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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Apr 24. 2022

벼랑 끝에 몰린 사랑

장편소설

국민학교부터 대학까지, 장장 20년 동안의 기나긴 학업을 끝내고 이제 막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나영의 앞길을 가로막고 선 것은 이뿐 아니었다.


백화의 꿈은 대학교수가 되어 강단에 서는 것이었다.
그런 그녀가 본인이 가고 싶었던 대학을 못 가고, 대신 생각지도 않은 3년제 간호전문대에 입학하게 된 것은

고교 시절의 방황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부평동에서 공주처럼 자란 그녀는 중학교 때 집안이 기울기 시작해서 고등학교 때는 완전히 거덜 난 상태가 되었고, 아버지는 결핵으로 폐절제술까지 받은 후 3년 동안 마산결핵요양원에 가 있게 되었다. 


이제 어머니 혼자서 가계를 짊어지고 자녀 부양에 남편 병원비까지 도맡게 되다 보니 나중에는 네 식구가 비 새는 단칸방에까지 내몰리는 신세가 되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부부 갈등까지 심화되자 사춘기의 백화는 방황 끝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그냥 집을 떠나 있고 싶어 기숙사가 있는 그 학교에 들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가 대학 졸업반이 되었을 때는 건강을 되찾은 아버지가 다시 사업을 일으켜 어느 정도 가계가 안정되었는데 나중에 나영의 존재를 알게된 그녀의 어머니는 큰 시름에 잠겼다. 그러다 생각해 낸 비책이 딸의 꿈도 이루어 주면서 둘을 멀리 떼어놓는 것으로 백화를 서울에 있는 4년제 간호대학으로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백화 어머니는 이북에 있을 때 평양 사범(師範)을 나와 교편을 잡은, 그 시절 여성으로서는 최고의 엘리트였다. 마침, 평양사범 은사(恩師) 중 한 분이 당시 서울에 있는 유명 사립대학의 교학처장으로 있어 그녀는 그에게 찾아가 딸의 편입을 부탁하였다. 그는 그 대학의 설립자와 함께 학교를 일으켜 세운 개교 공신으로서 대학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자기가 가장 아끼던 제자가 자기처럼 이남에 내려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에 심히 마음 아파하던 차라 제자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자네 딸은 내가 책임지지. 일단 부산에서 학교만 졸업하고 올라오면 이 대학 4년제 간호학과로 편입시켜 주고, 공부 열심히 해서 학위까지 따고 나면 책임지고 교수 자리 마련해 주마.”

이제 그녀 앞에는 그동안 실현 불가능으로 여겨졌던 꿈을 향한 대로가 놓이게 되었고 그녀는 그 기로에 서게 되었다. 왼쪽에는 꿈을 이루어 줄 넓고도 평탄한 장밋빛 길이, 오른쪽에는 장애인과의 불투명한 미래로 가는 좁고도 험한 가시밭길이 놓여있다. 과연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백화는 차마 꿈을 버릴 수 없어 서울로 가기로 결심하고 나영을 만났다.     

나영과 백화가 만난 곳은 하단에 있는 에덴공원 갈대숲에 있는 집이었다. 그곳은 건물 안에도 손님 테이블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젊은 연인들은 건물 밖 갈대숲 사이사이에 들어선 파라솔 테이블에 앉았다.

그날 역시 달이 휘영청 밝았다.

나영이 맥주를 두 병쯤 비웠을 때 그녀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나영 씨, 실은 나, 지난주에 엄마하고 같이 서울 갔다 왔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그동안의 집안 사정과 현재 처해있는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 후, 졸업하면 서울로 가서 꿈을 이루고 싶다고 말했다.

“나영 씨, 우리가 비록 서울과 부산으로 떨어져 지낸다고 하더라도 평소에 서로 자주 연락하고 방학 때마다 내려와서 만나면 우리가 헤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나영의 감수성 예민한  영적 안테나는 "그녀가 서울로 가는 순간 너와는 끝이야!"라며 부르르 떨었다.

나영은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자신의 모교는 2년 전 인턴시험장에서 장애인들을 쫓아냈다. 그래서, 기초의학을 하겠다고 찾아간 곳에서는 아예 투명인간 취급을 했다. 그렇게 온 사방이 꽉 막혀 막막하기 이를 데 없는 나영에게 유일한 피난처였던 사랑의 동산에서 마저  쫓겨나게 된 나영에게 그 겨울은 그토록 차갑고 잔인했다. 

 

때마침 옥외 스피커에서는 윤시내의 ‘열애’가 흘러나왔다. 오장육부를 다 끌어올려 혼신의 힘으로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비장하기까지 하였고, 날아오르던 그 목소리는 차갑고 무정한 밤공기에 가로막혀 달빛 어린 갈대 위로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긴 침묵 끝에 드디어 나영이 입을 열었다.     

"백화 씨, 나는 내가 누구를 만나든 내가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될 고난의 길을 가야만 합니다.

하지만 백화 씨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났더라면 겪지 않아도 될 쓰라린 고통을 맛보며 가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내가! 그 모든 것 다 보상해 드릴게요. 아무 소리 말고 나와 함께 갑시다!"

     

이 말 한마디에 그녀의 마음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함께 또다시 심하게 흔들렸고, 그날 밤 그녀는 긴 밤을 뜬눈으로 지새워야 했다. 나영이 내뱉은 음(音)의 파동은 1초도 안 되어 허공에서 소멸되고 말았지만 그의 말(言)은 백화의 가슴속에 깊이 박혀 한마디 한마디 꿈틀거리며 되살아났다.

백화는 자신이 이별장이나 다름없는 그런 냉정한 말을 하면 나영은 분명 신세 한탄과 함께 세상에 대한 원망을 먼저 늘어놓으리라 생각했고, 그렇게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련 없이 훌훌 떠날 수 있겠다 싶었는데 나영의 입에서 맨 먼저 나온 말은 백화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백화 씨, 나는 내가 누구를 만나든 내가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될 고난의 길을 가야만 합니다."

그 말에 백화는 '어쩌면 이렇게 자신의 처지를 솔직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하며 감탄했고,

"하지만 백화 씨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났더라면 겪지 않아도 될 쓰라린 고통을 맛보며 가야 할 것입니다." 라며 자신의 처지까지 헤아리며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달래주는 말에 백화는 감동받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한 말, "하지만, 나중에! 내가! 그 모든 것 다 보상해 드릴게요. 아무 소리 말고 나와 함께 갑시다!"에서 풍겨 나오는 강력한 자신감과 카리스마에 저 정도 심지가 굳은 남자 같으면 내 인생을 맡겨도 되겠다는 신뢰감이 가슴 가득 밀려왔다.     


결국, 백화는 자신의 꿈을 접고 나영을 따르기로 했고 이제 그들은 그들 앞에 놓인 가시밭길을 맨발로 들어서게 되었다. 나영이 백화에게 바쳤던 예언서 같은 노래 가사의 한 부분이 현실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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