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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May 16. 2022

주임교수 구하기

장편소설

나영이 1년차 후반기에 들어서자, 전반기의 초독과 확진 환자 콘퍼런스에 이어 아번에는타과와의 콘퍼런스가 시작되었다. 이 컨프런스는 영상진단에 의존도가 높은 임상과들과 영상의학과 의사들이 모여 교육적 가치가 높은 케이스, 감쪽같이 속았던 케이스, 혹은 지금 현재 진단이 애매한 케이스 등을 올려놓고 서로 토론하는 시간이다.  

개원 이래 처음으로 열리는 엑스레이 콘퍼런스. 맨 먼저 성사된 과는 정형외과였다.     

나영이 1년차 전반기에 돈 파트가 골 방사선. 이 분야 최고의 바이블 「Edeiken」으로 무장하고 경험을 쌓은 나영은 한창 물이 오른 상태로 첫 콘퍼런스에서 맹활약을 했다.     


두 번째 컨프런스 대상은 비뇨기과. 

이 파트는 나영이 다이나믹 요도조영술까지 개발하며 한창 파고들고 있는 분야다. 

두 번째 콘퍼런스 준비를 하면서 나영은 학창시절 가을마다 열렸던 E4 정기공연 무대가 생각났다.     

모든 관객의 시선과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으며 관객들의 환호를 듣는 싱어(singer)라는 포지션.     

그는 레지던트로 들어오자마자 맞이하게 된 이 두 개의 콘퍼런스가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마련해놓은 콘서트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렇게 타이밍이 딱 맞아떨어질까?'     


드디어 비뇨기과와의 콘퍼런스 시간.

그날의 주제는 전립선비대증과 전립선암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초음파, CT, MRI가 없던 시절이라 전립선 자체를 보여줄 영상진단법은 없었고, I.V.P.라 불리는 경정맥신우조영술(Intravenous Pyelography)이나 역행성요도조영술 같이 요로계 내부를 조영제로 채워서 전립선 상태를 추측하는 간접 진단법밖에 없었다.     

원래, 과대과(科對科) 콘퍼런스(Interdepartmental conference)를 할 때는, 먼저 주치의인 임상과 레지던트가 나와서 환자에 대해 브리핑을 하고, 그 환자의 엑스레이 소견에 대해서는 그 파트를 담당하는 방사선과 고년차(高年次) 레지던트나 주니어 스태프가 맡고, 중견 스태프나 시니어 스태프는 토론 시간에 코멘트를 하는 것이 관례다.   


하지만 그날은 생전 처음 하는 콘퍼런스라 뭘 몰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본인이 가장 자신 있는 분야라서 그랬는지, 아무튼 방사선과에서는 이례적으로 주임교수가 직접 나가 소견을 설명하였다.

그날 마지막 케이스는 전립선암이었다.

뷰박스에는 맨 먼저 역행성요도조영술 사진이 올라왔다.

그러자 나영의 주임교수는 별것 없다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간 후, IVP 사진에서 보이는 방광의 밀리는모양으로 보아 전립선암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리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이변이 발생했다.

갑자기 비뇨기과 주임교수가 "잠깐!" 하고 소리치며 앞으로 나와 밑에 깔린 요도조영술 사진을 집어 뷰박스에 도로 꼽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는 필름을 가리키며 ‘콜라핀토’가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설(設)을 풀기 시작했다. 나영은 ‘콜라핀토’란 말에 바짝 긴장했다. '아이고~, 우리 영감님 오늘 개피 보게 생겼네. 이 일을 어찌할꼬?'  나영이 그렇게 생각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앞 장에서 이미 언급된바 있는 콜라핀토는 비뇨기과 의사로서 영상의학과 의사인 맥칼룸과 함께 요도 분야의 세계적인 대가인지라 그들의 눈부신 최근의 연구결과에 대해 비뇨기과에서는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인체의 전 분야를 대상으로 하는 방사선과 입장에서 보면 '요도'란 놈은 말 그대로, 그냥 속된 말로, 좆만 한 분야인 데다 검사 과정마저 거시기해서 교수들은 그 시술은 물론 판독까지도 레지던트 몫으로 넘긴 지 오래다.      

그러니 요도조영술에 대해서는 영상의학의 원론적 지식 정도밖에 없는 주임교수가 이 분야에 관한 최신의 연구에 대해 알 턱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편 교수는 요도조영술 사진을 설명하며 이렇게 중요한 소견이 있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넘어갈 수 있냐며 물고 늘어졌다. 비뇨기과 교수와 방사선과 교수가 뒤바뀐 듯한 황당 시추에이션이 벌어지면서 전 과원이 보는 앞에서 방사선과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무너져내리는 순간이었다.     


나영은 속에서 열이 콱 쳐 받쳐 올랐다.

'이건 예의가 아니지, 쌍! 우째 이럴 수가 있노?'     

하지만, 교수 사이에 생긴 문제는 교수가 나서서 중재나 해결을 해야지 레지던트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더군다나 양쪽과 과원들이 전부 보는 앞이다. 그런 자리에 레지던트가, 그것도 감히 1년차가, 상대 과의 주임교수를 상대로 나선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시절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보스와 과 전체의 자존심이 무참히 짓밟히는 꼴을 보고 가만히 있을 나영이 아니었다. 

이미 나영의 내면에서는, 그동안 잠자고 있던 헐크가 또다시 옷을 찢고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며 나영이 쳐놓은 자제력의 울타리를 넘어서고 있었다.     


말을 마친 비뇨기과 교수가 의기양양하게 자리로 돌아가려는 순간, 헐크가 툭 튀어나오며 나영으로 하여금 분연히 일어서게 만들었다.     

"교수님, 질문 있습니다."

교수는 걸음을 멈추었고 모든 시선이 나영에게 쏠렸다.     

"교수님께서 인용하신 그 논문의 내용은 요도협착에 관한 것이지 전립선이 커져 생긴 요도의 변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교수의 인상이 찌그러들었다. 하지만 대답을 못 했다.     


나영은 상대 교수의 사진 설명에서 그 교수의 수준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콜라핀토 그룹이 발표한 논문들을 스스로 공부하여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 것이 아니라 초독 시간에 아랫사람들이 발표하는 것을 그저 귀동냥한 설익은 수준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다 보니 인용을 잘못한 것이다.

나영은 멋지게 잽 한 방을 날린 후 본격적으로 가격하기 시작했다.     

"그걸 떠나서, 콜라핀토 등이 전립선비대증과 전립선암의 감별에 대해서도 중요한 논문을 발표했지요. 하지만, 이 케이스에서는 보시다시피 후방요도의 elongation*과 spreading*만 있지 그들이 전립선암의 전형적인 소견이라고 주장한 rigid pipe appearance*는 없지 않습니까?"

    

교수는 나영의 말에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 사진을 가지고 전립선암으로 진단하는 것은 영상의학적으로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우리 주임교수님께서 설명하신 대로 IVP 상에서 방광이 다소 rigid 하게 밀린 모양이 전립선암을 보다 더 시사하는 소견이라 생각합니다."

교수는 완전히 벌레 씹은 얼굴이 되었고 뭔가를 더듬거리며 말했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사태가 이쯤 되면 저쪽 과에서 구원투수가 나서야 한다. 그리고 이 시건방진 1년차를 사정없이 욕보여야 한다. 하지만 비뇨기과에서는 고년차 레지던트도, 액티브한 주니어 스태프도, 관록이 붙은 중견 스태프도 말 한마디 못했다. 만약 나영의 말에 조그마한 허점이라도 있었다면 당장 물어뜯었을 터인데 그 누구도 끽소리 못했다.     


이것으로 방사선과의 자존심과 주임교수의 체면은 벼랑 끝에서 기사회생(起死回生)하게 되었고, 비뇨기과는 백전노장이 나가 햇병아리의 엎어치기 한 판에 완패를 당한 꼴이 되었다.


컨프런스가 끝나고 의국으로 돌아온 방사선과 레지던트들은 승리의 환호를 질렀다.     

의국장이 말했다.

"야~ 오늘 기분째지는 날인데 남포동 내려가서 술이나 한잔합시다!"

다들 옷을 갈아입고 떠들썩하게 복도를 나서는데 바로 옆에 있던 비뇨기과 의국 문이 화들짝 열리며 그 과 의국장이 씩씩거리며 나타났다.     

"야! 성효창, 너 이리 좀 들어와 봐."     

두 사람은 고등학교 대학교 선후배 사이였다.

순간, 전운이 감돌며 적막이 흘렀다.     

곧이어 전투 모드로 돌입한 성 선생이 시비조로 한 마디 받아치고는 따라 들어갔다.     

"와요?"

      

열린 문 사이로 고성이 흘러나왔다.     

"야, 너 이 새끼, 어디서 1년차를 훈련시켜서 감히 남의 과 주임교수를 물 먹여! 으잉" 

"아니, 1년차가 마침 Uro*를 돌게 돼서 지가 공부 열심히 한 것뿐인데 그기~ 우쨌단 말이요? 공부하는 것도 죄요?"   

"머라케쌌노? 글마가 한 달 전부터 urethro 사진 모으고 다닌다는 소문이 내 귀에까지 들리던데."


사실이 그랬다. 

나영이 요도 공부를 하려고 방사선과 필름 창고를 뒤졌더니 쓸만한 사진이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만 해도 시스템이 허술하여 중요한 방사선 필름들은 각 과에서 마치 자기네들 물건인 양 의국 케비넷에다 넣어놓고 반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방사선과 레지던트인 나영이 그 과 1년차 레지던트에게 사정해서 필름들을 빌려와 공부한 후 돌려주는 어이없는 상황이 있었던 것이다.

     

"그거야 지가 공부할라꼬 그런 거지요. 뭐 유치하게 그런 소리 해쌌소? 그라고, 시비는 누가 먼저 걸었는데요? 이런 더러븐 꼬라지 안 당할라믄 그쪽도 앞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던가!!"

기질 상 나영과 같은 과인 효창은 자신이 속한 방사선과의 명예 앞에서는 선배고 뭐고 없었다.

이리하여 제2라운드도 비뇨기과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그들은 남포동에 내려가 초저녁부터 실컷 마시고 밤새도록 놀았다. 

그리고 그 후, 비뇨기과와의 콘퍼런스는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용어 해설

elongation - 길이가 늘어난 모양

spreading - 국수 가락을 납작하게 눌러놓은 것같이 퍼지면서 좁아진 모양

rigid pipe appearance - 뻣뻣한 관처럼 생긴 모양

uro - urology의 약칭으로 비뇨기계를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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