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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May 10. 2022

나영의 시간

장편소설

1980년 3월, 나영은 대부의대 방사선과 레지던트 1년차로 들어가게 되었다.     

‘참 어렵게도 왔다. 채이고 채이며 돌고 돌아왔다. 쫓기는 쥐, 구멍 찾아들듯 어딘지도 모르는 캄캄한 곳으로 들어왔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과를, 내 뜻과는 상관없이, 얼떨결에 들어왔다. 그렇게 갈 곳이 없어 헤맬 때도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았던 방사선과. 학생 때 재시까지 쳐서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과목. 과연 이런 과가 나하고 궁합이 맞을까?’     


그런데, 과에 들어와 영상의학 공부를 본격적으로 해 보니 학생 때 배운 것과는 아예 차원이 달랐다.

몇 시간 안 되는 학생 수업시간에 배운 것은 모조리 외우는 것밖에 없었는데, 본 공부에 들어가 보니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관상가는 얼굴이라는 겉상(像) 하나를 보고 한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를 점치는 반면, 영상의학과 의사는 사람의 속상(像)을 들여다보고 죽을병인지 살병인지, 수술해야 할 병인지 약물 치료해야 할 병인지를 감별한다.

관상가는 몇백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비서(祕書) 몇 권 삶아 먹듯 공부하고 거기다 경험을 더하여 감으로 때려잡는 반면, 영상의학과 의사는 최신의 의학지식과 첨단장비로 무장하고 증거를 기반으로 한 합리적 논리와 추리로 병의 실체를 잡아낸다.     


바로 이 과정, 최종 진단에 이르는 이 ‘증거에 입각한 논리와 추리’라는 과정이 나영의 적성과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그는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추리소설과 첩보물을 즐겨 읽었다. 추리소설에서는 형사 콜롬보가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에 탐닉했고, 첩보물에서는 미행자를 따돌리는 교묘한 수법과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작전의 설계에 심취했다. 하나는 속이는 놈을 역추적해 들어가고, 하나는 속이기 위해 정밀한 설계도를 그린다. 이 둘을 합해서 생각하면 환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병이라는 범인을 보다 정확하게 잡아낼 수 있는 것이다.          


나영이 전공의로 들어갔을 때만 해도 대부의대 방사선과 교실*은 참 빈약했다. 교수 세 사람에 의국원 네 명이 전부였다. 그나마 의국 설립 후 연차 당 1명으로 명맥을 유지해 오던 과가 나영의 윗 기에 와서 2명으로 늘어서 네 명이 되었다. 그런데 1년차로 들어간 나영의 기는 세 명이나 되었다.     

전공의를 뽑기 위해서는 먼저 수련병원으로서의 요건을 갖추어야 하고, 모집 인원은 대부분 지도전문의 숫자에 비례한다. 그런데, 교수요원은 그대로면서 2년 연속 전공의 수가 증원되는 것도 상당히 이례적인 일인데, 거기다 교수 세 명에 한 연차 전공의가 세 명이라면 다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코웃음 칠 일이다.    

나영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 이유가 다 자신에게 있는 것 같아 혼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던 문이었다. 그런데 전화 한 통에 스르르 열리고 말았다.
그는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해 보았다.    

 

만약 그 전날 문 선생에게 전화 걸 생각이 들지 않았더라면?

만약 내가 전화한 그 시각에 문 선생이 자리에 없었더라면?

만약 레지던트 중 한 명이라도 의국에 남아있었더라면?

만약 그 학생이 일찍 퇴근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 선배가 나보다 10분이라도 일찍 왔더라면?


그는 생각했다.

이중 어느 것 하나라도 삐끗했더라면 나는 레지던트로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그저 우연(偶然)일까? 아니면, 예정(豫程)일까? 

그래서 혼자 미소 지을 수 있었다.


나영이 1년차 때 의국장이 된 3년차 성효창은 나영과 대학 입학 동기였다.

그는 돌파력 있고, 배짱 좋고,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위아래 가리지 않고 돌직구를 날리는 혁명 투사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캐릭터는 나영과 딱 맞아떨어졌다. 그래서 둘은 죽이 잘 맞았다.     

의국 역사상 처음으로 전공의 7명이라는 제대로 된 진용이 짜여지자, 성 의국장은 과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고 그가 맨 먼저 시도한 것은 초독(初讀)이었다. 초독이란 레지던트들이 공부해야 할 중요한 의학서적들을 서로 분담하여 읽고 와서 병원 업무 시작 한 시간 전에 의국에 모여 돌아가며 발표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말한다.


그동안은 인원 부족이란 핑계로 아무도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초독을 효창은 강력하게 밀어붙였고 나영에게는 골학(骨學)의 성서인 『Edeiken』이란 책이 주어졌다. 영상의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1년차들에게 이런 전문분야 책을 맡긴다는 것이 어찌 보면 상식 밖의 일인 것 같았지만 1년차들은 셋 다 잘 해냈다. 그리고, 처음부터 이런 높은 고지에 도전해 본 경험은 훗날 여러 가지 좋은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효창의 욕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초독이 어느 정도 진전되자 이번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Confirm case conference'도 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이 시간은 엑스레이상 교육적 가치가 높은 소견을 보였거나 진단 내리기 힘들었던 케이스들을 추적하여 임상적으로나 병리학적으로 확진된 것만 골라 토론하는 시간을 말하는데, 이것이야말로 그동안 배웠던 지식을 실전에 적용하는 아주 중요한 배움의 장이다.


무언가를 새로 시도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른다.

더군다나 전공의가 나서서 교수들더러 여태껏 안 하던 짓을 하자는 것은 자칫 잠자는 호랑이 코털 뽑기 같은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데 이 콘퍼런스가 바로 그런 위험한 일이었다.     

이 시간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케이스를 준비하는 담당 레지던트 외에는 어떤 케이스가 올라올지조차 모른다.  교수와 레지던트가 정답을 모른 채 난상토론을 벌이면 각자의 실력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그리되면 그동안 하늘처럼 군림하던 교수들은 실력에 따라 그 처지가 극명하게 갈리게 된다.     


예상대로 저항은 만만찮았다. 

하지만 이 역시 레지던트들이 힘을 합쳐 강력하게 밀어붙여 주니어 스텝 한 사람만 참석하고 그에게는 미리 문제를 가르쳐주는 선에서 타협을 보았다. 그가 불러일으킨 이들 새 바람은 커다란 회오리바람이 되어 그동안 잠자고 있던 대부의대 방사선과를 잠에서 깨어나게 했고, 전공의들에게는 수련 과정에 꼭 필요한 필수 영양소를 듬뿍 빨아들이게 했다. 그리고, 전공의 주도의 이런 개혁 드라이브는 그들이 수련을 마친 후 전문의가 되어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혼자 헤쳐나갈 수 있는 강력한 자생력을 기르게 했다.      


자기 적성에 딱 맞는 과목에다, 이런 혁명에 가까운 변화의 바람을 올라탄 나영은 열심히 공부했다. 눈에 불을 켜고 공부했다. 그가 열심히 공부한 데는 의사로서의 소명의식이 가장 밑바탕에 깔려 있었지만 그에 더하여 그에게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복수!‘     

그는 때때로 나태한 생각이 들거나 잠이 올 때면 지금까지 자신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차별하며 피눈물 흘리게 했던 사람들 얼굴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눈을 부릅뜨고 공부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다들 조금만 기다려라. 내 곧 이 분야 최고봉에 우뚝 서서, 나는 당신들을 내려다보고 당신들은 나를 우러러볼 날이 올 터이니."    

이제, 드디어 나영의 시간이 도래했다.     




*교실(敎室)

수련병원에서 교실(敎室)이란 한 과의 의사 집단 전체를 가리키고, 의국(醫局)은 한 과의 소속 전공의 집단 혹은 그들이 거주하는 방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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