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비비에 펌프스
메시지를 보냈다, 나 벌써 개시―첫 판매―했다고. 그 시각 재이는 나리타로 향하는 구름 위였고 비행기모드라 답신이 없었다. 우리 둘 사이에 익숙한 패턴이었다. 재이는 저비용 항공사에 근무했고 최근 들어 NO재팬 운동과 재정난으로 긴축 정책에 들어가며 외국 비행 일정도 레이오버 대신 퀵턴으로 대체되었다. 그래서인지 연일 항공 주가는 하늘 위를 나르는 여객기와 달리 추락하듯 내리꽂았다.
“이러다 회사 망하는 거 아니지?”
걱정은 재이가 아니라 내가 대신했다. 무모하게 창업을 실현한 내가 기본급이라도 챙기며 하와이안처럼 평안히 지내는 재이의 상장 그룹 회사를 걱정한 게 우습지만 많은 저널리스트도 박봉이면서 삼성전자의 밝은 미래를 어둡게 그려보곤 하니까 지나친 참견만은 아닐 거라 합리화했다. 실제로 저비용 항공사들은 매 분기 기록적인 적자 폭을 쌓으며 유상증자를 밥 먹듯이 한 탓에, 아니 내 주식 계좌의 예수금이 연일 밥 먹듯이 줄어든 탓에 빈 밥그릇이 돼 허기진 걱정이 커져만 갔다. 만일 재이의 회사가 망하고 나의 가게도 망하면 우리는 어떻게 망한 인생을 살아갈까. 망한 결혼식에 초대받을 하객들의 눈빛이 어느새 눈초리가 되어 우리에게 회초리질로 내리치진 않을까. 아니 결혼이라도 하면 다행이겠지. 아기를 낳을 바에 아기가 되는 편이 낫겠지. 이상한 생각이 이상한 꼬리를 물고 토해낸 해답은 정말이지 하찮다며 푸념하던 참에
“밥은 먹고 살겠지.”
하고 재이가 노란 할로겐전구가 위에서 아래로 비추는 하와이풍의 파스타식당에 앉아 태연히 낙관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불안이 스파게티 면이 되어 나의 식도 언저리에 찝찝하게 걸렸지만. 더는 이런 걱정거리는 쓸모없으니 저질러놓은 일에 책임을 다하라는 듯 내 귀엔 딱딱하게 들어와 조리하지 않은 스파게티 생면을 씹어내는 것처럼 비위가 상했다. 내가 빈티지 옷가게를 창업할 거라 포고했을 때 우리 엄마, 아빠보다 극성으로 뜯어말렸다, 재이는.
“빈티지 가게를 운영하려면 옷을 잘 입어야 해.”
맞는 말이었고 누군가가 이 옷가게를 굳이 차려야 했다면 그건 전적으로 재이가 되어야 마땅했다. 나란 사람은 살면서 단 한 번 옷에 관해 칭찬을 들어본 일이 없고 어떻게 입어야 잘 입는지조차 몰라 쇼윈도 마네킹에 입혀진 상품들을 그대로 사 입는 타입이었다. 배가 불룩 나오긴 했지만 팔과 다리는 가느다란 편이고 얼굴도 내 믿음과 소망이 깊은 탓인지 자꾸만 작아져 마네킹에 입혀진 옷을 그대로 가져와 걸쳐도 썩 나빠 보이진 않았다. 물론 도도록하게 솟은 아랫배가 늘 시선에 걸렸지만 고도비만이던 어릴 적에 비하면 축복일 따름이라 내 주변으로 사람이 모일 때면 있는 힘껏 배에 힘을 모아 모면했다. 그러면 재이가 표현한 나의 첫인상이 떠올랐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보다 재이의 전위적인 묘사가 늘 현실에 놓인 나를 압도했다. “네 피부는 밝지도 어둡지도 않지만, 태양과는 가까이 머물러 있어야 해서 언제나 서퍼보드를 들고 다녀야 해. 눈, 코, 입이 둥근 게 아닌데 함께 모여 있을 때면 둥글어져. 근데 눈, 코, 입은 언제나 함께 모여 있으니까 둥근 인상인 거지. 후추통을 엎어 엄마한테 혼날까 봐 급히 키친타월로 훔친 듯한 너의 흩어진 주근깨는 인상적이야. 너의 지성은 횃불을 잃어버려 독서를 포기한 자유여신상 같다고나 할까.” 이날의 재이는 십 분이나 더 나란 존재를 두고 주절댔지만 부표를 벗어나야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대천해수욕장의 짙푸른 바닷물 같은 스키니진과 그 뒤로 한참이고 두둥실 떠내려간 튜브 같은 젤리 슈즈와 체리 무늬의 블라우스를 입은 나의 탁월한 감각과 안목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그 바닷물을 안다. 이경과 대천해수욕장으로 떠난 적이 있으니까. 뜨거운 햇볕이 바닷물에 닿자마자 조각나 수면 위로 아슬아슬하게 부유하던 물의 온도와 인파가 뿜어낸 입김으로 데워진 습도. 그 속에서 이경은 귀밑까지 오는 짧은 머리칼을 한 채 파라솔과 파라솔을 건너 다녔다. 파란 파라솔과 파란 머리칼. 파란 바다와 파란 하늘. 파란 튜브를 붙잡고 우리는 넘실대는 하얀 스티로폼 부표를 넘어 등대처럼 우뚝 솟은 채로 물결 위에 단단히 붙어 있던 작은 돌섬까지 떠내려갔다. 돌섬에 다다랐을 때 이경은 내게 힘겹게 말했다.
“너 없는 나는 당근 빠진 볶음밥이야.”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물이 출렁였다. 튜브가 오르내리고를 반복했다. 내가 올라가면 이경은 내려갔다. 곰곰이 생각했다.
“없어도 그만이라는 말이네.”
그날 밤 우리는 투스카니와 아반떼, 스즈키 오토바이를 몰고 온 남자들의 대시를 퇴짜 놓았다. 남자들은 수줍거나 거만하게 다가와 합석 여부를 물으며 나 대신 이경만을 응시했다. 싫어요, 하고 매번 내가 단칼에 거절하면 입술을 잔뜩 오므린 이경이 순간 한니발로 변했다. 나보다 배로 얇은 입술인데 배로 선명해서 배로 눈에 띄었다. 배로 착색된 내 윗입술은 틴트를 아무리 두껍게 덧칠해도 가려지지 않았다. 소주 한 병 정도 마셨을까. 내가 비틀대며 해수욕장 공중화장실에 다다랐을 때 스즈키 오토바이를 몰고 온 남자와 친구로 보이는 양아치들이 그 앞으로 둥글게 모여 담배를 입에 문 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말린 해파리 뒤집어쓰고 온 애 뭔데.”
“해파리?”
“아, 그 까만 애 있잖아.”
“까만 애?”
“무슨 석탄 위에 비닐 봉지 씌워놓은 줄 알았잖아.”
블랙 시폰 원피스 차림의 나는 걸음을 멈춰 서서 내 복장을 훑어봤다. 설마, 내 얘기는 아니겠지, 하고 부정하는데 스즈키 오토바이를 몰고 온 남자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헐레벌떡 도망쳤다. 내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갔고, 스즈키 오토바이와 나만 덩그러니 공중화장실 앞에 남아 있었다. 해파리처럼 독침이라도 쏘았어야 했는데 나는 오줌이 마려운 생리 현상조차 까마득히 잊곤 이경에게 되돌아가 나의 스타일이 어떠냐고 물었다. 이경은 말없이 입술만 잔뜩 오므렸다, 한니발 같이.
“그런 네가 옷가게를 차린다고?”
놀란 건 재이뿐 아니라 이경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속으로 너 때문에 차리게 된 거야, 하고 외치고 싶었고 이 반발심 강한 창업기에 있어 이경도 일정량 지분이 있었다. 우리는 학과 동기들 중 마지막까지 취업 관문을 통과 못 한 유일무이한, 아니 숭고한 백수였는데 이걸 깨버린 게 이경이었다. 지난해 우리는 마지막 공식 채용 공고였던 IT 업종인 D 회사에 같이 지원했고 나만 보기 좋게 떨어졌다. 그러니까 이경은 보기 싫게 붙었다. 나는 마냥 축하도 상욕도 할 수 없어 모든 기분이 낙하하는 표정을 지으며 교과서에서나 배운 도덕을 실천하겠다는 일념으로 꽉 안아주었다. 그리고 내 발끝에 닿은 이경의 에나멜 구두에 눈길이 쏠렸다.
로저비비에 펌프스.
내가 빈티지 옷가게를 차린다며 포고할 때도 이경은 이 로저비비에의 펌프스를 신고 있었다. 절대 아무런 지문도 오염도 허용치 않고 부유하는 먼지마저 피해 갈 것 같은 이경의 발을 감싼 코팅제가 발린 반질거리는 펌프스는 매혹적이었다. 에폭시로 시공된 바닥에 이경이 발을 뗄 때마다 따각, 거리는 마찰음이 행어에 진열된 오래된 옷들 틈새로 날아가 사그라졌다. 마음 같아선 불쌍한 내게 한 켤레만 기증하라며 구걸하고 싶었지만 빈티지 옷가게에서 매일 신고 일하기엔 너무 윤택한 구두였다. 두 번째 손님은 이경이었고, 이 매장에서 가장 비싼 게 무엇이냐며 호기롭게 물어와 나는 삼십만 원을 책정해둔 양가죽 라이더재킷를 오십만 원에 팔았다, 도덕적으로. 의도한 건 아닌데 케어라벨엔 pig라고 써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돌아가는 이경을 문 앞까지 배웅한 뒤 급히 검색창에 ‘로저비비에 펌프스’를 입력해보았다.
729,000원.
중년 여자와 이경이 결제한 금액을 빼보았다. 219,000원. 남은 시간 매출의 목표는 219,000원이 되었으나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고 더는 아무도 가게의 문턱을 넘어오질 않았고 나리타공항에 랜딩한 재이가 축하한다고 보내온 답신에 끝장난 듯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단잠에 들었다가 악몽을 꾸었다. 그러니까 219,000원치 장을 봤다가, 스팸, 포카칩, 카스 여섯 캔, 3분 카레, 다진 마늘, 대파, 용과, 로쉐 마제 소비뇽, 연어 스테이크를 카트에서 꺼내 컨베이어벨트 위로 올려놓았다가 카드 잔액이 모자라 마트 직원들로부터 붙들린 채 쫓겨나는 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