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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Jul 23. 2022

삶03 혼주(婚主)의 품격

생각을 담은 그릇

2012년 말, 단골 칼국수 집

토요일이라 오전 내내 빈둥거리다 아내와 점심 먹고 영화라도 한 편 볼 요량으로 온천시장에 있는 단골 칼국숫집에 들어가 주문을 해 놓고 있는데 맞은편 테이블에서 식사하고 있던 커플 중 남자가 왠지 낯익어 보였다.

그도 그걸 느꼈는지 힐끗힐끗 쳐다보다 일어나 다가와서는 “한 교수 아닌교?” 한다.

그 순간 나도 생각이 났다.


그는 나와 학교 동문이었지만 재학 중에는 서로 모르는 사이로 지냈고, 의사가 된 후 같은 병원에서 근무한 적은 있었지만 서로 전공 과도 다른 데다 나는 교수, 그는 전공의 신분이라 접촉할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가 동문회 모임에 나가 그가 내 동기인 사실을 알았다.


비록 개인적인 접촉은 없었다 하더라도 서로 학교 동문에다 몇 년이나마 같은 병원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동료라 서로 반갑게 인사하고 아내들도 소개했다.


내가 먼저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그 테이블 것까지 함께 계산했더니 입이 싼(?) 음식점 주인이 그 친구에게 당장 고해바치는 바람에 부부가 밥 먹다 말고 일어나 따라 나오면서 감사의 인사와 함께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녀들은 아직 결혼 안 했나? 고지서 한 번도 안 오데? 하게 되면 꼭 연락해라."


  그로부터 약 2주 후    
 

퇴근하고 집에 왔더니 아내가 무언가를 내미는데 척 보니 청첩장이었다.     

"오늘, 등기가 왔다 해서 경비실에 내려갔더니 경비원 아저씨가 이걸 건네주면서 ‘내 나고 청첩장 등기로 보내는 사람 처음 보네요’ 합디다." 하면서 킬킬거린다.


평소, 우리 부부는 자녀 결혼 청첩장을 보낼 때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워놓고 있었다.


우리와 가까운 사이로서  청첩을 했을 때 진정으로 축하해 줄 수 있는  사람  

우리 아이들을 한 번이라도 본 적 있는 사람 

⓷ 우리가 상대의 자녀 결혼식에 참석한 적 있는 사람

     

그런데, 청첩장을 보낸 이 동기와는 친한 사이도 아니고, 그저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데다 그 자녀의 얼굴 한번 본 적도 없다. 그러니 앞으로 내가 그에게 청첩장 보낼 일도 없고 그 집 혼사에 참석할 의무도 없다.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나는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면서 고민하다가 일단 장모님과 어머니 장례식 조문객 명단을 찾아보고 한 번이라도 왔으면 가기로 하고 그 명부를 뒤져봤지만 그의 이름은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가지 않았다.


그로부터 약 한 달 후

그날도 토요일이라 점심 먹고 영화 한 편 보려고 이번에는 그 칼국숫집 옆에 있는 국숫집에서 국수를 먹고 있는데 그 부부가 들어오는 게 아닌가! 순간 참 입장 난처하게 되었다.


그 친구가 병원을 떠난 지 25년 동안 우리는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데, 이 두어 달 사이에 두 번이나 우연히 만나다니! 우째 이런 일이?#@@


이번에도 우리가 먼저 먹고 나오면서 계산대 앞에 서니 그 친구가 쫓아 나와 우리 것까지 계산한다.

나는 결혼식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인사만 하고 돌아서는데 뭔가 뒤통수가 뜨뜻한 기분이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다음 해 2월 23일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아래 그림과 같이 문자가 왔다.

00 학교 동기회 총무가 보낸 것이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한 마디 써 보냈다.             


그러곤 총무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했다. 뭐 이런 걸 다 공용문자로 보내냐고.

그랬더니 총무라는 사람 하는 말인즉슨, 하도 부탁을 해서 안 들어줄 수 없었단다.


총무의 입장도 참 딱했지만, 이렇게 되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다음부터는 자녀 혼사만 치르면 너도 나도 문자 부탁하고 이젠 아예  

결혼식 공고 문자는 일상화되어 버렸다. 


그 뻔뻔한 계좌번호와 함께.


2022년 7월 19일

이번에도 00 학교 동기 총무로부터 다음과 같은 문자가 왔다.

이미 지나간 동기 자녀 결혼식 광고 문자다.     


[Web 발신]

지난 0월 00일 00 호텔에서 00 아들 결혼식 지금 전달하니 양지 바랍니다*

00 은행 공뻔 123-123-1234567     


혼주가 형편이 어려운 사람도 아니다. 그는 명색이 의사다.

그런데도 이런 걸 보냈다니. 참 기도 안 찼다.     

 

        청첩(請牒)과 부고(訃告)의 차이     


* 혼인 잔치는 산 자가 산자를 위해 예정된 날 계획에 따라 치르는 예식이지만, 장례식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갑자기 치러지는 죽은 자를 위한 예식이다.


* 청첩(請牒)이란 청할 (청)에 편지 (첩), 즉 초청하는 편지를 가리키는 것이고, 부고(訃告)는 부고 (부)에 알릴 (고)를 써서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것을 말한다.


* 청첩(請牒)은 말 그대로 청(請)하는 것이고, 부고(訃告)는 말 그대로 고(告)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정된 결혼식은 주가 대상을 엄선해서 정중히 예를 갖추어 청첩장으로 초대해야 하고    

장촐지간(倉卒之間)에 당하는 장례식의 부고는 상주나 대리인이나 누구나 간에 아는 대로 널리 알리는 것이 마땅하다.


* 혼주(婚主)에게는 초청받지 않은 사람 막을 권한이 있지만, 상주(喪主)에게는 조문객을 막을 권한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망자가 유언으로 못 아놓지 않은 이상 죽은 자의 뜻을 산 자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원수가 온다 할지라도 조문 오는 사람 막을 권리가 산 자에게는 없다.


     나의 생각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이 시급히 고쳐야 할 잘못된 관행 중 그 첫 번째가 결혼식 문화라 생각한다.


청첩은 제한된 사람에게 예를 다한 편지를 보내 초대해야 마땅하거늘 요즈음은 아는 이름만큼 청첩장을 뿌려댄다.

청첩장이 무슨 식당개업 찌라시라도 되는 듯이..


그건 그나마 양반 축에 속한다.

이젠 아예 청첩장 대신 동문회나 모임의 총무가 문자로 공고를 내도록 부탁하고, 그것도 모자라 계좌번호까지 달아놓는다.

청첩장이 무슨 납입고지서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잔치에 초대했으면 초대한 손님 앉을자리는 당연히 마련해 놓아야 한다.

그런데 거의 모든 결혼식에서 30분 정도 일찍 가지 않으면 식장에 앉을자리가 없다.

그래 놓고선 식권 한 장 줘서 바로 식당으로 내몬다.

예식에 참석하든 말든 돈이나 내놓고 밥이나 한술 뜨고 가라는 말이다.

하객이 무슨 상갓집 개도 아니고….


식사를 대접하는 건 그나마 나은 편이다.

잔치에 초대하면서 식사 대접조차 하기 싫어 밥시간대 피해서 예식 올리고,

답례품 마련하기도 귀찮아 답례품 대신 돈 봉투 하나 내놓는다.

결혼식이 무슨 돈 놓고 는 투전판도 아니고….     


공자는 춘추전국 시절, 도덕 정치를 설파하며 온 천하를 주유하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고,

죽을 때는 자신의 이상향인 동방의  한 나라를 그리다 죽었다.     

그리고 그의 7대 손인 공빈(孔斌)은 우리나라를 가리켜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 칭하며

동이열전(東夷列傳)에 우리나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동이는 그 나라가 비록 크지만 남의 나라를 업신여기지 않았고

그 나라의 군대는 비록 강했지만 다른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

풍속이 순박하고 후덕해서 길을 가는 이들이 서로 양보하고

음식을 먹는 이들이 먹는 것을 서로 양보하며

남자와 여자가 따로 거처해 함부로 섞이지 않으니

가히 '동방예의지군자국(東方禮儀之君子國)'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은나라 기자(箕子)가 주나라 신하가 되지 않고 동이땅(단군조선)으로 갔고

나의 할아버지 공자(孔子)께서는 동이에 가서 살고 싶어 하셨다.

나의 벗 노중련도 동이로 가고 싶어 하고

나도 역시 동이에 가서 살고 싶다.”     


이렇게 위대한 조상님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의 후예답게 최소한의 품격이라도 갖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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