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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May 26. 2022

하명(下命)과 소명(召命)

장편소설

레지던트 3년차 후반, 이제 진로를 결정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1980년에 전공의를 시작하는 연차부터 방사선과의 수련 기간이 4년에서 3년으로 줄어들었다. 이러한 제도의 변화는 나영에게 일 년을 벌고 들어가는 득(得)과 함께 나영보다 1년 더 공부한 4년차 선배들과 전문의 시험과 취업전선에서 서로 경쟁해야 하는 리스크도 안겨다 주었다.     


같은 수학(修學) 동문 중 나영과 함께 전문의 고시를 치르는 사람은 4년차가 2명, 3년차가 3명, 총 5명이었다. 이 중, 전문의 취득 후 군에 가야 하는 킴스가 세 명, 바로 취업에 들어가는 난킴스가 두 명으로서 나영의 잠재적 경쟁자는 군 복무를 마친 4년차 이 선생이었다.     


나영은 또다시 고민에 쌓였다.

'만일 그가 대학에 남아 학문을 할 생각이라면 한 자리를 놓고 서로 경쟁해야 하는데, 그 선배의 자질이 어떻든지 간에 내가 선택될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 왜? 그것이 지금껏 내가 겪어온 이 사회의 차가운 현실이었으니까….'    


딩시 방사선과 전문의는 전국적으로 부족했다.

그 이유는 초음파, CT, MRI 등 새로운 차원의 진단기기가 갑자기 등장하면서 이 분야 전문의 수요가 급팽창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해에 배출되는 전공의 중 난킴스가 있는 병원의 과장이나 주임교수에게는 사람 하나 보내 달라는 청탁이 끊이지 않았고 당장 보내줄 사람이 없다면 전공의 고년차(高年差)들이라도 파견 보내 달라는 요청도 적지 않았다.


성도병원 방사선과 과장은 대부대병원 의국 출신으로서 몇 년 전부터 주임교수인 강 교수 에게 후배 한 명 보내달라고 S.O.S.를 쳐도 잘 안 되자, 만약 내년에도 보내주지 않는다면  타 대학 출신을 뽑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자 강 교수는 3, 4년차가 돌아가면서 두 달씩 파견을 가라는 오더를 내렸는데 공교롭게도 그 첫 번째 순번이 이 선생이고, 두 번째가 나영이였다.     


5월부터 그 병원에 파견을 가게 된 나영이 한 달쯤 지나 그쪽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무렵 이 선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넌지시 떠봤다. 그랬더니, 병원 측에서도 그를 마음에 들어 하고 그 또한 이 병원이 본인 체질에 딱 맞다 하여 전문의를 따고 나면 이 병원에 오기로 서로 약조를 맺었다 한다.     


나영은 뛸 듯이 기뻤다. 이제 자신의 경쟁상대가 사라진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또 이렇게 역사하시는구나'라는 감사의 기도가 절로 나왔다.     




10월에 접어들자 나영은 대학에 남고 싶다는 뜻을 주니어 스텝을 통해 주임교수에게 전달했다.

한동안 답이 없었다.

'그야 당연하겠지. 교수님의 입장에서는 분명 그 선배에게 방점을 찍고 있었을 테니 이제 본인 의사도 확인하고 설득도 해야 할 판이니 시간이 좀 걸리겠지.'      

하지만, 그 기간이 너무 늘어지자 나영은 의국장 잘릴 때의 악몽이 되살아나면서 왠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거, 아무래도 뭔가 잘못 돌아가는 것 같은데.'     


며칠 후, 주임교수의 호출이 떨어져 방에 들어갔더니 청천벽력 같은 답이 돌아왔다.     


"네 뜻은 전해 들었다. 하지만 대학에는 이 선생이 남기로 했으니 너는 시립병원으로 가서 한 삼 년 있어라. 그러고 나서 보자."

     

나영은 앞이 노래졌다. 그리고 그 노란색은 곧 붉은색으로 변했다.     

'대학에서 튕기는 것까지는 그래도 이해하겠다. 하지만, 시립병원은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 이 선배를 불러들일 거라면 그 자리에 나를 보내면 될 것 아닌가? 게다가 다른 데 자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시립병원이라니! 그것도 3년 씩이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의국의 장래를 생각하여 장기적인 안목에서 전술적으로 두는 포석이 아니라 개인감정에 의한 유배(流配)나 다름없었다.


'도대체 내게 얼마나 미운털이 박혔으면 이렇게까지? 야이 썅! 내가 무얼 그리 잘못했노? 나는 레지던트 동안 최선을 다했고, 우리 과 위상을 올리는 일에도 누구보다 공헌했다. 그런데 왜? 무엇 때문에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나?'


그러자 번갯불 번뜩이듯 한 단어가 떠올랐다.

역린(逆鱗)!     

'그렇다. 내가 의국장 할 때, 개혁한답시고 겁 없이 덤벼들다 건드린 역린, 그 결과 나는 위험한 반골(反骨)을 넘어 용서받지 못할 자가 된 것이다. 그 외에는 이유가 없다.'

         

그 시절, 주임교수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특히 전문의 취득 후 첫 직장만큼은 주임교수가 가라는 대로 가야 했고 거기에는 앞으로 배출될 제자들의 취직자리를 위해 미리 포스트를 박아 둔다는 정략적 명분도 있었다. 그러므로 만약 그 오더를 어기고 제 마음대로 갔다가는 주임교수의 지엄한 영을 어긴 중죄인이자 의국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는 이기적인 놈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하지만 나영은 그 오더를 쉽게 따를 수 없었다. 그것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영이 대학교수가 되고자 하는 목적은 명확했다.     

나는 이미 두 살 때 죽었어야 할 목숨이다.
하나님이 나를 다시 살리신 이유는 단 하나, 나에게 줄 소명(召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소명, 받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크면서 주변의 많은 사람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고 살아왔다.
그 은혜, 갚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내 몸이 사람 구실 하며 살아갈 만큼 회복된 것은 현대의학 덕분이다. 
그 혜택, 널리 나누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나영이 의사가 된 이유였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연구를 통해 의학발전에 공헌하고 교육을 통해 훌륭한 의사를 길러내는 것이 가장 파급효과가 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에 남아 교수의 길을 가고자 한 것이다.     


나영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만약, 영감님 오더대로 시립병원으로 가면 어떻게 될까?

전문의 따고 난 후 가장 열심히 공부해야 할 시기에 혼자서 새빠지게 일만 하다 한 삼 년 푹 썩고 나면
대학은 고사하고 그럴듯한 종합병원 들어가기도 힘들어진다.

그다음 갈 길은 뻔하다.
고만고만한 수준의 병원을 돌아다니거나 조그만 구멍가게 하나 열어서 열심히 돈을 벌겠지.

그러면 한평생 별 고민 없이 잘 먹고 잘살다 가겠지. 이 길이 과연 내가 가야 할 길일까?’     


나영은 또 한 번 절벽 앞에 섰다.     

사람의 하명(下命)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하늘의 소명(召命)을 받들 것인가?


하명을 거역하면 부산 땅에서 발붙이고 살기 힘들어질 것이고, 

소명을 받들지 않으면 나중에 하나님을 뵐 낯이 없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게 고뇌에 차 있을 동안, 나영에게 한 줄기 서광(瑞光)이 비쳤다. 

서울대학병원에서 전국 처음으로 임상강사(Fellow)를 모집한다는 소문이 들려온 것이다.

그는 귀가 번쩍 뜨였다.

'이 길을 가면 또 다른 고난이 시작되겠지만 그래도 내 인생의 목적에 부합하는 길이다.'     


나영은 2년차 말, 그 병원에 파견 갔을 당시 사귄 의국장에게 전화하여 지원 의사를 밝혔고 그는 의무장에게 보고한 후 그 결과를 알려 주겠다 하였다.     

일주일 후에 답이 왔다. 의무장께서 '대부대병원 한 선생이라면 받겠다' 하였으니 얼른 지원하라는 거다.     


의무장이 누구냐 물었더니 박재형 교수라 하였고 나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분은 혈관조영이 전문인데.., 그분이 나를 받아들이겠다고?'

     

나영이 서울대에 파견 간 것은 혈관조영술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방은 거의 수술실에 준하는 시설이기에 정전기가 발생하는 물건을 몸에 지니고 들어오는 것은 금물이다.  


나영은 당장 보조기가 문제였다.

보조기를 벗으면 실내에서 걸을 수는 있으나 자유로이 다닐 수는 없고, 변형된 발 때문에 슬리퍼는 더더욱  안 된다. 결국, 박 교수와의 면담 결과 혈관조영실은 돌지 못하고 한 달 동안 판독실에 가서 판독하는 것만 보다 왔다.     

'아니, 자기 분야엔 아예 써먹지도 못할 나 같은 장애인을 뭐가 좋아서 받아주겠다는 건지 참말로 이해가 안 가네. 이유가 뭘까? 도대체 나의 어떤 면을 잘 보았기에 받겠다는 건가?'

     

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중에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그래, 바로 Eleven thirty네!"


서울대 병원 방사선과에서는 매일 11시 반이 되면, 시술 중인 사람 외에는 전부 판독실에 모여 콘퍼런스를 하는데 그 이름을 ‘일레븐 서티’라 불렀다.

이 시간은 그날 오전에 판독하다가 만난 난해한 케이스나 교육적 가치가 높은 전형적인 케이스들을 각 파트에서 들고 와 30분간 ‘프리 디스커션’ 하는 시간이었다.


여기에는 서울대병원 과원뿐 아니라 전국에서 올라온 파견 전공의들도 다 참석했다.     

이 시간에는 스테프나 레지던트들이 케이스를 걸고 다 함께 계급장 떼고 난상토론을 벌이는데, 타 병원에서 파견 나온 전공의들은 주로 듣고만 있었다.     


그런 시간에, 서울의 의사들이 지방에서 파견 나온 의사를 '시골’에서 온 사람'이라 칭하며 우습게 보던 그 시절에, 부산 시골뜨기 나영은 겁도 없이 앞에 나서 그들과 당당히 열띤 토론을 벌인 일이 두세 번 있었다. 나영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1년차 때부터 컨펌 콘퍼런스와 타과와의 콘퍼런스에서 충분히 단련받은 덕분이다.  

   

'아마도 이것이 박 교수님의 눈에 들었나 보다. 이 장면을 보고서 나를 학문을 할 자세와 자질을 갖춘 자라고 인정한 모양이다. 안 그러면 어떻게, 한 달 동안 철새처럼 왔다 가는 수많은 파견 전공의 중에 자기 파트도 돌지 않은 나의 인상착의와 이름을 기억하고 있겠는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나영은 그제야 서울대학이 왜 서울대학인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역시 서울대학이 다르구나. 눈에 보이는 장애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능력을 알아보는 곳. 편견 대신 가능성을 높이 보는 곳.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야말로 내가 그리던 이상향이고 이런 풍토라면 한 번 도전해 볼 만하다. 그래, 가자! 이왕 영감님과 고향을 등지고 떠날 거면 큰 물에서 한 번 놀아보자. 나도 이제 모교라면 신물 난다. 그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자~ 잘 있거라. 나는 간다.'     


나영은 아내에게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보따리 쌀 준비하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따르릉, 따르릉..."

운명의 벨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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