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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May 12. 2022

실패와 성취

장편소설


나영이 1년차로 들어갔을 때는 환자 몸에 바늘을 찔러 넣고 조영제를 주입하여 시행하는, 소위 특수촬영이라는 검사는 전부 해당과 주치의가 내려와서 시술하고, 방사선과 전공의는 그저 투시기를 보면서 사진 촬영만 하였다. 이에 나영은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아니, 방사선과에서 이루어지는 시술을 왜 타과 의사가 와서 해? 촬영하는 일이야 기사 시켜서 찍으면 되지, 의사가 왜 이러고 앉았노? 우리가 무슨 사진사냐? 아니면 지네들 시다바리가?'    


그때까지 그런 관행이 내려온 이유는 그동안 방사선과 전공의 숫자가 적어 그런 시술까지 해줄 여력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전공의 숫자가 일곱 명으로 늘어났다. 우리가 못 할 이유가 뭐 있노?'

이런 생각이 들던 차에, 의국장 역시 이전부터 나영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지 1년차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자 다른 과를 향해 다음과 같이 선전포고를 하였다.     

"앞으로 한 달 후부터 우리 과에서 하는 모든 검사는 우리가 직접 할 테니 당신들은 검사 후 환자 케어나 잘하셔."    


그러자, 과 내외적으로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이 시끄러워졌다.     

과 내에서는 '환자 몸에 바늘을 찔러 조영제를 집어넣고 빼고 하는 일인 만큼 정교한 테크닉과 경험이 필요한데 아무 준비도 없이 시작했다가 그 뒷감당을 누가 한단 말인가?'라는 우려가 위로부터 터져 나왔고, 다른 과에서는 "한 번 해본 적도 없는 놈들이 무얼 한다고 그래? 검사 후에 환자 잘못되면 너희가 책임질래?"라며 윽박질렀다.     


그들과 맞서 의국장은 완전 무대뽀로 나갔다.

"처음부터 잘하는 놈 어데 있노? 공부해서 하면 되지. 그래, 우리가 책임질게. 그라믄 됐나?"

그리고 아래 연차에게는 각자가 맡은 초독 분야에 해당하는 검사는 그 파트 사람이 책임지고 준비하라는 오더가 떨어졌다.

     

이런 논란의 중심에 선 검사는 어깨와 무릎 관절조영술(關節照影術, arthrography)과 척수강조영술(脊髓腔照影術, myelography)로서  모두 콧대 높은 정형외과와 신경외과 분야였다.

당시 나영이 맡은 초독 분야는 골·관절이다. 이 말은 곧, 위의 촬영 전부를 나영이 책임지고 시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졸지에, 가장 큰 불똥이 나영한테 튄 셈이다.      

위의 검사 중 초심자가 제일 겁내는 것은 척수강조영술이다.      

찌를 때 잘 못 찌르면 신경다발을 건드려 다리에 마비현상이 오기도 하고, 주입한 조영제를 빼낼 때 뇌척수액이 많이 빠져나오면 뇌압이 떨어져 바로 쇼크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영은 별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인턴 때 온갖 것 다 해보며, 비록 가는 바늘이긴 하나 척수강을 찔러 척수액 채취 시술도 몇 번 해보았기 때문이다.

'척추도 찔러봤는데 관절쯤이야!'


의국장의 오더가 떨어진 후부터 나영은 이들 검사가 있을 때마다 타과 의사들의 시술 장면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런데, 정형외과에서 관절조영술을 시행할 때 무릎은 잘하는데 어깨 조영은 한 번도 제대로 하는 꼴을 못 봤다. 나영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깨관절이란 것이 몸속 깊이 푹 파묻혀 있는 것도 아니고, 손으로 바로 만져질 정도로 인체 표면에 있는데 거기에 바늘 찔러 넣고 조영제 주입하는 게 뭐가 그래 어렵노? 아이고 바보 같은 놈들.'

힘겨운 투쟁 끝에  오랜 세월 타과로 넘어가 있던 특수촬영을 한 달 만에 되찾아왔다. 그리고 그 첫 케이스인 어깨관절조영술이 나영에게 떨어졌다.

첫 시술 날,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나영이 등판했다.


나영은 투시 화면을 보면서 좁은 관절 틈 사이로 정확하게 바늘을 찔러 들어갔고 바늘이 더 이상 나아가지 않자 바늘을 약간 뒤로 뺀 후 서서히 조영제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조영제가 관절을 둘러싸면서 잘 퍼져나간다. 빙고!     

조영제가 다 들어가고 나자 바늘을 뽑고 환자의 팔을 움직여서 여러 각도로 돌려 촬영하는데, 이게 웬일인가?

주입한 조영제가 관절 안에는 소량만 들어있고 나머지 대부분은 관절 캡슐 밖에 들어가 있는 게 아닌가!     

"우째 이런 일이?!"     

나영은 개망신을 당했다. 자신이 비웃었던 바로 그 시술에서 자신도 똑같이 망신을 당한 것이다.

"아이고, 자석들. 자신 있다며 큰소리치고 가져가더니 꼬라지 좋~다."라는 비아냥거림이 나영의 귀에까지 흘러들어왔다.


다음번에 했을 때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실패한 원인을 알아야 성공의 실마리라도 잡을 텐데 그러지를 못하니 참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러던 차에, 같은 연차 전공의의 모친이 미국을 방문한다기에 돌아오는 길에 이 분야의 성서로 통하는 ‘Arthrography(관절조영술)’라는 책을 한 권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책이 왔다.

그 책에는 각 관절조영술의 테크닉에 대해 너무나 소상히 기술되어 있었다. 나영은 그 책 속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갔다. 두 번의 실패 경험은 책 속의 한 문장 한 문장을 살아 움직이게 만들어 골수에 녹아들게 했고, 그 장(章)을 다 읽었을 때는 여태까지 정형외과에서나 자신이나 필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원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관절을 찌르는 바늘의 길이가 너무 짧았고, 또 하나는 조영제가 바로 들어가고 있는지 아닌지를 테스트하는 방법을 몰라서였다.

어깨관절이란 것이 워낙 체표면에 있다 보니 지금껏 그들은 근육 주사용 바늘을 사용해 왔다. 하지만, 그 책에서는 기다란 요추천자용 바늘을 사용하라고 되어있었다. 그 이유는 견관절은 내부 공간이 워낙 좁아 깊이 찔러 넣지 않으면 조영제를 주사하는 사이 바늘이 관절에서 삐져나와 조영제가 밖으로 새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책에는 조영제를 주입하기 전에 바늘이 바로 들어갔는지 아닌지 증류수로 테스트하는 방법부터 조영제를 주입할 때 제대로 들어가고 있는지 아닌지 판별하는 방법까지 참으로 친절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이 책을 쓴 사람 역시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그 장을 기술한 저자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이 절로 일어났다.


당시 정형외과 고년차 중에는 E4 3기 싱어가 있었다. 

나영은 그 형에게 전화하여 이번에는 기필코 성공해 보일 테니 한 번만 더 환자 좀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날, 나영은 조영제 한 방울 새지 않은 완벽한 어깨관절 조영 사진을 만들어 냈다. 

병원 개원 후, 29년 만에 처음 성공한 견관절조영술(shoulder arthrography)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시술은 멋지게 성공했는데 판독은 누가 할거뇨?

과 내에 판독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니,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왜? 이 분야에 대해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의지할 곳은 오직 하나, 이번에 바다 너머 미국에서 건너온 책 한 권뿐이다.

하지만, 당장 판독을 내줘야 하는 입장에서 어느 세월에 책 한 권을 다 보겠는가? 비록 책을 본다 한들, 관절낭과 관절 주변 인대 질환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나영이 감별진단까지 한다는 건 무리였다.


나영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몽타주로 범인 찾기'
나영은 경찰이 용의자의 몽타주 사진과 동일 수법의 전과자 사진들을 대조하듯 어깨관절 조영 편에 나와 있는 사진들만 죽 훑어가면서 자신이 찍은 사진과 비교해 나갔다.      

아무리 봐도 정상이다.     

분명 어깨가 심하게 아프니까 대학병원까지 왔을 것이고, 무언가 심각한 병이 의심되니 이런 과격한 검사까지 의뢰한 것 아니겠나? 이런 사람을 두고 '정상'이라고 판독한다면, 또 무슨 망신을 당할까? 대 주고 뺨 맞는다고, 실컷 잘해 주고 똥바가지 뒤집어쓸 순 없는 일, 나영은 정형외과 의국장인 종호 형한테 다시 전화했다.    


"형, 오늘 찍은 숄더알스로(shoulder arthro) 사진 봤어요?"

"그래, 야~ 기가 막히게 찍었데."

"그런데, 형 보기에는 소견이 어때요?"
"아~, 우리 유 교수님이 그 사진을 보시고는 전형적인 로테이터캎 테어(rotator cuff tear, 회전근개파열) 라면서 내일 아침 이 케이스 가지고 과 콘퍼런스 하겠다더라."

    

순간, 나영은 머리를 한 방 맞은 것 같았다. 

이 검사를 하게 되는 주된 원인 질환은 회전근개파열과 동결견(frozen shoulder)이다. 

정형외과 교수는 척 보고 '파열'이라는데 나는 어찌 두 눈 멀쩡히 뜨고도 정상이라 하는가? 

만약 그 교수의 진단이 맞다면 당장 수술을 해야 하고, 내 생각대로 정상이라면 그냥 두고 보던지 약만 주면 된다. 만약 내 판독이 잘 못 나가서 수술해야 할 사람 수술 안 하고 놔뒀다가 시기를 놓치기라고 한다면 자칫 소송까지 갈 수 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나영은 머리에 쥐가 내리는 것 같았다. 

나영은 다시 책을 찾아봤다. 아무리 봐도 정상이다. 

안 되겠다. 교수님 만나 뵙고 한 수 배우자. 

나영은 유 교수 연구실로 찾아갔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유 교수가 "아! 한 선생, 오랜만이네." 하며 반긴다. 

그가 타과 레지던트 1년차인 나영을 이렇게 반기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의대에서는 본과 3학년이 되면 졸업여행을 간다.

그때, 저녁 회식 장기자랑 시간에 나영은 통기타를 들고나가 노래를 한 곡 불렀다. 

그러자 인솔 교수인 유 교수는 나영의 노래에 반해 "지금부터는 한 군 혼자 노래해라." 해서 자리가 파할 때까지 나영 혼자 노래해야 했던 적이 있다.

그러니 유 교수가 그런 나영을 잊을 리 없는 것이다.

"그래, 무슨 일이고?"

"예, 다름이 아니라 오늘 오전에 시행한 ‘숄더알스로’ 소견에 대해서 교수님께 여쭈어볼 일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문제의 필름은 유 교수 책상 위에 놓여있었다.

"오! 이거 자네가 찍었나? 야! 참 멋지게 찍었데."

나영은 사진을 꺼내 뷰박스(view box)에 걸고 말했다.

"제가 듣기로는 교수님께서 이 케이스가 전형적인 ‘로테이터 캎 테어’'라고 하셨다는데 제가 경험이 없어 교수님께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아, 그거? 바로 여기 있잖아!" 하면서 지시봉으로 사진 한 장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정형외과 책을 한 권 꺼내 회전근개파열 조영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그걸 보는 순간, 나영은 까무러칠 뻔했다. '아니, 저걸 가지고?'    

나영이 그 책을 자세히 살펴보니 어깨 편에 올라와 있는 조영 사진이라곤 그 한 장이 전부였다.

"교수님, 혹시 이것 '노멀 바이셉스 롱 헤드(normal biceps long head)' 아닌지요?"     


나영의 입에서 '롱 헤드'란 말이 나오는 순간, 유 교수의 머리에도 번갯불이 번쩍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마침 책장에는 얼마 전, 과에서 구입한 ’Arthrography' 책의 복사판이 한 권 꼽혀있었다.      

"교수님, 저 책에 사진이 잘 나와 있던데 한번 봐도 될까요?"

나영은 책장에서 책을 뽑아와 상완이두근의 긴 머리 인대인 '바이셉스 롱 헤드'에 조영제가 들어가 마치 회전근개파열처럼 보이는 사진이 나와 있는 페이지를 바로 펼쳐 보였다.     

그걸 보는 순간, 유 교수는 바로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내일 아침 우리 과원들 다 모아 놓고 이 사진을 가지고 ‘로테이터캎 테어 '에 대한 강의를 하려 했는데, 자칫 큰일 날 뻔했구나. 내가 착각했어. 닥터 한 고맙네."

나영은 즉각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교수님. 저야말로 오늘 교수님 덕분에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교수실을 나서는 나영은 감격에 겨웠다.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스스로가 대견했고, 

제자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는 교수의 모습에 무한한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여태껏 교수들에게 치욕스런 모욕만 당해오던 나영은 긴 터널 끝에 한 줄기 빛을 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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