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와 재치
처칠과 루스벨트
1939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유럽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에 처칠은 미국의 참전을 끌어내기 위해 루스벨트 대통령게게 특사로, 전화로, 숱한 편지로 끊임없이 독려했지만 신중한 성격의 루스벨트는 국내의 반전 여론에 한발 뒤로 물러나 있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공습하자 처칠은 루스벨트를 직접 만나 미국의 참전을 독려하기 위해 미국으로 날아가 백악관에 머물게 되었다.
다음 날 저녁, 처칠은 목욕을 마치고 바디타월 하나만 걸친 채 거실 소파에 앉아 쉬고 있는데 갑자기 벨이 울렸다.
'이 시간에 대체 누구지?' 하며 현관으로 나가 비우어로 내다보니 루스벨트가 찾아온 것 아닌가!
예고 없는 그의 느닷없는 방문에 놀란 처칠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휠체어를 타는 루스벨트를 밖에 오래 기다리게 할 수도 없어 그 차림새로 문을 열었는데,
허둥대다가 그만 허리에 두른 타월 끈이 풀어져 가운이 흘러내리고 말았다.
졸지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가 되어 루스벨트 앞에 서게 된 처칠.
얼마나 황당하고 난감했을까?
루스벨트 역시 이런 민망한 장면에 시선을 어디 둘지 몰라하며 예고 없이 찾아온 자신의 처사에 대해 사과하는데, 이런 황망하기 그지없는 순간에도 처칠은 씽긋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각하! 보시다시피 영국의 수상인 저는 미국 대통령 앞에서 무엇 하나 감추는 것이 없습니다."
이 재치 있는 말 한마디에 두 사람은 동시에 폭소를 터뜨렸고, 그때부터 두 사람은 서로의 입장을 허심탄회하게 터놓고 밤새 할 말을 다 했다.
그해 12월 말(1941년), 드디어 미국이 연합군에 합류하여 참전함에 따라 세계대전의 방향은 역전되었고, 1945년 마침내 연합국의 승리로 전쟁은 끝났다.
그 덕분에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도 덤으로 해방을 맞았으니 오늘을 사는 우리는 처칠의 알몸에 감사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대문사진 출처 - 동아사이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