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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May 04. 2022

결혼으로 통하는 마지막 관문

장편소설


예언


나영의 숙소를 다녀간 백화의 어머니는 시름이 깊어만 갔다. 과년한 딸은 남자 때문에 집을 나갔다. 집 나간 딸이 기댈 데는 어디겠는가? 어쩌면 그 둘은 이미 사실혼 관계에 들어섰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자신까지 나영에게 긍정적 언질을 준 상태다. 이런 걸 생각하면 둘을 결혼시키는 게 맞다.     


하지만, 끝까지 ‘절대 불가’를 외치고 있는 집안 남자들을 생각하면 ‘이 결혼이 과연 실현 가능할까?’라는 강한 의문과 함께 자신감이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왔다 갔다 하는 마음에 뭔가 확신을 줄만 한 것이 필요했다. 하여, 전국 팔도에서 가장 용하다고 소문난 점쟁이를 한 명씩 다 찾아다녔다.


하지만 결과는 시키라는 사람과 시키지 말라는 사람이 반 반 정도 되었으니 이 또한 도움이 안 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던 차, 그녀의 어려운 처지를 보다 못한 절친한 이북 출신 친구가 자기가 아는 용한 점쟁이가 있다며 거기 한 번 가보자 하여 따라갔다.     


친구가 데려간 집은 영선동 고개 넘기 직전 오른쪽 골목에 있었는데, 이곳은 예전에 나영이 헌기와 함께 머물던 독서실과 현재 백화가 생활하고 있는 자취방 바로 아래에 있는 집이었다.     

점인(占人)의 이름은 초아(草阿), 그는 27세인 나영보다 네 살 밖에 많지 않은 아주 젊은 역술가였다. 백화의 어머니 김여사는 두 사람의 이름과 생년월일시(生年月日時)를 내놓고 결혼을 시켜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가르쳐 달라 했다.


그는 그걸 놓고 한참 풀이를 하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자가 몸 불편한 것 때문에 그래요? 내가 책임질 터이니 두 사람 결혼시키세요. 그러면 당신 딸은 당신이 남편으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까지 다 받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훗날, 그 사위의 무릎 위에서 눈을 감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확신에 찬 점괘가 또 있을까? 이렇게 속이 후련한 점괘가 또 있을까?

나영이 하고픈 말, 김 여사가 듣고픈 말을 초아가 대신해준 것 같았다.


고달픈 피난살이 중에 그녀에게 가장 갈급했던 것은 부부간의 사랑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을 사위로 맞으면 자신이 받지 못한 사랑까지 자기 딸이 다 받아 누리고 산다니! 딸 하나 보고 살아온 엄마에게 이 이상 바랄 것이 무엇 있겠는가? 게다가, 자신의 노후에는 사위의 보살핌을 받고 사위의 품 안에서 눈 감을 수 있다니 이 또한 얼마나 든든한 보루인가!     

너무나 위안이 되고 자신감을 심어주는 초아의 예언에 김 여사의 의구심은 안개처럼 사라졌다.


     시험     


초아의 예언으로 자신감을 얻은 김 여사에게는 이제 현실적인 문제가 눈앞에 닥쳤다.

남편은 서슬이 시퍼래서 돈 한 푼 내놓을 기미도 없는데 여자 혼자서 무슨 힘으로 결혼을 시킨단 말인가?      

그녀는 자신의 남동생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도움을 구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어렵던 피난 시절, 동생들 대학 공부시키는데 김 여사가 큰 이바지를 했기 때문이다.     


동생은 서울치대를 나와 시내에서 자리를 굳힌 성공한 개업의였다. 그는 술이 센 애주가로서 화통하고, 괄괄하고, 직설적이고, 말이 거칠었다. 그는 누나의 말에 자신이 한 번 남자를 테스트해 본 후 거기를 통과하면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노라고 했다.    


"누님, 사내 새끼란 그저 술을 잇빠이 멕여 놓으면 다 나오게 되어 있시오. 나중에 좆몽둥이 함부로 휘두르고 다닐지 아닐지까지 말이외다."

         

백화는 어머니로부터 이제 삼촌에게도 인사드려야 하니 나영을 삼촌 병원으로 한번 데려오라는 말을 듣고 나영에게 전했다. 나영은 그런 심오한 계략이 숨어있는 줄도 모르고 이제야 뭔가 일이 되어가는구나 싶어 무척 기분이 좋았다.  


병원은 광복동의 아미동 쪽 끝자락 가까이에 있었고, 2층은 병원, 3층은 살림집이었다. 

백화와 함께 3층으로 올라가니 백화의 어머니가 삼촌께 나영을 인사시켰다. 

차를 한잔 마신 후, 삼촌은 술이나 한잔하자며 인근에 있는 자신의 단골 술집으로 나영을 데리고 갔다.   


식사는 하지 않은 채 간단한 요깃거리 안주로 배를 채운 후 삼촌의 술 공세가 시작되었다. 

나영은 원래 배를 먼저 채운 후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실 때는 천천히 즐기며 마시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양반은 밥도 먹이지 않고 술잔부터 건네며 "많이 들라우!"를 연발하고, 잔 비우기가 무섭게 술을 채우고는 또 마시잔다.


나영은 점점 취해갔다.

어느 정도 취기가 돌자 삼촌의 유도신문이 슬슬 시작되었고 그제서야 나영은 이 사람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나영은 속으로 웃었다.

'하고많은 시험 중에 술 시험이라니? 내가 치를 수 있는 시험 중에 가장 쉬운 게 술 시험인데 거 참.'

     

나영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만 18세가 되던 해, 어느 날 아버지는 술상 앞에 나영을 불러놓고 말했다.     

"너도 이제 술 마실 나이가 되었으니 술 마시는 법을 가르쳐 주마. 술은 처음부터 부모에게 배워야 하는 법이야. 이제부터 애비가 하는 말 잘 듣고 명심하라우!”          


나영의 아버지는 술 따르는 법, 술잔 받는 법 등 술자리에서 알아야 할 기본 매너를 가르친 후, 술 마실 때 지켜야 할 음주(飮酒) 오계명(五戒命)을 선포하였다.     


1. 술은 즐겁게 마실 것.

2. 술 마시고 술주정하거나 남과 시비하지 말 것.

3. 술 취해서 실수하겠다 싶으면 무조건 자리를 뜰 것.

4. 술은 한자리에서만 먹고, 이차 삼차 가지 말 것.

5. 술 마신 후 잠은 필히 집에 와서 잘 것.   

  

혈기 왕성한 젊은 나영은 위의 계명을 100% 다 지키지는 못했지만, 그 정신만은 가지고 살아왔고

그 덕분에 여태껏 아무리 술이 취해도 술자리에서 남의 눈살 찌푸리게 할 만한 실수는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술 먹여서 시험하고자 한 삼촌의 계략은 니영으로서는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나영은 비록 취하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 하나 흩트리지 않고 조리정연하게 소신을 밝혔다.


자신이 어떻게 의사가 되고자 하였는지, 백화를 어떻게 만나게 되었으며 백화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철학을 가지고 의사 생활을 할 것이며 어떤 각오로 가정생활을 할 것인지 등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다 토해냈다. 나영은 속이 후련해졌다.


‘대학 졸업반부터 시작해서 이 시점에 오기까지, 내 운명을 손에 쥔 사람 치고 내 말에 귀 기울여준 자 그 누구뇨? 말을 들어주기는커녕, 말도 못 붙이게 하고 다 쫓아내지 않았더냐? 나 오늘, 내 할 말 속시원히 다 했으니 비록 이 삼촌이 반대한다 하더라도 난 결코 그를 원망하지 않으리라.’     


자신의 주량을 믿은 나머지 나영의 주량을 우습게 보고 서로의 나이차도 생각지 않고 같은 양의 술을 마신 삼촌은 몹시 취했다. 술자리가 파한 후 나영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간 반면, 삼촌은 술에 취해 오리야기리야 하며 3층 계단을 기다시피 힘겹게 올라가 초인종을 눌렀다.


그 엄중한 시험 결과를 걱정하며 초조히 기다리던 백화 어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아~니, 이 아이 새끼래 이거 와 이래? 너 혼자 술 다 쳐 마시고 완?”     


"누님, 그 아이 새끼래 사람 됐시오. 걱정 말고 결혼시키시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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