 움푹 파인 왼쪽 어깨에 걸린 샤넬 체인백이 위태롭게 대롱거렸고 속눈썹을 연장한 깊은 눈매와 밝은 코랄 톤의 색조 화장은 덴탈 마스크를 써도 가려지지 않을 만큼 선명했다. 투명 젤을 바른 손톱은 붉게 드러난 모세혈관을 타고 손끝에 고여 팔을 휘저을 때마다 금지된 영역으로 넘어가듯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도무지 빈티지란 장르에 아무런 관심과 호응이 없어 보였고 실제로 전혀 관심이 없다며 당당하게 자백했다. 제가 남이 있던 건 못 입어요. 글쎄 좀 그렇잖아요, 하고 여자는 고급 에센스를 바른 자신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체인백을 가슴 쪽으로 끌어모아 평온하게 웃어 보였다. 오히려 받아친 내 대답에 평정이 깨진 눈치였다.

  “아, 저도요. 글쎄, 남이 있던 건 좀 별로죠.”

  우리 둘 사이로 잠시간 정적이 흘렀고 서로의 단호한 눈빛을 교환한 뒤 동시에 아하하, 웃으며 환기했다. 여자는 체인백 안에서 은색의 라이카 카메라를 꺼내 매장 곳곳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십여 분만에 모든 작업이 끝이 났고 금일 저녁 자신의 계정에 업로드될 거라며 URL이 새겨진 반투명한 아크릴 명함을 내밀었다. 순간 달콤한 알코올 잔향이 코끝으로 훅 밀려왔는데 명함이 아닌 여자의 손목 위로 뛰는 맥박에 딸려온 향이었다. 저 여유로운 미소. 가난이 선택이 아니듯 부도 선택은 아니라 샤넬 백을 메고 온 여자를 탓하거나 미워할 여지는 없지만 내가 원하지 않은 선택까지 책임져야 하는 건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날도 인플루언스를 제외하곤 손님이 없었고 예정된 시간에 맞춰 여자는 우리 매장을 다룬 광고 후기를 업로드했다. 우리 매장에서 가장 깨끗해 보이는 재킷을 걸쳐 여러 자세로 촬영했던 착용 사진과 포인트가 될 만한 장신구들을 정밀하게 찍은 사진들을 차례로 실었는데, 여자는 내가 몰랐던 역사나 디테일까지 짚어가며 꼼꼼히 소개해주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이 좀 거슬렸다. 여기 길모퉁이에 꽤 괜찮은 카페가 있다는 말.

  이후 며칠 동안 다섯 명의 인플루언스가 차례로 찾았고 대개 비슷하게 후기를 썼고 매번 그 길모퉁이의 카페를 언급했다. 다들 창의력이 부족한 나머지 첫날 샤넬 백을 메고 온 여자가 쓴 후기를 참고했을 테고, 광고비를 십 원 보태지 않고도 그 길모퉁이의 카페가 원 플러스 원으로 묶여 홍보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열불 나게 했다. 그 카페의 이름은 블랙스타였다. 블랙스타.

  빈티지 옷가게 ‘이름name’ 옆 카페 ‘블랙스타’도 참 괜찮네요.

  바로 옆 ‘블랙스타’란 바리스타 카페 꼭 방문 추천.

  ‘이름name’ 방문 후 ‘블랙스타’에서 비엔나커피 마시기.

  심지어 한 인플루언스는 우리 매장보다 블랙스타를 홍보하기로 작심한 듯 보였다. 거기에다 대고 나는 유치하게 주인이 싸가지 없다는 코멘트를 남겼다. 이에 질세라 인플루언스는 친절하던데요? 하며 반박했고, 이 동네 사는데 존나 불친절하거든요? 하며 또다시 내가 코멘트를 남길 동안 차츰 매출은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케팅 이후 우리 가게가 데이트 코스로 분류돼 연인들이 찾았고 그들은 이 동네에 거주하는 사람들 같아 보이지 않았다. 홍보 효과는 꽤 커서 멀리 있는 사람을 이곳까지 불러들여 가게는 조금씩 활기가 돋았다. 레이오버를 떠난 재이에게 고맙다며 밥을 사기로 약속한 나는 재이의 뜻대로 다시 순대곱창전문점으로 향하다가 길모퉁이에서 멈칫했다. 빈자리 하나 없이 손님으로 꽉 찬 블랙스타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오, 하고 뒷걸음을 치며 감탄의 박수를 치는 재이와 달리 나는 골목 바닥에 주저앉았다. 망할, 이런 망할, 하고 고함을 내지르자 놀란 재이가 따라 쪼그려 앉아 내 입을 틀어막았다. 순대곱창전문점에서 순대곱창을 씹으면서도 나는 손님으로 꽉 찬, 가나다라 웃음소리가 그득하던 블랙스타의 풍경만이 어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