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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독순 Oct 26. 2024

빈티지가 아닌 빈티지 옷가게(6)

팔지 않는 것 팔지 않을 것 팔아선 안 될 것

  마트에서 쫓겨난 나는 길거리를 배회하다가 어쩐지 10년식 소나타를 몰고 온 재이와 맞닥뜨려 조수석에 올라탄 뒤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자명종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오전 아홉 시였다. 식은땀이 났다. 커튼 사이로 덜 익은 빛이 내려와 내 발목에 닿았다. 악몽.


  아침 일찍 한 남자가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를 몰고 가게로 왔다. 오래된 오토바이인지 엔진룸에서 달구지 소리가 쇠판을 뚫고 나왔고 거친 인상파의 남자가 안장에서 내려 벨스타프 재킷을 풀어헤치며 들어왔는데 낡았다는 인상보단 거의 외투가 썩어 있었다. 땅속에 묻힌 감자가 부패하면 딱 저런 색감일 것 같았다. 수염은 조니 뎁처럼 매서운데 광대가 한없이 넓적해 결과적으로 프링글스의 미스터 피로 보였다. 매장을 찾은 세 번째 손님이었다. 미스터 피는 자신의 수염을 당겨 매만지며 행어에 진열된 빈티지들을 휙휙 밀쳐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리리riri네.” “왈데스waldes구만.” “탈론talon도 보이네.” 시간이 지나 저 명칭들이 금속성 부자재를 만드는 회사명이란 걸 알게 되었다. 미스터 피는 꼼꼼한 성격이었고 거리낌 없이 질문도 했다. “버튼이 자개인가요?” “몇 년도에 생산된 거죠?” “기자 코튼인가?” “가먼트다잉을 거친 거죠?” “인디고다잉인가?” “싱글 스티치로 마감했네.” 같은 외계에서 온 듯한 문자 공습에 나는 “네?” 말고는 아무런 응대도 하지 못했다. 단념한 미스터 피는 더 묻는 대신 나의 안목을 깔아 내리기 시작했다.


  “이건 쓰레기 구제잖아.”


  나는 두 손을 가지런히 고간에 모아 미스터 피를 응시했다. “쓰레기 구제를 팔면서 빈티지라니.” 혀를 차는 미스터 피의 혀를 뽑아 박제한 뒤 빈티지로 만들고 싶어 대뜸 그게 무슨 차이냐며 쌍심지를 켜고 따져 물었다. 당황한 건 내가 아니라 미스터 피였다. 나의 기세에 눌린 미스터 피는 가게 밖으로 밀려 나갔고 시동을 거는데 세 번이나 실패했다. 나는 팔짱을 낀 채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미스터 피의 모습을 보드랍게 노려봤다. 하루 만에 삼계명을 어긴 것보다 구제라는 미스터 피의 확고한 어투가 더욱 신경 쓰여 곧장 강은에게 찾아가 물어보았다. 강은은 미간을 찌푸리며 긴 시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건 백 년째 풀리지 않는 난제입니다.”


  아니 뭐 대단한 거라고, 이걸 난제라고까지 고백하는 강은의 진지함이 납득가질 않았다.


  “그래서 제가 파는 게 구제예요, 빈티지예요?”


  어서 이실직고해요, 하고 쏘아붙이려던 뒷말은 뺐다. 강은은 독립투사도 아닌데 쉬이 입을 떼질 않았다. 처음에는 내게 구제를 납품한 파렴치한 사기꾼이라 여겼다가 그의 매장을 가득 채운 상품과 내게 납품한 것이 별다를 게 없어 보여 그나마 어지럽게 부유하던 감정이 차츰 가라앉았다. 하지만 고작 세 번째 손님 만에 턱에 걸린 나를 발견하자 내가 얼마나 준비성 없이 창업을 결심했는지 깨달아 당장이라도 예습과 복습을 끝마치고 싶은 욕구가 들끓었고 강은이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빈티지는 시간이 만드는 거예요.”


  그건 나도 알고 있었다. 긴 세월이 빈티지를 만드는 것쯤은. 그런 내 하찮은 추측을 읽어낸 강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뒤이어 말했다.


  “시간이 빈티지를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이 들인 시간만이 빈티지를 만든다는 겁니다.”


  한동안 나는 강은의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빈티지란 사물의 연식으로 결정되는 게 아닌, 그 사물을 알아볼 능력을 지닌 사람만이 결정 내릴 수 있고, 그 능력은 결국 들인 시간만이 알려준다는, 정말이지 경계선이 불분명한 해답.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은 거죠, 하고 철학적인 예시를 강은이 들었는데 고양이는 알아도 슈뢰딩거는 몰라 내게는 아무런 도움조차 되질 않았다. 나는 구제도 빈티지도 모르고, 아니 구제를 영어로 쓴 게 빈티지라고 여겼는데 이 세계관은 그 너머로 미묘하고 복잡했다. 천성이 복잡미묘하지 않은 내가 구제와 빈티지의 간극을 이해할 리 만무했고 강은은 마침내 확고한 어조로 이 모든 건 빈티지라고 주창하기 시작했다. 마치 사이비 교주가 단상 위로 올라가 신도들에게 믿습니까,를 외치듯이 어느새 나는 믿습니다,로 화답했다.


  “누군가는 말하죠. 밴드 문화가 등장한 60년대만이 빈티지라고. 다른 누군가는 록키호러쇼가 방영된 70년대까지라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일본의 거품 낀 경제 호황 시절에 태어난 80년대까지라고. 이제는 90년대도 서른 살은 족히 먹었으니 빈티지라고 우깁니다. 구제는 또 뭐예요. 헌옷수거함에서 굴러온 옷? 재기발랄한 디자이너의 창작품? 존재감 없고 미미한 도메스틱 브랜드? 아무도 찾지 않는 물건?”


  강은은 신들린 듯 독백을 이어갔다. 나는 그의 앞에서 두 손을 모아 공손히 빌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럼 오늘날 빈티지라고 불리게 된 것들은 헌옷수거함에서 굴러다니던 시절이 없었나. 공장에서 막 태어난 시절 또한 없었나. 아무도 찾지 않던 시절 역시 없었나. 도대체 우리에게 시간은 뭐예요. 시간이 가치를 만든 건가요. 가치가 시간을 새긴 건가요. 잘 생각해봐요.”


  강은의 물음은 물음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허공을, 더 정확히는 공간을 채우는 일말의 일깨움이었다. 그 속에서 불쑥 정연 선배가 나타났고 순간 강은과 겹쳐 보였다. 시간이 흘러 나이 든 선배가 오늘날 강은의 모습을 한 채 나타나더라도 이상할 게 없었다. 나의 스물이, 스물이 아닌 채로 지나갔듯 저 헌옷들도 같았겠지. 헌옷이 헌옷으로, 다시 헌옷이 헌옷으로 또다시 헌옷이 헌옷으로 남아 도저히 오래전 누군가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새 옷으로 되돌아갈 순 없겠지. 나는 기억 속에 죽어 있는 공포란 선명한 감정을 안다. 여기 헌옷들 하나하나에 담긴 감정 역시 안다. 각각의 기억은 몰라도 감정이란 건 알아서 헌옷들에 둘러싸인 내가 온갖 사연을 품은 기운에 짓눌려 납작해졌다.


  “옷을 보지 말고 자신을 바로 보세요.”


  강은은 두 손으로 자신의 푸석한 긴 곱슬 머리칼을 콱 집어 묶었다. 강은이 입은 저 빛바랜 코코넛 원단의 파란 코치 재킷을 이전엔 누가 입었을까. 다저 스타디움에서 오십달러를 주고 산 데이빗이 몇 년 동안 걸쳐오다 명문대인 듀크에 입학하자마자 헌옷수거함에 내버린 걸까. 그걸 가난한 흑인 마이클이 주워 입었을지 모를 일이다. 농구 게임에서 진 마이클은 멕시코 출신 이민자 트레호에게 코치 재킷을 뺏기고, 저 코치 재킷을 몇 년 동안 아껴 입던 트레호는 펜팔을 통해 부쩍 친밀해진 백인 여성을 만나기 위해 스톡턴을 찾았다가 그녀의 보이프렌드인 동남아 출신 갱 판반득의 차가운 권총에 맞아 얇은 폴리에스테르 원단에 두 개의 동그란 탄환 자국이 남게 된 건지 모른다. 판반득은 벤제드린과 코카인, 엑스터시나 마리화나를 지하세계에다 몰래 팔아가며 생계를 유지했고 저 구멍 난 코치 재킷을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며 살아갔겠지. 트레호를 잔인하게 죽이고도 당국의 눈을 피해 오랜 시간 잘 버텨왔으니까. 하지만 결국 그도 마약단속국의 권총에 맞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백인 경찰에게 수거된 저 피 묻은 누더기는 노스다코타주 쓰레기매립장에 버려졌다가 공무원의 용돈 벌이로 일본 영토까지 안착했을 거야. 그걸 매입한 나카타는 수완이 부족한 도쿄문화복장 출신의 마이너한 다자이너였고 결국 가게를 쫄딱 말아먹은 뒤 헐값에 국외 유통사에 팔아넘겼을 테고, 그걸 강은이 사입해 입게 되었다는 역사.


  나는 그런 역사와 기억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모를 역사와 기억이 감정이란 단어로 치환되어 왠지 나를 슬프게 했고 헌옷에 둘러싸인 강은의 주장에 완전히 포위되어 항복했다. 그에게서 올리브색 군복을 입고 허공에 혁명적인 눈빛을 쏘던 체 게바라가 얼핏 겹쳐 보였다. 패잔병이 되어 매장으로 돌아온 나는 서랍을 열어 작은 노트를 꺼내 떠오르는 대로 적어 보았다.


칼더의 모빌. 가필드 머그. LIFE 잡지들. 샤넬 no.5. 70s 챔피온 블루 바 풋볼 티셔츠. 나이키 시카고 조던 스니커즈. 나이키 에어포스 스니커즈. 2차 세계대전과 걸프전에 참전한 군인들의 해진 군복. 마호가니 패턴의 카펫. 비트 제너레이션 때 만들어진 민트 컬러의 테이블 램프. 차심 가죽의 라이더재킷. 니먼마커스사에 납품했던 폴로 랄프로렌의 레지멘탈 타이. GILDAN 티셔츠로 찍어낸 록 밴드들의 아트워크. 실크 스크린의 티셔츠들. 하드 패드가 들어간 브룩스브라더스의 스트라이프 블레이저. 성조기가 프린트된 티셔츠들. 제이프레스의 옥스퍼드 셔츠. 제임스 딘이 즐겨 신은 스웨이드 데저트 부츠. 제임스 딘이 쓴 타르트 옵티컬. 90s 컨버스. 80s 컨버스. 벨스타프의 왁스 재킷. 미키마우스가 프린트된 티셔츠들. A2 항공재킷. 아비렉스의 핀업걸 가죽 재킷. 파워 숄더 재킷. 스터럽 팬츠. PVC로 만들어진 젤리 슈즈. 낙하산 바지로 불리던 파라슈트 팬츠. 멤버스 온리의 짚업 재킷. 눈꽃 패턴의 브이넥 니트. 이브 생 로랑의 플레어 팬츠. 비앙카 페레즈의 스타일. 타운 크래프트의 스윙탑, 리바이스 데님 팬츠. 폴로 랄프로렌의 피크트라펠 더블 브레스티드 블레이저. 아르마니의 새틴 블레이저. 마돈나의 랩어라운드 드레스. 베르사체의 실크 블라우스. 디키즈. 칼하트. 게스. 선드레스. 록키 호러쇼. 레이거노믹스를 새긴 티셔츠. 멕시칸 스타일, 미국식 발마칸 코트. 영국식 트렌치 코트, 커프링크스, 레이밴의 보잉 선글라스. BUCO 재킷. 보스 엔지니어 부츠. 섹스피스톨즈의 해괴한 옷들. 스핏파이어. 슈프림 박스 로고. 폴로 스포츠. 스냅백. 웨스턴 셔츠. 컵헤드 스웻셔츠. 인디고 워크재킷. 포켓스퀘어. 로잉 재킷. 아이비 룩. 갭. 턱시도. 리본 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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