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2년차에 올라온 나영은 같은 연차 중 제일 먼저 의국장이 되었다. 그것은 1년차 세 명 중 나영의 대학 입학 연도가 제일 빨라 예우 차원에서 그리한 것이다. 의국장이란 자리는 레지던트로 구성되는 의국을 대표하며 주임교수의 하명을 의국에 전달하고 교수와 레지던트 사이, 레지던트와 기사/행정 파트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하는 자리다. 나영은 의국장이 되자 과에 뭔가 혁신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그가 맨 먼저 한 일은 의국원들의 애로사항과 불만을 해소하는 일이었다.
엑스레이 사진을 정확히 판독하기 위해서는 필름을 걸어놓고 볼 ‘뷰박스’가 밝고 깨끗해야 하고, 판독 소견서를 잘 작성하기 위해서는 타자기가 좋아야 한다. 하지만, 이들 둘 다 하도 낡아 다들 불만이었다.
이 물건들은 교수들도 같이 쓰는 것인데, 그래서 똑같이 느낄 터인데, 이런 걸 왜 아무도 바꿀 생각을 안 하는지 나영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영은 교수들을 찾아가서 강력하게 설득하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오래된 물건부터 순차적으로 하나둘 교체하기 시작했다. 새 물건이 들어올 때마다 동료들은 환호했고 나영은 한껏 고무되었다. 이에 탄력을 받은 그는 그동안 모두가 알면서도 아무도 손댈 생각조차 못했던 일을 해치우려 했다. 그는 이것만 해결하면 자신이 의국장으로서 과를 위해 해야 할 일은 다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즈음 대학병원 임상 각 과의 운영 경비는 매월 병원에서 지급되는 의국비에다 연수교육 등을 개최하여 들어오는 수익금으로 충당하고, 모자라는 금액은 과원들이 십시일반 월 회비를 내어 살림을 산다.
하지만 1980년대 초, 참으로 춥고 배고프던 시절, 교수나 레지던트나 월급도 쥐꼬리만 하던 시절, 그리고 사회 전반이 투명하지 못하던 시절, 병원에서 돈 한 푼 안 나오다 보니 돈 나올 구멍이라곤 납품업자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수련병원의 각 과 살림은 의국장이 맡아서 했고 업자들 상대 역시 의국장 몫이었다.
그런데 나영이 속한 과에서는 어찌 된 영문인지 의국장이 할 일을 기사장도 아닌, 부기사장이 맡아서 했고 의국장은 그로부터 매달 경비를 타 써야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돈을 쥔 부기사장의 오만은 도를 넘어 레지던트 정도는 아주 졸(卒)로 보고, 주니어 스태프까지도 눈 아래로 보았다.
이에 전공의들은 자존심이 심히 상해 회식 때면 한 번씩 "저 송충이 같은 영감탱이 어째 손 좀 볼 수 없나!"라며 울분을 토하곤 했다. 나영은 1년차 때부터 그런 상황을 알고는 있었으나 자신과 직접 부딪힐 일 없고 공부하기 바빠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그러던 그가 막상 의국장이 되어 매달 그로부터 의국비를 타 쓰며 그의 오만한 태도와 직접 대하다 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거 뭐꼬? 의사가 기사한테 돈을 타 쓰다니. 무슨 거지새끼도 아니고. 그라고, 저 태도는 또 뭐냐? 야이 썅! 난 이런 꼬라지 못 봐!"
이리하여, 그가 생각한 그의 마지막 과업은 그를 제거하여 과를 바로 접는 일이었다.
나영이 굳이 그를 제거하겠다는 생각까지 품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영이 매달 과에서 사용하는 조영제의 규모와 그가 나누어 주는 과비를 비교해 볼 때 아무래도 그가 상당한 액수를 빼돌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진실을 밝혀야 할 시간. 나영은 면밀히 작전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다.
당시 과에 물건을 대는 납품업자 중 가장 많은 품목을 납품하는 사람은 이 사장이란 사람이었다. 작은 키에 모든 게 동글동글하게 생겨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몽돌이 굴러오는 것 같았다. 그는 성격까지 동글동글하여 참으로 원만했고 처세술이 뛰어났다. 세상 누구와도 척(隻) 지지 않고 살아갈 그런 사람 같았다. 그래서 윗사람들이 좋아한 모양이다.
나영은 그에게 전화하여 내가 신임 의국장이 되었으니 서로 인사나 하자며 한 번 들어오라 하였다.
드디어 D-day, 나영은 판독실로 찾아온 그를 의국으로 데려가 "이제부터 내가 의국장이니 이런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며 종이와 펜을 주면서 과에 들어오는 물품의 납품 단가를 쓰라고 하였다.
순간, 그는 긴장했고 망설였다.
두뇌 속의 파이버가 요란하게 돌아가는 소리가 나영의 귀에도 들리는 것 같았다.
나영이 다그쳤다.
"뭐, 나한테 숨길만 한 일이라도 있어요?"
"아이고, 아닙니다."
"그럼, 있는 그대로 쓰세요. 이 사장님 목 조르려고 이러는 것 아니니까요."
그는 마지못해 손을 떨며 조심스레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다.
그가 쓰기를 마치고 종이를 나영에게 건네자 나영은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며 머리에 새겨 넣고 다짐을 받았다.
"이거, 분명하지요? 나중에 다른 말하기 없기요."
"예. 분명합니다."
"오늘 수고 많았습니다. 제가 배웅해 드리지요."
여기서부터 잘해야 했다.
나영이 세운 작전의 핵심은 인질구출 작전 때처럼 전광석화같이 치고 들어가 상대방으로 하여금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 순식간에 해 치우는 것. 나영은 의국 문을 열고 나가 그를 과 접수대 앞에서 배웅했다. 나영은 이 사장이 건물 입구 쪽으로 걸어 나가는 걸 보자마자 그 길로 바로 부기사장 방으로 쳐들어갔다. 그들이 만날 틈을 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나영은 부기사장에게도 같은 취지의 말을 하며 납품 장부 좀 보자 하였다.
뱀눈을 닮은 그의 눈이 나영을 노려보며 한 선생이 뭔데 그런 걸 내놓으라는 거냐며 따졌다.
나영 또한 강하게 받아쳤다.
"의국장으로서 우리 과 살림 규모를 알아야 의국 살림 계획을 세울 것 아닙니까? 그게 뭐 잘못됐어요?"
그는 마지못해 장부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매달 과에 들어오는 모든 물건의 사입단가(仕入價格)가 적혀있었다.
나영은 이 중 이사장 납품품목만 살펴보았다. 예상대로 이 사장이 나영에게 적어준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이거, 내가 듣던 것과는 많이 다르네요?"
부기사장은 ‘뭐 이런 놈이 다 있어?‘라는 표정으로 나영을 노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어느 간 큰 레지던트가 이런 걸 치고 들어왔겠는가?
그는 비꼬듯 말했다.
"한 선생이 뭘 안다고 그래요?"
나영은 그에게 이사장이 써준 종이를 내밀었다.
"이거, 이 사장이 나한테 자필로 써준 납품품목 단간데, 어느 걸 더 믿어야 할까요?"
종이를 건네받은 부기사장은 하나하나 읽어가다가 파랗게 질렸다.
나영은 종이를 회수하며 마지막 쐐기를 박고 일어섰다.
"김 선생, 여기에 대해 곧 해명해야 할 일이 생길 겁니다. 잘 준비하시지요."
나영은 이 사실을 주니어 스텝에게 보고하고 이 사장의 자술서도 제출했다.
그 후, 나영은 부기사장에게 어떤 징계가 떨어질지 궁금해하며 하루하루를 길게 보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마치 태풍전야처럼.
그로부터 1주일이란 시간이 지나가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나영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8일째 되는 날, 드디어 의국으로 상명(上命)이 하달(下達)되었다.
- 한나영, 의국장 보직해임 -
의국장 취임 한 달 만에 목이 달아나는, 의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일어났다.
나영은 경악했다.
'아니, 내가 왜? 목 달아날 놈 따로 있는데.'
스물아홉 청년 나영은 모두가 아는 그 이유를 혼자 알지 못했다.
아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조치에 대해 어느 누구도 토를 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고2 국어시간에 겪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때 던졌던 질문을 또다시 던져야 했다.
"대중은 왜 이리 나약하고 비겁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