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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Jun 22. 2024

사랑하며 살고 있습니다.

가정폭력 생존자의 절박한 자애

아주 어렸던 시절, 그러니까 유치원생부터 초등학생 시절을 떠올려보면 그다지 불안하거나 불행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는 그 시절 알고 지낸 세상이 그것이 전부였기에 무엇을 내어준 부모였던 사랑 했습니다. 때문에 하염없이 흔들리고 무너져내리는 마음을 알아채지 못한 채 웃으며 지냈습니다.


중학생이 되며 친구들과 다르게 이유 모를 불행이 짙게 덮여있음을 알아갔습니다. 지금도 그 시절이 종종 꿈에 나오곤 합니다. 이성을 잃고 엄마에게 고함을 치던 아빠가 내리친 주먹에 내려앉은 싱크대가 있던 집. 대답을 하지 않고 방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거실에서 달려온 아빠에게 부서질 듯 발길질당한 내방 문.


그럼에도 밖에서 보인 우리의 집은 깔끔했고, 친구들 사이에서 부유하게 사는 사람들로만 보였습니다. 그 시절 잘 알고 지내던 친구를 몇 년 만에 만났고, 잊고 있던 그때의 제 모습을 듣고 한번 더 실감했습니다.

“그 동네에서 잘 사는 집 꽤 있었잖아, 너도 그중 하나고.”


잘 산다는 것. 모르겠습니다. 모든 집안과 화장실이 대리석 벽과 바닥이 있던 집. 샹들리에가 있고 화장실에도 간접 조명이 있던 집. 작은 정원이 꾸며져 있고 그 동네 가장 높은 주상복합의 꼭대기 가까운 층에 사는 사람. 초고속 엘리베이터 3개를 쓴 사람. 공동 현관엔 언제나 클래식 음악, 에어컨 또는 히터가 과하게 나오고 샹들리에와 대리석 장식이 있던 집. 모든 가족 구성원이 수입 차를 가지고 있는 집. 골프가 취향에 맞진 않아 장식으로 쓰이던 골프채들, 안마의자, 취미악기들과 카메라들. 말끔히 관리된 반려견. 이쯤이면 서민치고  ‘잘 산다’ 기준에 부합하는 것일까요.


시간이 흐르며 저는 구겨진 제가 되었습니다. 얼마 살지도 않았는데 잃은 것이 많은 스스로가 안쓰럽던 순간이 많았습니다. 개인적인 ‘잘 산다’ 기준엔 전혀 부합하지 못하던 순간들이었습니다. 당시 우울증 검사를 해보진 못했지만, 확실히 환자였습니다. 방 상태가 현재 심리 상태를 보여준다지요. 제 방은 항상 옷가지와 짐들로 바닥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 발 한발 뗄 때마다 가방이나 옷을 밟아야 했습니다. 책상에도 전공 재료와 책들이 쌓여있었습니다. 당시 제 방을 보면 헌 옷수거함 수십 개를 털어 한 군데 산을 만들어 둔 모양이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그런 와중 찾는 물건은 귀신같이 잘 찾아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하루아침 작정하고 어지른 것이 아닌, 종유석이 찬찬히 자라나듯 시간이 쌓이며 켜켜이 굳어진 물건들이란 뜻이겠습니다.


머리숱이 굉장히 많아 얇은 머리끈은 쉽게 끊어트리기 일쑤였지만, 10대 후반부터 스트레스성 탈모가 왔습니다. 여러 피부과를 전전하며 탈모 치료를 받고 약도 먹었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이 나이대에 이 정도 치료면 완치될 텐데, 차도가 없는 절 보며 원장님들은 고민에 빠지셨습니다.


대학생 시절에도 무력하고 우울한 삶에 큰 변화는 없었습니다. 자립력이 없어 엄마에게 집착했습니다. 학교까지 왕복 5시간이 걸려 기숙사 입사를 했지만, 엄마를 보지 못하면 우울에 잠식되어 매일 외박신청을 하고 집에서 통학했습니다. 겨우 한 살 차이가 났던 당시 애인에겐 부모로부터 충족되지 못한 성숙한 사랑을 기대했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엄마 또는 애인을 보러 뛰쳐나갔기에 교우 관계도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사랑을 바라던 제게 알맞은 양의 사랑이라도 이뤄냈더라면 좋았겠지만, 삐뚤어진 기준엔 미성숙할 수밖에 없는 당시 풋사랑에 상처받곤 했습니다. 그럴수록 방엔 쌓여가는 물건이 늘었습니다. 어느새 침대 위까지 물건이 가득 쌓였고, 암막 커튼을 쳐 어두 컴컴한 방에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르도록 누워 지냈습니다. 밤과 낮은 바뀌었고, 우울증은 심해졌습니다. 미술학원 파트강사 출근 할 때 외엔 집 밖에 일절 나가지 않았습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방 밖에 나오지 않던 어느 날, 엄마와 함께 아빠 회사를 방문하게 됐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 대략 5살쯤 방문한 뒤 처음 마주한 아빠의 일터였습니다. 누렇게 변색된 옛날 에어컨, 색 바랜 아빠의 이름표. 가득 찬 서류들로 비좁은 책상.


침대 귀퉁이에 가만히 누워 하루를 내다 버리는 날 대신해 매일 새벽 집과 직장을 드나들며, 이곳에서 생활비를 벌어다 주었을 아빠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내 시간을 아빠에게 주고 싶었습니다. 아빠는 제게 구겨진 사랑을 준 것은 분명했습니다만, 자신이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내어준 것이었음을 직시한 순간이었습니다. 아빠의 구겨진 사랑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고 눈물을 삼켜야 했습니다.


이때의 기억은 결국 아빠도 부모에게 받는 것이 그뿐이었기에. 당신이 가진 사랑 중 가장 좋은 것을 고르고 골라내어 준 것이 모난 사랑이었음을 알아가는 첫걸음이 되었습니다. 독립한 지금은 이러한 사랑을 깨닫고 아빠를 사랑할 수 있게 됐습니다. 아빠를 귀엽게 볼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아빠를 위하고 걱정하며, 사랑한다는 편지를 씁니다. 머리숱도 다시 풍성해졌고, 집 상태도 깔끔하게 유지합니다.

며칠 전 오래간만에 아빠 차를 탔습니다. 항상 네 식구가 함께 타던 차였는데, 그 시절과는 사뭇 느낌이 달랐습니다. 더 이상 엄마와 동생도 아빠의 차를 타지 않는다고 합니다.

“둘 다 자기 차 타고 다니지, 이젠 같이 차 탈 시간도 없고.”

 엄마와 동생, 내 자리엔 아빠 혼자 바다낚시를 다닐 때 사용하는 장비와 옷가지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내 자리였던 그 자리. 익숙한 의자 폭. 형태가 바뀌어도 이어지는 것이 가족이란 것을 한번 더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날 본가에서 잠을 잤고, 여전히 아빠는 새벽같이 직장 출근을 했습니다. 자고 있던 제 발과 종아리를 마사지해 준 뒤예요. 까맣게 잊고 있던 시원함이었습니다. 십 년 정도만에 투박하지만 애정 어린 손길에 마음이 아려왔습니다. 실은 아빠가 차라리 정말 나쁜 사람이기만을 바란 적도 있습니다. 마음 편히 미워만 하고 싶은데, 마음 어딘가에선 아빠가 날 사랑하는 것을 알고 있었거든요. 때문에 양육자로서 부족한 아빠이지만, 결국 품어내었습니다. 시간이 굉장히 많이 걸렸지만요.     


고함치고 폭력을 가한 당신에게서 도망치듯 집을 나서야만 했던 시절을 넘어, 사랑을 얘기할 수 있는 네 사람이 되었음에 감사합니다.  결국 당신도 날 사랑했다는 것을. 지금도, 앞으로도 사랑은 이어질 것이란 것을 알게 된 지 3년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저는 세 살입니다. 정말이지 사는 재미가 있습니다. 이제야 살아가는 것 같아요. 앞으로 무슨 인생을 쌓아갈지 기대됩니다, 우리 가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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