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굴들
2020년 1월 31일
내가 35년 6개월 근무했던 대학에서 퇴직한 지 1년 5개월이 되는 날, 퇴직 후 처음으로 과거 초음파실에서 나와 함께 근무하던 옛 동지들을 만났다. 그날은 10년간 내 밑에서 팀장으로 일하던 안 선생의 영전을 축하해 주기 위해 내가 마련한 자리였다.
첫 입사 때부터 시작해서 16년 간 초음파실에서 나를 한결같이 보좌해 온 사람. 그런 그가 작년 말 한 대학의 방사선과 교수 모집에 지원하여 9:1의 경쟁을 뚫고 합격하여 올 3월부터는 대학병원 방사선사에서 대학교수로 신분을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평소 나는 초음파실 방사선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다그쳤다.
"쉬지 말고 공부해라. 그리하여 부디 박사학위 따서 대학교수 자리 나면 그 길로 가라.
너희들은 실무 경험도 풍부하고 자질도 훌륭하니 충분히 그럴 자격 된다.
그리되면 또 다른 세상이 열릴 것이고 정년도 훨씬 연장될 것이다."
이제 그 두 번째 열매가 맺혔으니 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하지만, 퇴직 후 호주머니 사정이 옛날 같지 않은지라 처음엔 아직 과 내에 남아있는 방사선사 세 명만 부를까 했다.
그러다가,
25년 동안 나와 함께했던 접수요원 미스 전이 알면 섭섭겠다 싶어 미스 전도 부르라 했다.
(이제 나이 50 줄에 들어선 아이 엄마지만 처녀 때 내가 뽑은 여성 동무들은 영원히 미스로 부른다).
그러다 보니,
타 부서로 전출되어 간 미스 신이 나 막내 방사선사 지희가 알면 또 서운하겠다 싶어 그들도 부르라 했다.
그러고 나니,
10년 전 해운대 백병원이 생길 때 분사되어 간 방사선사 4명과 마산대학 방사선과 교수로 간 구 선생까지 눈에 삼삼하여 그들도 다 부르라 했다.
이제 끝났나 싶었더니
이 번엔 5년 동안 방사선실장을 하면서 나를 극진히 모신 김 실장이 생각났다.
그는 나의 퇴직 후에도, 하지 말라는 데도 말 안 듣고, 명절 때마다 선물을 보내오는 고약한(?) 사람인데 얼마 전에 실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런 그에게도 위로와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싶어 같이 오라 했다.
이제 참말로 끝났나 했는데,
또 한 사람 마음에 빚 진 사람이 생각났다. 그가 레지던트 하던 시절은 말할 것 없고, 퇴직 후에도 컴퓨터 문제로 애로사항이 있을 때마다 전화를 걸어 귀찮게 해 온 제자 김 교수. 그에게도 밥 한 번 사야지 싶어 오라 했다.
그러고 보니 도합 13명이 되었다.
이제 날짜를 정할 차례.
이런 일은 빠를수록 좋고 어차피 13명의 스케줄에 다 맞출 순 없는 지라 안 팀장에게 두 날을 제시한 후 한 날 잡아서 알려 달라 했다. 그래서 정해진 날이 1월 31일. 11명이 참석 가능하단다.
다음으로는 장소를 정할 차례.
처음엔 부산백병원에서 가장 가까운 서면에 있는 음식점으로 하려 했다.
그러다 문득, 오래전 단골이었던 횟집 여주인이 카톡으로 신년 문안 인사를 보내온 게 생각났다.
‘아이고, 요새 경기가 말이 아니라 장사도 힘들 텐데 이왕이면 그 집을 팔아줘야 안 되겠나!'
그래서 정한 장소가 허심청 뒤, 온천시장 골목 안에 있는 추억의 칠암횟집.
오랜만에 주인장인 임 사장에게 전화를 했더니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그녀를 비롯해 다들 보고픈 그리운 얼굴들이라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떠올리며 가슴이 설레었다.
3분 스피치
2020년 1월 31일 오후 6시.
기다리던 그날이 왔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길치인 나를 위해 시장 밖까지 나와 기다리다 내 차를 안내해 온 임 사장 덕에
시장 골목 안 횟집 코앞에 차를 대는 호사를 누리며 가게 안에 들어가니 대부분 이미 와 있었다.
반가운 얼굴들, 보고 싶었던 얼굴들. 다들 일어서서 환한 웃음으로 “교수니~ㅁ” 하며 반긴다.
참석 예정 인원 11명 중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긴 1명 빼고 10명이 모였다.
밑반찬과 건배용 술이 들어온 후, 먼저 내가 일어나 축사와 더불어 반가움의 인사를 전하고,
다음으로 당사자인 안 선생이 답사를 하고, 마지막으로 김 실장이 건배사를 하였다.
회와 술이 본격적으로 들어오자 먹고 마셔가면서 앉은 순서대로 한 명씩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3분 스피치가 시작되었고 오랫동안 내 밑에서 이런 트레이닝을 받아온 그들은 어느 누구도 쭈뼛거리거나 버벅대지 않고 파도타기 하듯 자연스레 술술 이어나갔다.
‘회식 자리에서 3분 스피치 라니?’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릴 사람도 많겠지만 나는 재임 시 내 휘하의 직원들과 회식할 때면 그 순서만큼은 빼먹지 않고 시켰다.
내가 그리한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회식 자리에서 한 사람이라도 소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고 그 방법으로는 3분 스피치를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회식 자리에 대한 나의 지론은 이렇다.
'직장 내에서는 직무와 직급에 따라 철저히 위계질서를 지키며 절도 있게 일하되,
회식 자리에서는 그딴 것 다 벗어던지고 한 식구로 하나 되어
격의 없이, 더불어, 즐겁게 놀아야 한다.
그래야만 직장 회식이 피곤한 자리가 아니라 우애 넘치는 기다려지는 자리가 될 수 있다.'
보디가드
3분 스피치가 전부 끝난 후부터는 테이블마다 왁자지껄 깔깔대며 자~알 먹고, 자~알 마시고, 자~알 논다.
오랜만에 그런 그들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내가 현직에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고 그런 환상은 화장실 갈 때 최고조에 달했다. 회식 자리에서 내가 화장실 간다고 자리를 뜨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남자 직원 한 명은 어김없이 내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 나오는데 이 날은 평소 말없는 영주가 말없이 따라나섰다.
그들이 그러는 이유는 혹시라도 내가 넘어질까 해서다.
1988년, 나는 회식자리 끝에 빗길에 넘어져 대퇴부 골절이라는 큰 부상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 일 이후로 직원들은 내가 화장실 계단을 올라갈 땐 나보다 한 계단 밑에서 따라오고 화장실에 들어가면 밖에서 장승처럼 지키고 섰다가 계단을 내려올 땐 먼저 한 계단 아래로 내려가 내 발걸음에 보조를 맞춘다.
홀 내에 화장실이 있는 가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화장실 간다고 자리에서 일어서면 직원 한 명이 같이 일어나 뒤를 바싹 따라오며 다른 사람이 부딪히지 않게 막고, 화장실 밖에서 기다리고 섰다가, 내가 나오면 또다시 사람들의 접근을 막으며 보디가드처럼 행동한다. 그러다 보니 다른 테이블 손님 중엔 염치없이 표시 나게 쳐다보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다. 아마도 그들의 눈엔 내가 암흑가의 보스나 경호를 요하는 VIP 쯤으로 보였나 보다.
현직에 있을 때나 은퇴 후나 한결같이 대하는 사람들. 요즈음 세상에 이런 충직한 부하들이 또 있을까?
석별의 시간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는 사이 매운탕과 밥이 나온다.
여느 때처럼 나는 미리 계산해 놓기 위해 자리를 뜨니 이번에는 안팀장이 따라 나온다.
"교수님, 오늘 계산의 절반은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너는 내가 가고 난 후 다들 데리고 허심청 브로이에 가서 맥주나 한 잔 사줘라. 그게 오늘 니가 할 일이다."
초장집 주인에게 계산하자 하니 “교수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며 인사를 한다.
나는 기억에 없는데 이 아주마씨는 나를 기억하나 보다.
계산서를 보니 먹은 것에 비해,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적게 나왔다. 횟집 임 사장이 나 오랜만에 왔다고 회를 정신없이 막 썰어 준 모양이다.
"아이고, 이래 가지고 남는 게 있겠냐?"
내가 미리 바꿔간 현금으로 전액 지불하자 초장집 주인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이렇게 현금으로 주시면 제가 이 돈 다 못 받지예!" 하며 만원을 돌려준다.
나는 그 돈을 우리 테이블에 음식 날라다 준, 지금은 계산대 안쪽에서 설거지하고 있는 알바 아주머니에게
오늘 수고 많았다는 인사와 함께 건네주었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 이런 시장통에서 서빙과 잡일을 하며 팁을 받아보는 게 처음인지 선뜻 받지를 못하고 어쩔 줄 몰라한다.
“아이고, 내 손이 다 무안할라 카네.” 하는 나의 말과
“손님이 주시는 돈이니 마~ 받아라.”는 주인의 말에
그녀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두 손으로 공손히 받는다.
매운탕에 밥까지 맛있게 먹고 난 후, 대리운전기사로부터 근처에 당도했다는 전화가 오자 전부 일어섰다.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 차 앞에서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차에 올랐다. 그러자 다들 내 차 주위를 에워쌌고 나는 유리문을 내리고 다시 한번 인사하며 손을 흔들었다.
“교수님, 안녕히 가세요~~” “건강하세요~~”
모두들 고개 숙여 인사하고 내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댔다.
차가 시장을 빠져나가자 나는 등받이를 약간 뒤로 재치고 편히 앉아 눈을 감았다.
오랜 세월 동안 너무 많이 정이 든 사람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저들을 오늘처럼 다 함께 만날 수 있을까? 안구가 촉촉해져 오는 걸 보니 나도 이제 나이가 들만큼 든 모양이다... 얼굴들이라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떠올리며 가슴이 설레었다. 얼굴들
울타리의 의미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지난 두 시간 반 동안 있었던 장면들을 회상하는 동안, 안 선생이 한 말 한마디가 나를 깊은 상념에 빠지게 했다.
”교수님, 이번에 저는 울타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울타리’라~~~
그가 내뱉은 이 한 단어 속에 함축된 그의 감정과 의미가 내 가슴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내가 있을 땐 아무도 초음파실을 건드리지 못했다.
심지어, 그 강력한 카리스마에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파워를 휘둘렀던,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그 앞에만 가면 벌벌 기던 재단 이사장마저도 건드리지 못했다.
그런 내가 35년 간 초음파실에 쳐놓은 울타리가 나의 퇴직과 함께 사라지자 초음파실에는 곧바로 삭풍한설(朔風寒雪)이 몰아쳤다.
나처럼 초음파실을 차고앉아 초음파 하나만 하겠다는 후계자가 없다 보니, 내가 나가고 나자마자 내가 구축해 놓은 시스템은 붕괴되고 초음파실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방사선사 세 명 중 두 명은 초음파실을 떠나야 했다.
그중 막내인 지희는 그나마 비뇨기과 초음파쇄석실로 가서 지금껏 배운 것을 더 잘 써먹을 수 있는 기회를 잡았지만, 안 팀장은 팀장 계급장 떼고 일반촬영실로 전출되어 가서 신입사원들과 함께 매일 단순X선촬영이나 하고 있으려니 오죽이나 속이 쓰렸겠는가!
그는 지난 1년여 동안 그야말로 절치부심, 와신상담의 세월을 보내면서 대학교수라는 제2의 인생에 대한 강력한 동인(動因)과 투지가 생겨났고 마침내 그 열매를 따게 되었으니 그 또한 나만큼이나 이 자리가 감회 깊은 자리가 되었을 것이다.
이 사회에서 울타리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남자가, 집에서는 가장이요 직장에서는 한 부서의 장이 되었을 때 갖추어야 할 요건 중 가장 중요한 덕목 하나를 들라면 무엇이라 하겠는가?’ 이런 자문(自問)에 대해 나는 젊어서부터 일관되게 다음과 같이 답해 왔다.
“그것은 내 휘하의 부하직원들이나 가족에게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
화살이 날아올 땐 방패가 되어주고, 세찬 비가 내릴 땐 우산이 되어 주고, 찬바람이 휘몰아칠 땐 따뜻한 외투가 되어 덮어주는 울타리 같은 가장(家長), 그리고 상사(上司).
하지만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울타리는 없다. 그러니,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울타리 안에서 안주할 생각은 말아야 한다. 언젠가 그 울타리가 걷혔을 때를 대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며 실력을 쌓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안 선생은 멋지게 성공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