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것 하나 열기 쉬운 문은 없었으나 그중에서도 마지막 문은 자신의 미래를 좌우할 가장 열기 힘든 문이었다. 앞으로 무얼 전공하며 살아갈 것인가?
원래 하고 싶었던 재활의학과는 지도교수의 조언에 따라 일찌감치 포기했고, 투명인간 취급당한 기초의학은 두 번 다시 꼴도 보기 싫었고, 이런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너무나 제한적이었다.
'되도록 몸을 적게 움직이고도 할 수 있는 과가 뭘까?'
그가 도달한 결론은 피부과였다.
그는 지난날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하루라도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미우나 고우나 모교의 문부터 두드려보는 것이 순서인 것 같았다.
그해 5월, 어렵사리 모교의 피부과 주임교수 집을 알아내어 가족이 저녁 식사를 마쳤을 즈음에 그 집 대문 벨을 눌렀다. 가방 속에는 되든 안 되든, 시간 내어 자기 말을 들어준 교수님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국제시장 깡통골목에서 산 미제 ‘쵸이스커피’ 한 병이 들어있었다.
벨이 울리자 부인이 나와 대문을 열어 주었고, 나영이 졸업생인데 여차여차한 일로 교수님 찾아왔다하니 한 방으로 안내했다. 한 10 분쯤 기다리자 교수가 들어왔다. 그런데 똥이라도 밟은 듯 표정이 심상찮다. 그는 나영을 보자마자 강한 톤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야?"
"네, 교수님 과를 지원하기 위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야 이 친구야! 그런 일이라면 학교 연구실로 찾아와야지, 왜 남의 집을 불쑥 찾아와?"
"죄송합니다. 저는 부디 시험에 응시해 볼 기회라도 한 번 주십사 하고 간청해 볼 양으로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만 제 생각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너! 내 집을 어떻게 알았어? 으잉? 어느 놈이 가르쳐 준 거야?!"
그는 피의자 심문하듯 나영을 몰아붙였고 그의 혹독한 추궁에 나영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고개는 점점 내려갔고 몸은 떨려 왔다. 하지만 그 사람 이름을 댈 수는 없는 법, 끝까지 버텼다.
"야! 너, 우리 과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 3년 전에 우리 과에 지원했다가 안 돼서 군에 간 너 선배가 다시금 어플라이 했는데 네깟 놈이 이제 와서 지원한다고? 흥!"
나영은 점점 주눅이 들어갔고 마치 죄인 다루듯 하는 교수의 태도에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
"이제, 볼 일 다 봤으면 돌아가 봐!"
교수는 이 한마디 내뱉고는 쾅하고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나영은 준비해 간 커피를 손이 부끄러워 차마 내놓지 못했다.
혼자 신발 신고 대문을 나서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밤하늘을 쳐다보니 반짝이는 별들 사이로 슬픈 표정의 아버지 얼굴이 보였다.
'내 아버지는 매일 아침 우리 집 대문을 두드리는 거지들을 단 한 번도 빈 바가지로 돌려보낸 적 없다.
그 바가지 속에 항상 쌀이나 보리쌀, 아니면 납작보리쌀이라도 채워 보냈다.
헌데, 명색이 의사인 나는 스승의 집에 찾아와서 쌀은 고사하고 자존심의 쪽박까지 깨고 쫓겨났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도 제잔데. 그것도 뼈아픈 제자인데...'
나영이 숙소에 돌아와 가방에서 커피 병을 도로 꺼내놓을 때,
병 위에서 미소 짓고 있는 남자가 마치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아 그 얼굴을 돌려놓았다.
그로부터 약 한 달 후, 나영은 친구 자형의 소개로 피부과로 이름난 메리놀 병원 과장을 찾아갔으나 거기도 이미 지원자가 있었다.
찬 바람이 불어오자 자리는 더더욱 없었다.
'이 타이밍에 또 어디를 기웃거려야 하나?'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는 학생 때 친구의 권유로 별생각 없이 들어간 가톨릭 학생회의 지도교수로서 당시에는 한백병원 피부과 주임교수였다. 나영이 그 교수를 찾아갈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그 교수의 성격이 워낙 유하고 자상해서 적어도 지금껏 당한 그런 비참한 대우는 받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병원으로 미리 전화하여 외래진료실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갔다.
약속한 시간이 되어 피부과 외래진료실에 들어갔는데 교수는 아직 마지막 환자를 보고 있어 나영은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진료가 끝나고 간호사까지 퇴근하고 나자 교수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잠시 볼일 좀 보고 올게." 하고 방을 나가서는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20분쯤 후, 교수는 돌아와 옷을 주섬주섬 입더니 "자~ 가지." 하면서 방문을 나선다.
나영은 속으로 '야~ 역시 신앙인이 다르네. 오랜만에 옛날 지도 학생이 찾아왔다고 저녁이라도 사 주면서 내 용건을 들어줄 모양이다.' 하며 좋아라 따라나섰는데, 말 한마디 않고 빠른 걸음으로 앞서가는 교수의 뒷모습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불길한 기운이 나영의 육감에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속삭였다.
마치 뭣에라도 쫓긴 듯 빨리 걷는 교수의 발걸음을 따라잡기 위해 나영은 이 층에서 일 층으로 내려오는 슬로프를 숨을 헐떡이며 뛰다시피 내려오자 본관 건물 유리문 너머에 기사가 대기하고 있는 승용차가 한 대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그 차를 타고 도망갈 것만 같은 생각에 나영은 "교수님 오늘 바쁘신 모양이지요?"하고 물었다.
"응, 그래."
"그러면 다음에 댁으로 찾아봬도 될까요?"
"응, 그래."
교수는 이제 기사가 문을 열어놓고 대기하고 있는 뒷좌석에 막 탈 기세였다.
나영이 급하게 따라와 물었다.
"교수님, 다음 주 저녁 7시, 괜찮으시겠습니까?"
"응, 그래."
"그럼 다음 주 금요일 7시에 댁에서 뵙겠습니다."
좌석 문은 닫혔고 차는 출발했다.
그날, 나영이 그 교수에게서 들은 말은
‘잠시 볼일 좀 보고 올게’
‘자~ 가지’
‘응, 그래’
이 세 마디였고 나영이 왜 찾아왔는지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았다.
나영은 또다시 어렵사리 그 교수 집을 알아내어 약속 시각 15분 전쯤 도착했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백화와 함께였다.
앞으로 결혼할 사람과 둘이 같이 읍소하면 보다 효과적일 것 같아서였다.
'이제 마지막인데 무슨 짓인들 못 하겠냐?' 싶었다.
그리고 가방 안에는 ‘쵸이스커피’ 한 병을 고이 모셔놓았다.
정시가 되자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가정부가 인터폰을 통해 물었다.
"네, 오늘 교수님과 만나기로 한 제자입니다."
"교수님 안 계신데요!"
"네? 오늘 7시에 찾아뵙기로 약속했는데요!"
"아무튼, 안 계세요."
"어디 가셨는데요?"
"사모님과 시민회관에 공연 보러 가셨습니다."
나영은 야구방망이로 머리를 한 방 맞은 듯 골이 멍 해왔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나영은 창피해서 백화 앞에서 낯을 들 수 없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백화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과연 이런 사람 믿고 내 인생을 맡겨도 될지 의구심을 품지나 않을까?'
나영은 자신이 너무 비참해 보였다.
대문 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한 채 문전박대당하고 돌아선 나영은 백화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그냥 걷다가 버스정류장에 다다르자 말없이 백화를 태워 보냈다.
인턴 숙소로 돌아와 가방에서 커피 병을 꺼내는데 커피 향에 취해 미소 짓고 있는 남자의 얼굴 위로 뜨거운 액체물 두 방울이 떨어졌다. 나영은 그 남자의 얼굴이 마치 아버지의 얼굴이 되기라도 한 듯 그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항변하듯 말했다.
"아버지. 저는 어릴 적, 아버지 말이라면 다 믿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토록 자주 들려주시던 세 마디 말 중 세 번째 말씀, ‘너는 결코 남과 다르지 않아!’ 라던 그 말은 틀렸네요. 저는 남과 다르지 않은 게 아니라, 달라도 너무 다른 인간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