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쓰지 않고는 살 수 없어서
반달아 안녕? 단 한 번도 불려본 적 없는 호칭으로 불러도 금세 뒤돌아 날 향해 웃어줄 것을 알아. 네 눈웃음을 상상해 봤는데, 반달을 닮았으니 반달이라 부를래.
반달아, 그거 알지. 나 영화는 좋아하는데,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딱히 없잖아. 사람들이랑 얘기할 때 인생 영화가 무엇인지 묻는 경우가 많아서 취향도 아닌 로맨스 영화 하나를 인생영화로 골라 대답하곤 했어.
네 말로는 진정한 영화꾼들은 똑같은 영화를 몇 번이고 본다던데, 내 인생 2번 이상 본 영화는 겨울왕국뿐이었어. 그것도 아주 지루해하며. 어쩌면 난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걸까?
그럼에도 영화처럼 수 없이 되돌려 보고 싶은 기억은 있어. 너와 함께한 시간을 필름 늘어질 때까지 돌려보고 싶다. 한평생 잊지 않고 모든 순간들을 돌려보고 싶어. 넌 내게 잊지 못할 기적이니까.
아무리 안 맞는 부분이 많아 괴로워도 두 눈 마주치면 사랑할 수밖에 없었어. 진심이야. 널 사랑하지 않는 방법을 아직도 모르겠어. 참 이상하지 않아? 사랑이 뭔지도 모르겠는 두 사람이 만나선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게. 우린 서로 사랑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또 사랑 같기도 했어.
우린 정말 안 맞기만 했던 걸까? 최선을 다 했는데 왜 서로에게 억울한 마음이 생기고 불편해졌을까.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이 편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과한 노력을 한 것이 문제였을까. 우리가 조금 덜 사랑했다면 어땠을까. 친구로 지냈더라면 어땠을까. 우린 친구는 될 수 있었을까? 궁금해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면 궁금해하지 않는 편인데, 대답 없는 네 앞에 끝없는 물음표를 꺼내둬. 나도 알아. 이만 물음표는 거둬야 한다는 것을. 내게서 우린 가장 미련하다면 미련하고 순수했다면 순수한 미제가 될 거야.
사람은 얼굴이 아닌 사건으로 기억된대. 이 말을 듣자마자 그럼 널 떠올리면 언제나 사랑이 떠오르겠구나 싶었어. 너는 어때? 난 네게 어떤 사건이었을까. 나 이 세상 떠날 적엔 널 떠올릴 텐데, 넌 누굴 떠올릴까.
내 집엔 네가 옷을 앗아간 옷걸이만이 흔들리고 있어. 저 진자운동도 멎으면 네 흔적은 영영 사라지겠지. 난 이 시점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바닥에 떨어져 있는 네 머리카락. 한때 청소해야 할 존재에 지나지 않았어. 앞으로 더 이상 생겨나지 않을 존재로 만나니 애잔하다.
어젯밤엔 너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었어. 너무나 작은 두상에 가녀린 머리카락. 한껏 좁고 여린 어깨. 언젠가 이 어깨에 매달리고 기대 의지한 순간이 스쳤어. 그때 참 따뜻했는데.
언제나 좋은 향이 났어.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향이. 정확히는, 함께한 모든 순간을 기록하고 싶었어. 네가 떠나갈 것을 알고 있었거든. 네가 떠나도 이미 다 본 영화를 반복 재생하듯 영원히 네 기억과 살아가고 싶었어. 지금도 그래. 너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얘길 했었잖아. 이젠 내 삶 중 네가 등장하는 부분만 수 없이 돌려보며 살아갈 거야.
난 진정한 영화꾼이 맞고, 내 인생영화는 너야.
에필로그: 네가 떠나간 오늘은 비가 왔어. 비 냄새를 맡으면 네 생각날까, 널 떠올리면 비 냄새 생각날까. 넌 내게서 어떤 기억을 만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