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우물 Apr 28. 2022

각오한, 하지만 너무한

장편소설

                                                     "그 사람하고는 안 돼!"     


백화가 예정된 길을 포기하자 그 집안에서는 자연히 나영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나영의 예측대로 반응은 싸늘했다. 특히 아버지와 오빠의 반대가 극심하여 ‘안 돼’도 그냥 ‘안 돼’가 아니라 ‘절대 안 돼!’였다.     

이제 두 사람 앞에는 함께 피 흘리며 나아가야 할 험난한 고난의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자 기숙사가 아닌 집에서 직장을 다녀야 했던 백화는 매일 가족과 얼굴을 맞대며 힘겨운 사투를 벌여야만 했고, 백화 한 사람만으로도 버거웠던 나영은 이제 가족 전원을 상대로 투쟁을 해야 했다.

백화가 당하는 고통이 도를 넘자 나영은 결연한 의지로 전면에 나섰다.     


먼저 백화를 통해 아버지와 한번 만나자는 의사를 전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만날 필요 없다’라는 싸늘한 대답뿐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만났다.     

면담은 무난히 끝났지만 헤어질 때 나영이 계단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그 어머니는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집에 가서 딸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내가 너를 잘 못 키웠나 보다."라며 탄식하였다.     


백화의 어머니는 평양 사범 출신으로 평양에서 교편을 잡던, 당시로서는 최고의 인테리 여성이자 부잣집 딸이었다. 그런 사람이 6·25 때 피난 내려와 경남의 한 시골 출신 남자와 중매로 만나 결혼하였으나 많은 면에서 맞지 않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자식은 아들 둘에 딸 하나. 집안에 자신과 공감할 수 있는 여자라는 존재는 둘째인 딸밖에 없어 그녀는 그 딸을 공주처럼 애지중지 키우며 그 자식 하나 기대고 살아왔다. 그런 자식이, 성격도 까칠한 데다 제 몸도 튼실하지 못한 주제에 평생토록 저런 장애인 수발이나 들며 살겠다니 억장이 무너질 수밖에.     


딸 하나 잘 되는 것으로, 행복하게 되는 것으로, 자신의 고된 삶을 위로받고 보상받고 싶었던 그녀에게 딸이 돌려준다는 게 부모 가슴을 후벼 파는 고통이었으니 ‘내가 너를 잘 못 키웠나 보다’라는 말이 나올 만했다.

어머니의 말에 백화는 너무나 가슴이 아파 ‘엄마까지 이렇게 반대하는데 내가 꼭 이 사람과 결혼해야 하나?‘라는 근원적인 갈등을 다시금 겪게 되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나영 역시 가슴이 쓰리고 아팠지만 이미 내디딜 만큼 내디딘 발걸음, 어정쩡하게 거기서 멈출 순 없었다.

'아버지를 만나서 담판 짓자.'     

결심이 선 나영은 저녁시간에 직접 집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그 아버지는 끝내 나영을 집안에 들이지 않았고 만나주지도 않았다.

그런 아버지의 행동이 나영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딸자식을 사랑한다면 그 자식이 어떤 사람에게 혼이 빠졌는지 그 꼬라지라도 한번 봐야 할 것 아닌가? 그리고 말이라도 한마디 들어본 후, 받아들이든지 내치든지 결정을 내려야 할 것 아닌가?  이렇게 피하기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나? 이것이 과연 자식을 위하는 길일까?

 

이제 남은 상대는 오빠였다.

다혈질에 괄괄한 성격의 오빠는 적어도 만남 자체를 피할 사람 같진 않았다.

약속이 잡혔다.     

백화와 함께 그를 만나는 날, 그는 뜻밖에도 자신이 사귀는 여자 친구와 함께 나왔다. 당연히 심각한 이야기는 없었고, 서로 권 크니 잣 크니 하며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 만남은 끝났다.     


나영은 고등학교 한 해 후배인 그와 뭔가 통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 귀가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술 한잔 거나해져 집에 돌아간 그녀의 오빠는 집에서 난리 벅구를 쳤다. 백화로부터 그날 일을 전해 들은 나영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어느 날, 백화의 어머니가 병원으로 나영을 찾아왔다.

나영은 의아한 마음으로 그녀를 인턴 숙소로 안내했다. 조그만 방에 이 층 침대가 놓여있고, 의자 두 개를 마주 놓을 공간이 없어 어머니를 의자에 앉게 하고 나영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머니가 찾아온 이유는, 집안 꼴이 말이 아니니 제발 내 딸과 헤어져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서로 인사말을 나눈 후 이제 막 본론을 꺼내려고 나영의 눈을 쳐다본 순간, 마치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나영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백화의 어머니는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내 자식 귀하다고 남의 자식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하다니! 이건 도저히 사람으로서 할 일이 못 되누나.'


이제 막 목구멍을 통과하려던 본래의 말은 침과 함께 꼴까닥 도로 넘어가 버리고, 대신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엉뚱한 말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한 선생,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요."

그러고는 나영이 좋아한다는 ‘초이스 커피’ 두 병을 내놓고 돌아갔다.

병원을 나선 그녀는 마치 자신이 무엇엔가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 후로도 백화의 집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나영이 자신의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자 오기가 나서 답장 올 때까지 편지를 보낸 것처럼, 집에서 반대를 하면 할수록 오기가 올라 그 오기 하나로 버텨온 백화도 이젠 한계에 다달았다.

 

백화는 어머니에게 집을 나가 있겠다고 말했다.

어머니 역시 집안 분위기부터 먼저 수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뜻대로 하라 하였고, 트렁크에 옷가지를 챙기는 딸자식을 쳐다보며 많이 많이 울었다.




가출(家出).

이젠 나영이 책임져야 할 차례.

나영은 헌기에게 부탁하여 영도에 방을 하나 구해달라 했다.

그가 영도에 방을 구하게 한 것은 백화가 졸업 후 처음으로 취직한 곳이 영도구 보건소였기 때문이다.


헌기는 그 아버지의 주선으로 영선동 산마루턱에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은 집 문간방 한 칸을 구해주었는데, 계속해서 올라가는 경삿길에다 계단도 많아 나영이 한번 올라가려면 중간에 두어 번은 쉬어야 했다. 나영에게 그곳은 골고다의 언덕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나영의 집안에서 들고일어났다.

그동안은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 나영에게 별말 안 했지만,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자 나영의 부모는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해 더는 참기 힘들었다. 아버지의 분노가 폭발했다.


"꼭 이렇게까지 해서 이 결혼 해야하간? 야이 썅! 당장 때려치우라우!"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혼자서 지고 가는 십자가의 무게에 숨이 턱턱 막히는데, 믿었던 아버지마저 이러시니 그동안 속에서만 부글부글 끓던 감정의 용암이 엉뚱한 데로 폭발했다.

난생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대들고, 말다툼 끝에, 해서는 안 될 말까지 내뱉고 말았다.

"까짓 거, 그러면 제가 집을 나가지요. 뭐!"      

그러고는 대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아버지는 맨발로 아파트 복도까지 따라오며 말렸다.

"야 이놈아, 네가 나가면 어딜 간단 말이냐? 돌아오라우!"


그런 아버지를 매정하게 뿌리치고 나영은 냅다 계단을 내려갔다.

1층에 다다라 아파트 입구를 나서려는데 동생이 급히 뛰어 내려와 나영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형, 참으세요. 아버지가 ’네 형이 저 몸으로 이 밤에 어딜 간단 말이냐?’라며 무조건 데려오라고 울면서 말했어요. 아버지를 봐서라도 집에 갑시다."   


이렇듯 두 사람은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나아갈 곳도 돌아갈 곳도 없는 길 위의 연인들이 되었다.
1979년, 인턴 때의 일이었다.

이전 02화 드디어 인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