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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May 29. 2022

요단강을 건너다

장편소설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한 선생, 나 한백병원의 배철구요."

"아,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레지던트가 의국 출신 선배들과 만날 일은 수련 기간 동안 딱 한 번, 과에 1년차로 처음 들어왔을 때 의국 동문회 모임에 참석하여 단체로 앞에 나가 자기소개하고 들어가는 것이 전부다.

그리고 레지던트가 선배에 대해 아는 것은 주로 부산 시내에 있는 대학병원이나 종합병원 방사선과 과장 정도였다.   


나영은 하늘 같은 선배가, 그것도 (사립) 대학병원 방사선과 과장 선배가 일개 레지던트인 자신에게 직접 전화했다는 사실에 한껏 고무되었다.

     

"어쩐 일이신지요?"

"한 선생, 우리 병원에 와서 나하고 같이 일하지 않겠나?"


나영은 귀를 의심했다.

고향 떠나 타향살이할 보따리 싸고 있는 나를 교수요원으로 모셔가겠다니, 이보다 더한 희소식이 또 있을까? 말이 쉬워 서울이지, 그게 어디 보통 일인가.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을 떠나 본 적 없는 장애인인 나, 눈이 오거나 길이 얼어붙으면 혼자서는 꼼짝도 못 하는 나다.  


더군다나 서울대학 자리는 정식 교수 자리도 아닌 임상강사 자리다.

서울대 출신들과 경쟁하여 이겨야만 정식으로 임용받을 수 있는 불확실한 자리다.

이런 나에게 부산에서 대접받으며 정식 임용될 자리 제의가 들어왔는데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내가 미쳤나? 이런 자리 놔두고 서울로 가게.     


하지만, 나영에겐 걸림돌이 남았다. 그것도 아주 큰 것이.

내가 영감님 오더를 어기고 다른 지역도 아닌 부산에서 내 가고 싶은 데로 간다면 앞으로 두고두고 영감님과 마주치며 받아야 할 그 압박감과 선배들의 따가운 시선을 어찌 감당할까?

     

무슨 수를 쓰더라도 영감님 마음을 돌려놓아야 했다.

나영은 아내와 상의했고 아내는 자신이 발 벗고 나서보겠단다.     

그 아내는 무얼 믿고 그랬을까?     


백화가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으로 간 곳은 영도 보건소였다.

한 번은 보건소 근무 간호사 모임에 갔다가 자기소개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남편의 신분이 노출되자 영도구와 가까운 서구보건소 진료실 근무 간호사가 반색하며 말했다.


"아이고, 우리 보건소 진료 닥터가 대학병원 방사선과 과장 사모님이신데!"

     

당시 주임교수 부인은 그 보건소 촉탁의(囑託醫)로 근무하고 있었다.

백화는 귀가 번적 띄어 서구보건소로 찾아가 사모님께 인사드리고 나오면서 그 간호사에게 사모님 생일을 알아내어 생일날마다 선물을 사 들고 찾아뵈었다.  

   

그런 연고가 있기에 백화가 먼저 사모님을 찾아가 간곡히 호소해보겠며 나선 것이다.     

장수를 잡으려면 먼저 말을 쏘라고 했던가?

그 후, 사모님이 아내에게 귀띔해 준 날, 나영은 아내와 함께 교수님 댁으로 찾아갔다.     


안방에 교수 부부가 앉았고 나영은 그 앞에서 어린 시절 자신이 겪었던 일과 의사가 된 이유에 대해 절절히 설명하고 부디 이 기회를 허락해주십사 하고 호소한 후 둘이서 엎드렸다.

그러자 부인도 옆에서 거들었다. 


"저렇게 교수가 되겠다는데 그냥 허락해주세요."


교수는 시종일관 복잡다단한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었는데, 그것은 나영 하나 봐주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선은 전문의 한 명 꼭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시립병원장에게 자신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다. 게다가 주임교수인 자신을 패싱 하고 다이렉트로 레지던트를 빼내 가려는 한백병원 배 과장의 태도 또한 괘씸했다.


그랬다. 

당시에는 현역 레지던트를 데려가려면 누구든 주임교수에게 부탁하고 허락을 받아야 했는데 배 교수는 이를 무시한 것이다. 그는 반골 기질에 고집과 뚝심의 소유자로서 상식을 뛰어넘으며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인지라 그런 간 큰 짓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제자에게 더 좋은 자리가 나서 본인이 가겠다고 이렇게 사정하는데 그걸 막을 법적 권한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했을 때 자신에게 돌아올 도덕적 비난을 생각하면 그냥 깔아뭉갤 수도 없다.     

어디 그뿐인가? 자신의 부인이 나서 지원사격을 하는 데다 당사자의 아내까지 엎드려 읍소한다.     


드디어 교수가 입을 열었다.


"그래, 너 가고 싶은 데로 가라!"
  

이렇게 하여 그동안 나영에게 씌워졌던 족쇄는 완전히 풀리게 되었고, 인생의 마지막 갈림길에 선 두 사람은 길이 엇갈렸다. 한 사람은 나영 때문에 생각지도 않던 대학교수의 길로, 나영은 그 때문에 모교 대신 사립대학 교수의 길로.




1983년은 격동의 한해였다. 이때 배출된 사람들은 수련 기간도 1년 줄었고 과 자체도 진단방사선과와 치료방사선과로 분리되기 직전이었다. 그래서 그해에 배출되는 방사선과 전공의는 두 가지 전문의 시험을 다 칠 수 있었다. 진단방사선과 시험은 필수였고 치료방사선과 시험은 선택 사항이었다.     


나영은 2년차 말, 신촌 세브란스 병원 암센터에 두 달 동안 파견 가서 치료방사선과 공부를 하고 3년차 초에 ‘방사성동위원소 취급자특수면허’도 땄다. 3년차 말, 나영의 인생이 걸린 마지막 시험인 전문의 시험에서 그는 진단과 치료, 둘 다 응시하였다.     


나영은 중학 입학시험에서 떨어지고, 대학에서 두 번이나 낙제하고 나자 시험에 대한 콤플렉스와 불안감이 잠재의식 속에 강하게 남아, 어쩌다 한 번씩 시험에 관한 꿈을 꾸게 되면 꼭 떨어지는 꿈만 꾸면서 식은땀을 흘리며 놀라 깨어나곤 했다.     


전문의 시험을 치고 나서는 '처자식을 거느린 몸으로 만에 하나, 10% 정도 되는 불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오르면 어쩌나?’ 하는 강한 압박감에 또다시 악몽을 꾸었다.     

합격자 발표하는 날, 나영은 가슴 졸이며 결과를 기다렸다.


'합격'. 


둘 다 합격이었다. 

한꺼번에 전문의 자격증을 두 개를 딴 것이다. 


"만세!"


이로써 나영은 레지던트 3년 만에 진단방사선과 전문의에, 치료방사선과 전문의에, 방사성동위원소 취급자특수면허까지,  고등고시로 치면 사법·행정·외무 삼시(三試)를 모두 패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하나 더 '석사학위'까지, 4관왕의 위업을 달성했다. 


너무나 홀가분했다.

이제 일생에 치러야 할 시험이란 시험은 다 쳤다. 

이것으로 나영은 시험에 대한 모든 불안과 콤플렉스와 압박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진정한 자유인이 되었다.
내 몸에 채워졌던 장애인이란 족쇄도 다 풀렸다. 아니, 풀었다.

그동안 험난했던 30년간의 광야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이제 나는 요단강을 건넌다.

이제 내 앞을 가로막을 자 그 누구뇨?

이래도 내가 장애인이라고 무시하고 차별하고 모욕하겠는가?

지금부터 나는 질풍노도(疾風怒濤)처럼 내달릴 것이다.

그러다가 때를 만나면 창공을 향해 힘차게 날아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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