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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May 24. 2022

별이 지다

장편소설

1982년 3월, 나영은 드디어 레지던트 말년(末年)차인 3년차가 되었다.

하지만, 3년차가 된 지 며칠 안 되어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나영의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리고 입원 사흘 만에 65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나영은 장례가 끝날 때까지도 아버지의 죽음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형들은 서울에 있었고 모든 것이 나영이  근무하는  병원에서  치러졌기 때문에 입원 순간부터 장례식 끝나기까지 소소한 것 하나하나 나영이 다 챙겨야 했기 때문이다.          

나영 아버지의 묘소는 그가 30년 공무원 생활 중 가장 큰 정렬을 쏟아부었던 동래군수 시절 관할 구역인 정관읍에 있는 한 공원묘원으로 정해져졌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그동안 혹사했던 심신을 달래고 난 후에야 나영은  아버지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나영은 자신과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지난날의 추억이 하나하나 스쳐 지가면서 지금껏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생각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나?'

'아버지는 나에게 어떤 존재였나?'

'나는 아버지에게 어떤 존재였나?'    


나영의 회상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라는 질문에  ‘아버지는  참  안  된  사람‘이라는 답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평안남도 강동에서 제일 부잣집에 태어나 외동아들로 컸다.

할아버지는 일찍이 비단장사로 큰 부를 축적하였고 그 지역 천도교 교령(敎領)이었다.     

아버지 위로는 딸 하나에 아들 둘이 있었으나 아들들은 아주 어린 나이에 다 돌아가시고 아버지 혼자 살아남았다.

이렇게 손(孫)이 귀한 집안이다 보니 어린 나이에, 얼굴도 한 번 못 본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이까지 낳고 살았지만, 서로 도저히 맞지 않아 이혼하고, 아예 조선 땅을 떠났다.     

식민지 백성 죠센징이 아무 연고도 없는 일본 땅에 건너가 자수성가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과 핍박을 받았을까? 아버지같이 자존심 강한 사람이 그 자존심 어디다 떼 놓고 살았을까?

 

해방 후, 조국으로 돌아와서는 부산 동래에 정착하며, 이전에 한 번 결혼한 사실을 숨긴 채 몰락한 양반집 셋째 딸인 어머니와 결혼해 잘 살았다. 그러다가 6·25 때 전처의 아들이 아버지 찾아 구만리 길을 내려와 동래시장에서 극적으로 상봉하여 과거가 들통나는 바람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전쟁 통에는, 어떡하든 부모님을 모셔 오려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38선이 그어지자 영원히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언젠가 남북교류가 이루어져 부모님 생사라도 알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다가 지금쯤이면 이미 돌아가셨을 것이라 생각될 무렵부터 할아버지 생일을 기일로 정하고 제사를 지내왔다.     


제삿날마다 "나 같은 불효자식은 없어. 내가 죽일 놈이야." 하며 어떻게나 꺼이꺼이 서럽게 우시는지 그때마다 나도 함께 눈물을 적셨다. 부모 형제 아무도 없는 이남 땅에서, 친척이라곤 일본 갈 때 데리고 갔다 함께 귀국한 육촌동생 한 명이 다다. 그렇게 외로운 처지임에도 아버지에겐 친구 하나 없었다.     

내가 중고등학생 시절, 한창 우정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던 시절, 아버지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했다.


"친구 너무 믿지 말라우! 결국 남는 건 가족밖에 없어."

친구로부터 어떤 배신을 얼마나 크게 당했길래 저런 말을 할까?

그때 나는 속으로 '배신당할 땐 당하더라도 친구는 있어야지요.' 하고 아버지 말을 귓잔등으로 흘려보냈다.   

부모 형제도, 일가 친척도, 친구도 하나 없고 특별한 취미도 없는 아버지에게 남은 건 오직 가정과 직장뿐.

그러다 보니 유일한 취미는 집안일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귀부인처럼 모셔놓고 혼자서 온갖 간섭 다 해가며 머슴처럼 일하며 가왕(家王)으로 군림한 남자.


작고 힘 있는 눈에, 넘치는 카리스마에, 사람들은 아버지 앞에만 서면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속은 말랑말랑한 사람. 정 많고 눈물 많은 사람.

테레비 보면서 조금만 슬픈 장면이 나와도 "야, 거, 슬프구나 야."라며 눈물을 훔치던 아버지.     

어릴 적 나는 아침에 눈만 뜨면 부모님 주무시는 안방으로 살며시 잠입하여 아버지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평소에는 호랑이 같은 아버지라 한편으로는 무서우면서도 나에 대한 끔찍한 사랑과 그 많은 정 때문에, 잔정 없는 어머니보다 아버지에게 더 끌렸는지 모른다.      


장애인 자식에 대한 과보호의 폐해를 줄이고 어떡하던지 강한 아이로 키우기 위해 어린 내 눈에는 표 안 나게 울타리를 쳐놓고 '넌 결코 남과 다르지 않아' 라는 말로 끊임없이 세뇌시킨 아버지.
국민학교 5학년 겨울방학 때, 대구에 가서 두 번째 다리 수술을 받고 병실로 돌아온 날 저녁을 나는 잊지 못한다.  

마취가 깨고 나니 통증이 너무 심해 제발 진통제 한 대만 놔달라고 애원해도. 의사가 그런 주사 자꾸 맞으면 회복이 늦어진다고 했다며 ”참으라우!“ 소리만 하던 고지식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이틀 동안 이를 악물고 참았던 아버지 못지 않은 나.

병실 회진을 와서는 어른들도 못 참는 걸 이 어린 녀석이 견뎌냈다며 감탄을 금치 못 하던 의사 선생님.


그 고통을 참아낸 아들이 대견하여 아버지는 일주일 후, 부산에서 오실 때 내가 가장 갖고 싶어 하던 선물을 사오셨다. 구멍 24개짜리 일제 야마하 하모니카.

추운 겨울, 한달이 넘는 입원 생활의 지루함을 나는 그 하모니카를 불며 달랠 수 있었다.     


중고등 학교 입학 때면 교장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을 집에 모셔다가 상다리가 휠 정도로 음식을 차려놓고 극진히 대접했고,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새로운 담임 선생님을 모셔다 같은 대접을 했다.          


대학 시절 음악 경연대회에 나가서 상을 타올 때마다 아버지는 대견해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아마도 내가 노래를 잘 해서가 아니라 장애인인 내가 많은 관중이 보는 앞에서 그 시선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무대로 걸어 나가 상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감격인 것 같다.     

낙제하고 처음으로 부모 곁을 떠나 장안사로 들어갈 때, 나 데려다주고 헤어질 때의 그 안되어하는 눈빛과 돌아서 가는 쓸쓸한 아버지의 뒷모습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러던 아버지가 두 번째 낙제에는 분을 못 참고 내 기타를 박살 내놓던 날 아버지 심정은 어땠을까?


"에그, 내가 죽일 놈이다. 죽일 놈이야."          


의사는 되었는데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어 막막하던 때, 시립병원 원장 집에 찾아가 인턴으로 들어가게 하는 데 결정적이 도움을 준 아버지.          

작년, 아버지의 몸 컨디션이 좀 안 좋다는 말을 듣고 집에 가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수액을 놓아드렸을 때 그 흐뭇해하시던 표정. 그러면서 "의사 아들한테 주사도 다 맞아보았으니 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하시던 아버지.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나영은 자신도 모르게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장애인 아들, 의사 하나 만드는 데 온갖 정성 다 쏟아부은 아버지. 왜 이렇게 일찍 가세요? 나 아직 아버지께 갚아야 할 것 많은데. 내 전문의 따고 나면 그동안 못다 한 효도 다 하려 했는데. 꼴랑 주사 한 대 맞고 이렇게 가시다니요?"   


나에게 있어 아버지는 나의 히어로, 나의 멘토, 나의 이상향, 그리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셨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나는 자식 중 가장 뼈아픈 자식이요, 크나큰 짐이자 멍에였다. 그리고 큰 불효자였다.

대학 시절, 한참 술 먹고 늦게까지 돌아다닐 때, 내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잠이나 옳게 주무셨겠나?  

아내와의 결혼문제로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집을 뛰쳐나갔을 때, 이 밤에 어딜 가냐며 맨발로 따라오던 아버지 심정이 어땠을까?


한참을 울고 나니 속이 후련해졌다.

이제는 아버지를 온전히 보내 드려야 할 시간.     

나영은 아버지께 고별인사를 올렸다.          


"아버지, 저는 어려서 아버지께서 제 왼쪽다리에 채워준 보조기로 혼자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크면서는 오른쪽 다리에 아버지라는 보조기를 차고 온갖 어려움 헤쳐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 오른쪽 다리 보조기는 돌려드릴게요. 

그동안 제가 혼자 걸을 수 있도록 근력을 많이 키워주셨지 않습니까? 

이제 제 혼자 세상 이겨나갈 준비 다 됐습니다. 더이상 제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러니 아버지께서도 평생을 짊어진 저라는 무거운 멍에 내려놓으시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나님 곁으로 올라가세요. 그리고 앞으로 제게 다가올 영광의 날들을 기대하며 즐기세요. 그동안 한 번도 못 한 효도 그걸로 대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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