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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Dec 11. 2023

강18 천천히 말하라

강의 기법 05

슬라이드쇼     


요즈음 쓰는 Beam projector가 아니라 슬라이드 필름을 비추는 Slide projector로 발표하던 시절, 대한영상의학회 정기 학술대회에서 한 유명 교수의 20분짜리 특강을 듣게 되었다.

당시에는 무선 리모컨이 없던 시절이라 프로젝터를 비추면서 강의를 할 때는 행사주관 기관의 직원 한 명이 항상 프로첵터 옆에 붙어 앉아 연자의 지시에 따라 프로젝터를 돌려야 했다.       

  


그날, 그 교수 차례가 되자 프로젝터잡이(projector player)가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고 그런 모습이 나의 레이더에 포착되자 나는 몹시 궁금해졌다.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     


슬라이드가 넘어가기 위해서는 그때마다 연자가 '다음' 혹은 'Next'라 말하고 그에 따라 프로젝터잡이는 슬라이드를 앞으로, 때로는 뒤로 돌려야 한다.

그런데 강의가 시작되자 교수가 슬라이드를 다음으로 넘기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강의 내용에 맞춰 슬라이드가 자동으로 넘어가는 게 아닌가! 


그제야 바로 상황이 이해되었다.


'다음'이라는 연자의 말이 떨어지고 나서부터 슬라이드가 넘어가 다음 화면을 비추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3초. 슬라이드 수가 60장이라고 가정하면 3분이다. 그 교수는 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자기 과의 레지던트나 주니어 스텝을 훈련시켜 데리고 나온 것이 분명했다. 


학생 때 오랜 무대 생활을 해 본 나는 감탄했다. 

"야~ 저렇게 호흡을 맞추려면 과연 리허설을 몇 번이나 했을까?"


원래 말이 빠른 사람인 데다 슬라이드까지 그렇게 돌리니 강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한 부분 막힘없이 청산유수처럼 흘러갔다.    

완벽한 강의였다. 

하지만 실패한 강의였다. 

왜?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날의 그 인상적인 '슬라이드쇼 퍼포먼스'만 기억하지 그날 그 교수가 한 강의 내용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양화의 매력     


동양화의 매력은 여백에 있다.

서양화는 한 치의 틈도 없이 물감으로 빼곡히 다 채워 넣지만 대부분의 동양화는 많은 공간을 여백으로 남긴다. 

그 결과, 서양화는 캔버스 위에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만 넘쳐나지만 동양화는 여유롭고 넉넉한 작가의 마음이 묻어난다.


"여기에 여백을 남겨두었으니 이 부분은 당신이 알아서 채워 넣으세요."라며 살며시 붓을 넘기는 작가.

그 붓을 건네받아 상상의 나래를 펴교 그려가는 관객.

그 공간 속에서 서로 손을 맞잡고 어우러지는 화가와 관객의 공감대.


강의도 마찬가지다.

강의는 붓 대신 말로 한다.

연자의 말이 너무 빠르면 면 청중이 따라가기 힘들고, 강의시간을 빈틈없이 채울 정도로 말이 많으면 생각하며 들을 틈이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청중이 강의 내용의 요점을 정리해 가며 그 내용에 대해 생각하며 듣게 만들려면 천천히, 그리고 여유를 가지고 가야 한다. 

그래야만 그 내용이 더욱 잘 이해되고 보다 오래 남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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