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당신에게
안녕하셨어요. 오랜만에 편지해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저는 어쩌면 이상을 좇던 삶에 조금 더 현실적 방안을 그려낸 시간을 쌓았어요. 다시 직장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준비 중이었어요. 조만간 일을 시작할 것 같고요. 아, 이상을 접었다는 말은 아니에요. 구체화할 현실적 절차를 밟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가족들과 따듯한 연말을 보내고 있습니다.
참 신기한 경험을 했어요. 제가 가정폭력생존자임을 말씀드렸지요? 때문에 보통 본가에 가면 아빠와 관계가 매끄럽지 못했어요. 이번엔 큰 변화가 있었어요. 아빠가 처음으로 귀엽게 느껴졌어요. 매년 크리스마스엔 동생과 함께 쿠키를 구웠거든요. 명절에 전 부치는 것 마냥. 이번 크리스마스이브에도 동생과 쿠키를 구웠어요. 오븐에서 나온 쿠키에 초코펜으로 그림을 그렸어요. 그것을 지나가던 아빠가 굉장히 하고 싶어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시는 거예요.
"(아빠 이름)ㅇㅇ이 초코펜 할래~? 하고 싶어~? “
물었더니, 거절할 줄 알았던 아빠는 그대로 초코펜을 빤히 바라보고 계셨어요. 자리를 만들어 드리고 초코펜을 손에 쥐여드렸더니 정말 열심히 하시는 것 있죠. 그 모습을 보는데 자꾸만 미소가 지어지는 거예요. 아빠를 사랑하는구나 느껴지면서. 마음이 따듯했고 어딘가 슬펐어요. 그토록 바란 모습이 이런 것 들이었는데. 편안히 감정을 나누고 웃고 언젠가는 서운해 토라지기도 하는, 윽박과 폭력 없는 가족이요. 독립을 하고 난 뒤 이제야 이뤄냈구나 싶어 서글프기도 했지만, 독립과 여태까지 고군분투 한 세월이 있었기에 드디어 이뤄냈음을 알아 감동스러웠어요. 이제야 가 아니라 드디어요.
아빠의 모습에 자꾸만 미소가 지어져 영상을 촬영했어요. 촬영을 하며 아주 오랜만에 아빠의 얼굴을 자세히 봤어요. 어느새 생긴 옆 광대 쪽 검버섯, 조금 더 가벼워진 머리숱에 마음 한구석이 시렸어요. 이제야 실감했어요. 엄마에게 서운한 동시에 마음 깊이 사랑하듯, 아빠도 불편한 동시에 깊게 사랑하고 있었음을요. 어떠한 모양으로라도 그들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나니 마음 한편이 온전하고 따듯했어요.
다른 일화도 들려드리고 싶어요. 며칠 전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가 최근 멀어진 사람에 대한 얘기가 나왔어요. 잊고 있던 잔잔한 그리움에 잠겨 그 사람을 생각했어요. 멀어진 이유가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었거든요. 저는 이제 그 사람과 이전처럼 잘 지낼 수 있을 상태였어요. 때문에 우리가 다시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sns 메시지를 보내고 반나절동안 답장을 기다렸어요. 저녁이 될 때까지 답이 없어 확인해 보니 그 친구는 절 차단했더라고요. 오전까진 차단을 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아마 그 친구는 우리의 관계가 저보다 많이 힘들었나 봐요. 아쉬웠고, 어떠한 답도 없이 회피해 버린 그 친구가 밉기도 했어요.
진심은 언젠가는 통한다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 하는 편입니다. 다만, 그런 시가 있잖아요. '화성에서도 사랑하는 여전히 사랑해 인지.'라는 구절이요. 내 진심이 어쩌면 상대방에겐 전혀 와닿지 않을 수 있고, 어쩌면 폭력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번에 한번 더 경험한 것이기도 하고요. 때문에 '우리가 통할 사람이라면' 진심은 언젠가는 통한다고 생각해요. 최선을 다 해 마음을 표현하되 언제라도 헤어질 수 있는 것이 사람이라고. 슬프기도 한데, 현실이더군요. 이럴 땐 제 진심을 접는 것이 예의구나 한번 더 느꼈어요.
아직 많은 세월을 살아왔다고 말하긴 어려운 미지근한 나이이지만, 수많은 이별을 마주할 만큼의 삶은 쌓아왔다고 생각해요. 아직도, 아니 어쩌면 이별은 언제나 서툴 것 같아요. 이별에 유능해야 어른이 될 것 같은데 말이에요. 아무래도 전 아직 어른이 아닌 것 같아요. 어쩌면 이별에 유능한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아픔을 부정하는 힘이 길러지는 것이라면 모를까. 제가 고작 될 수 있는 어른은 이별에 익숙해진 어른 정도 일 것 같아요. 익숙해지는 것 또한 유능하다는 것이 아니겠지요.
서툰 사랑을 고백하느라 편지가 길어졌네요. 이만 줄일게요. 편안한 밤 되시길 바라요.
ps. 당신은 사랑을 하고 계신가요? 어떠한 형태의 사랑이라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