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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가람 Feb 04. 2024

아빠에게 보낸 편지

가정폭력 생존자의 절박한 자애

안녕 아빠? 아빠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아실까요. 가슴이 뭉클합니다. 기분 좋은 긴장감입니다. 이 순간을 맞이하고자 얼마만큼의 긴 걸음을 이어왔는지 생경하기도 합니다.


가슴 벅찬 만큼 다시 한번 불러보고 싶어요. 아빠 안녕? 글에선 너무나 쉽게 다음 문장으로 이어지지만, 실은 다음 구절을 떼어내기까지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어요. 몇 날 며칠, 몇 달이 아닌. 몇 년이 꼬박 걸렸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어린 시절 이후론 쓰지 않던 편지까지 썼는지 궁금하실 테지요. 서툰 제 마음을 고백하고 싶어 이렇게 늦은 시각 펜을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본가에 가 아빠를 보고 왔어요. 지금은 제 집에 와있습니다. 샤워를 하고 편안히 TV를 시청하는데, 평소보다 조금 더 행복하고 들뜬 스스로를 발견했습니다. 왜 이렇게 행복하지? 기분이 좋지? 생각에 빠졌습니다. 조금 전 본가에서 아빠가 제게 하루 더 자고 가라며 아쉬워하셨던 모습이 떠올라 잔잔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동시에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이런 기분 처음이 아닌 것 같다고요. 기억을 되짚어보았습니다. 언제 또 이런 이유 모를 행복감에 젖었는지. 크게 오래된 기억은 아니었습니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였습니다. 가족들과 따뜻한 시간을 보낸 연말이 정말 행복했습니다. 동생과 제가 쿠키를 만들던 것 기억하실까요? 그 모습을 지켜보시던 아빠는 함께 쿠키를 만들고 싶어 하셨어요. 언제나 크리스마스 때 쿠키를 구워왔던 동안 처음으로요. 반가운 마음에 곧바로 자리를 만들어드렸고, 아빤 퇴근하고 오신 뒤라 피곤하셨음에도 열심히 쿠키에 초코펜으로 장식을 하셨지요. 처음으로 아빠가 정말 귀여워 보였습니다. 예뻤습니다. 아무 말 없이 아빠를 바라볼수록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그 모습을 간직하고 싶어 영상 촬영을 했고, 오랜만에 아빠의 모습을 세세히 마주하게 됐습니다. 어느샌가 생겨난 광대 주변의 잡티, 조금 더 가벼워진 머리숱, 인상 좋게 자리 잡힌 눈가 주름. 행복한 동시에 어딘가 뭉클하며 아련했습니다. 내가 기다려 온 순간이 바로 지금임을 직감했습니다. 평온히 감정을 나누고 웃고 언젠가는 서운해 토라지기도 하지만 이내 잔잔히 화해할 수 있는 분위기. 독립을 하고 난 뒤 이제야야 이뤄냈구나 싶어 아쉽기도 했지만, 독립과 그간의 노력들이 쌓여 결국 이뤄낸 것임을 알기에 감동스러웠어요. 그러니까, 이제야 가 아닌 드디어가 맞겠지요.


아빠의 마음을 안아드리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이미 피곤하셨을 시간인데 아빠는 "스키장 갈래?"라며 온 가족을 데리고 즉흥 드라이브를 꾸리셨지요. 스키장에서도 지갑 속 5만 원을 집어 들으시곤 가족들에겐 방금 땅에서 주웠다며 "야 빨리 가자, 나 돈 주웠어!"라 말씀하셨지요. 덕분에 다들 신이 나서 달렸습니다. 나중에 고백하시길 즐거운 이벤트를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에 마련한 시간들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언제나 가족들의 즐거움을 누구보다 앞서 챙기시는 그 마음이요. 과연 제가 느낀 아빠의 책임감, 사랑이 전부는 아니겠지요. 언제나 한 발짝 앞선 아빠를 뒤 따라갈 뿐임을 알았을 때 조금 슬프고 많이 감사했습니다.


잠시 옛이야기를 꺼내보자면, 어린 시절 평온하지만은 않았던 순간은 분명 존재했지요. 가족들이 나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이 들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정말 내가 모든 문제의 원인이구나. 나 하나 없어지면 화목한 가정일까, 내가 빨리 독립하면 이들은 행복할까 스스로를 갉아먹던 시간도 길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자존감과도 직결되어 직장생활과 대인관계에도 어려움이 발생했습니다. 어느 순간 혼자 카페에 가면 어떤 메뉴를 주문해야 할지조차 정하지 못하는 수준이 됐고, 메뉴판 사진을 엄마에게 보내 무슨 메뉴를 먹을지 정해달라고 한 적이 생겼습니다. 그때가 되어서야 문제가 있음을 알았고 퇴사를 한 뒤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가졌습니다. 심리상담도 받고, 꾸준한 운동, 책 읽기, 글쓰기, 사람들 만나기 등 해보지 않았던 활동을 해봤어요. 그렇게 시간을 쌓았더니 지금의 제가 되었습니다.


아빠, 저 이전보다 꽤나 밝고 단단한 사람이 된 것이 느껴지시나요? 뿌리 깊은 나무가 더욱 크게 자라는 것이 맞았습니다. 전 누구보다 단단한 내면을 가지게 됐어요. 한없이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진심을 나누며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됐습니다. 그리고 이젠 아빠가 제게 하셨던 말들과 행동의 뿌리는 결국 사랑이었음을 알아요. 그것을 알고선 너무나 안타깝고 슬펐어요. 지금 깨달은 것들을 모두 안고, 아빠와 처음 만난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어요. 동생이 한없이 애교쟁이로 자랄 때 부러웠거든요. 나도 저렇게 사랑받고 응석 부리며 따뜻하게 살아가고 싶다고. 사실 이미 사랑을 받고 있었는데, 지나친 시간들이 길었어요. 하지만 그러한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음을 알아요.


덕분에 이전 내향적이고 소심했던 성격과 달리, 사람을 마음껏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됐어요. 할머니께서 "다솜이가 결혼하더니 어쩜 저리도 귀여워지고 밝아졌냐. 왈가닥이 좋다잉~"이라 말씀하셨던 것도 이런 이유였겠지요. 오늘 다녀온 결혼식도 아는 지인 없이 혼자 참석했는데, 모르는 사람 다섯 명이랑 얘기하고 놀다 왔습니다. 새로 근무를 하게 된 직장에서도 굉장히 외향적이란 말을 들어요. 이런 제가 정말이지 고맙고, 사랑한답니다. 이렇게 훌륭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고 아직도 많이 서툴지만 사랑해요 아빠.


아빠. 요즘 전 다음 과제를 받은 것 같아요. 가족 간 사랑을 깊게 깨달았으니, 이제 다양한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볼 단계가 되었어요. 사랑이 무엇일까요?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얼굴로 하품을 해도 사랑스러워 보이면 사랑일까요. 밥을 먹다 이에 음식물이 끼어도, 그것을 모른 채 하루종일 함박웃음을 짓고 다니는 얼굴이 예뻐 보이면 사랑일까요. 아침에 머리가 제멋대로 뻗친 채 배를 긁으며 침대에 앉아있는 모습이 귀엽기만 하면 사랑일까요. 아직 나이가 많다기엔 미지근한 나이이지만, 쌓아온 순간들이 꽤 두터워졌다고 생각하는 지금도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백발노인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소년처럼 수줍게 웃으며"나는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겠어"라 말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지요. 쉽게 알기 어려운 것이 사랑이 맞겠습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평생 사랑에 대해 깨닫지 못할 수도 있겠고요. 아빠를 사랑하는 마음을 깨달은 저 이기에, 어떠한 형태의 사랑 또한 결국 알아갈 것임을 확신합니다. 그 길이 평탄하지만 않을지 몰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제 곁엔 언제나 절 아껴주는 든든한 제 편이 있음을 이젠 알거든요.


이전보단 한참 컸다며 어른스럽게 사랑고백을 하려 시작한 편지인데, 어느새 고민을 털어놓는 첫째 딸이 되었네요. 언제나 친구처럼 함께 늙어가는 딸이기도 합니다. 인생살이 본질이 무탄 하고 윤택하여 언제나 행복할 순 없고 가끔은 불행하더라도, 스스로가 무너지지 않도록 돌보는 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임을 알거든요. 그 길 이제 함께 걸어요. 수 없이 틀리고, 웃고 울고, 달리고 넘어지며. 다시 일어나 함께 걸어요. 아무리 넘어져도 손 잡아 줄 가족이 있음을 아는 것만으로도 더욱 탁월하게 용감해질 수 있으니까요.


너무 늦은 시각에 편지를 보내네요. 아빠는 평온한 꿈을 꾸고 계시면 좋겠습니다.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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