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전공의 1년차로 들어오자마자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입학한 나영은 2년차 말이 되자 학위 논문 심사를 받게 되었다. 그는 1년차 때 새로운 촬영기법을 개발하기까지 하며 심취한 요도조영술에 관한 논문을 썼기에 논문 심사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는데 심사위원 명단이 발표되자 그만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
심사위원장이 된 사람은 나영의 사회 진출 첫 관문에서 나영을 유령인간 취급하며 매몰차게 내쫓은 바로 그 기초의학 교수였고, 또 한 사람의 심사위원은 1년 전 비뇨기과와의 콘퍼런스에서 나영이 박살 낸 바로 그 주임교수였다. 어디 그뿐인가? 이 논문의 지도교수이자 방패막이가 되어줘야 할 방사선과 주임교수에게는 역린(逆鱗)을 건드린 죄로 낙인찍힌 몸이다.
이런 정황을 떠나서라도, 논문이라고는 처음 써 보는 햇병아리 학생 나영에게 논문 심사에 이력이 난 베테랑 주임교수들인 심사위원들은 버거운 상대일 수밖에 없고 그들이 논문에 대해 티를 잡으려 들면 잡히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이 심사에서 심사위원이나 위원장이 비토를 놓으면 대학원 2년 세월이 물거품이 된다.
'이 대학원이 어떤 대학원이냐? 내 자존심을 팔고, 내 아내의 눈물과, 시집올 때 받은 패물과, 첫아이 돌 반지까지 팔아 마련한 등록금으로 다닌 대학원이다. 절대 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게 할 순 없다!'
방법은 하나. 실력의 창으로 정면 돌파하는 수밖에!
나영이 냉정을 되찾고 생각해 보니 충분히 승산 있는 게임이란 생각이 들었다.
기초의학 교수인 심사위원장이 아는 지식이라곤 해부학 하나뿐, 영상의학이나 임상 경험은 전무한 상태다.
우리 주임교수님, 아무리 내가 미운 오리 새끼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명색이 논문의 지도교수다. 내 논문이 통과되지 못하면 자기 얼굴에 똥칠하는 격이니 나를 커버 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입장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가장 큰 난제는 비뇨기과 교수다. 심사위원 중 이 분야에 대해 그만한 전문가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논문에서 다루는 분야 하나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깊이 파고든 나다. 비뇨기과 주임교수 아니라 콜라핀토 할애비가 앉아있어도 맞짱 뜰 자신 있다.
나영은 호기롭게 외쳤다.
"자~ 가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한 판 신나게 붙어보자."
드디어 논문 발표일이 되었다.
나영은 앞으로 나가 환등기로 첫 슬라이드를 비췄다.
- 논문 제목 -
「골절이 동반된 남성의 후부뇨도손상에 관한 X-선학적 고찰: A Roentgenographic Study of the Posterior Urethral Injury Associated with Pelvic Bone Fracture in Male」
논문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골반골절로 인해 남성의 후부요도 -당시에는 뇨도라 썼다- 에 손상을 입었을 때 어떤 타입으로 오는지에 대해 새로운 분류법을 제시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1977년에 캐나다의 콜라핀토가 ‘New classification'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분류법을 제시하여 이것이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4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 당시 영상의학의 변방 중 하나에 불과한 Korea라는 나라에서, 그것도 감히 레지던트 2년차가, 세계적 권위자에게 도전장을 낸 것이다.
하지만 나영은 전혀 꿀릴 게 없다고 생각했다. 콜라핀토는 불과 15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분석하였지만 자신은 그것의 두 배를 넘는 38명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과학 분야 연구 논문이란 연구대상이 많을수록 결과가 정확할 수밖에 없는데 콜라핀토는 적은 케이스로 연구하다 보니 요도 손상의 종류를 세 가지밖에 경험할 수 없었지만 나영은 연구 자료가 풍부한 관계로 그의 분류에 속하지 않는 또 다른 타입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나영의 논문에서는 골반골절로 야기된 방광파열 12 케이스를 더하여 총 52 케이스를 상대로 골반골절 부위와 방광 및 요도 손상의 상관관계까지 분석해 놓았다.
이는 외상(trauma)으로 병원에 실려 왔을 때 요도조영술 같은 조영제 촬영을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인 중한 환자에 있어서 골반골 사진만 보고도 주변 내부 장기 손상을 예측할 수 있는 지표가 되므로 응급환자 처치에 굉장히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하지만 논문으로서는 굉장히 도발적인 논문이다.
왜냐하면, 만약 나영의 분석이 맞다면 콜라핀토의 분류법은 'Old Classification'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영의 열정적 발표가 끝난 후 질의응답 시간이 되었다.
이제부터가 본 게임이다.
'무엇으로 시비를 걸어올까?'
나영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콜라핀토는 비뇨기과 의사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비뇨기과 교수가 가만히 있겠나?'
'기초의학 교수는 논문의 형식과 요건을 주로 따지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그런 것으로 물고 늘어진다면 논문이라곤 처음 써 본 내가 당해내겠나?'
하지만 게임은 너무 싱겁게 끝났다.
몇몇 질문이 있었지만 전부 뭘 잘 몰라서 묻는 정도의 수준이고 논문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꼬투리도 잡아내지 못했다.
그 후 논문 심사에서 나영의 논문은 통과되었다.
나영의 완벽한 승리였다. 통쾌했다. 그리고 그는 소리 높이 부르짖었다.
“교수님, 저 이런 사람입니다. 이제 후회가 좀 되십니까? ‘그때 내가 왜 저런 친구를 몰라보고 내쳤지?’ 하고 말이지요. 하지만 아직 멀었습니다. 요건 맛보기고요. 두고 보십시오. 제가 어디까지 치고 올라가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