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에 들어오니 동료 인턴들은 하나둘 레지던트 들어갈 병원이 확정되어 이틀이 멀다 하고 축하주 마시러 나가는데 나영은 그때까지도 갈 곳이 없었다.
이제 거부당하는 수모도 신물이 날 지경이라 더 이상 구걸하러 다니기도 싫어, 근무 없는 날도 "케세라세라" 하며 숙소 침대에 누워 굼벵이처럼 뒹굴거리고 있었다.
11월 말, 이제 결혼도 하여 부양가족도 생겼는데, 바로 코앞에 다가온 내년 초에 어디로 들어갈지 아무런 대책도 없는 한심한 처지임에도 이상하게 마음은 편했다.
어떤 일이든 철저히 계획하에 움직이는 사람인 나영에게 이런 감정은 참으로 이례적이었고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었다. ‘무대책의 평안’. 도대체 이 편안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정작 본인은 태평스레 있는데, 오히려 답답한 사람은 장모였다. 사위가 갈 곳이 없어 그러고 있는 꼴을 보다 못한 장모는 또 초아를 찾아갔다.
"선생님, 우리 사위가 레지던트를 해야 하는데 받아주는 데가 없나 봐요. 어떡하면 좋아요?"
그러자 그는 말없이 종이 위에 글자 한 자를 적어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한 선생님은 이 글자와 관련 있는 과를 하면 대성할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영은 할 일도 없고 심심하기도 해서 전화번호 수첩을 꺼내 들고 이리저리 전화질을 하다가 문득 그동안 잊고 있었던 한 후배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나영의 후배 '헌기'와 절친한 친구라 예과 때부터 나영과도 형, 동생 하며 가까이 지내던 사이로 대부대병원 방사선과 레지던트 1년차로 있었다.
"문 선생 오래간만이다, 잘 있냐?"
"아이고 형님, 오랜만이네요. 우째 지내시능교?"
둘은 오랜만에 통화하며 별 영양가 없는 수다를 떨다가 아무 생각 없이 인사 삼아 물었다.
"너희 과 티오는 다 채웠냐?"
"아니요, 킴스 두 개에 난킴스 티오가 하나 나왔는데, 난킴스 지원자가 아직 없어요. 우리 의국 생긴 이래로 이런 일은 처음이라요."
순간 나영은 감전이라도 된 듯 침대에서 번쩍 일어나 앉았다.
'난킴스 자리가 비었다니! 우째 이런 일이?'
그때까지 방사선과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그런 과였지만, 갈 곳 없는 나영으로서는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야! 그럼 내가 가도 되겠나?"
"잘됐네요. 빨리 오소. 내일이 마감이요!"
다음 날, 나영은 아직 근무 시간 중이라 나머지 업무는 동료들에게 부탁하고 최대한 서둘러 갔지만 약속 시각보다 10분 정도 늦게 대부대병원 방사선과에 도착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나영을 기다리던 레지던트들은 점심 식사하러 나가고 의국에는 아르바이트 여고생 혼자 남아있었다. 그녀는 일찍 퇴근하고 싶은 마음에 나영에게 의국 좀 지켜달라고 부탁하곤 홀라당 퇴근했다.
텅 빈 의국에 나영 혼자 남아 소파에 앉아 있는데, 그녀가 나간 지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한 사람이 문을 빼꼼히 열고는 물었다.
"여기 난킴스 지원자 있습니까?"
순간, 나영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모르는 얼굴인 걸로 봐서, 이 과에 난킴스 자리가 비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군 복무를 마치고 나온 선배 지원자이리라. 만약 사지가 멀쩡한 그와 맞붙는다면 나영이 탈락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그야말로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나영은 그를 힐끗 쳐다보며 퉁명스레 한 마디 하고는 꼴도 보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예, 있어요."
그러자 그 사람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더니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나영은 "휴~"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간발의 차이로 두 사람의 운명이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한 사람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방사선과로, 또 한 사람은 방사선과를 찾아왔다가 생각지도 않았던 마취과로….
이로써 나영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인턴 시절,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모든 장막은 활짝 걷혔다.
그는 감격에 겨워 자신에게 말했다.
"지금까지는 내 배를 삼키려는 모진 파도와 비바람을 맞아 오로지 침몰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노를 저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나의 꿈을 향해 힘찬 항해를 시작할 것이다. 이제 작별을 고할 시간. 슬픔이여 안녕, 한 맺힌 눈물이여 안녕. Goodby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