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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May 19. 2022

초음파와의 운명적 만남

장편소설

    신시대(新時代)의 도래     

1981년, 나영이 레지던트 2년 차 후반기가 되자 초음파와 CT, 그리고 심혈관용 연속촬영기(Cine-angiography)가 한꺼번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는 서울을 제외한 다섯 개 지방 국립대학병원의 낙후된 의료장비 보완책의 일환으로 정부에서 ‘Axim’이라는 차관(借款)을 들여와 넣어 준 것이다.


나라가 얼마나 못 살았으면 국립병원 다섯 곳에 최신 영상 장비 세 대를 넣어주면서 남의 나랏돈을 빌려다가 들여왔을까? 이 일은 당시 대한민국의 국부(國富)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케 하는 좋은 예 일 뿐 아니라 앞으로 영상의학계에 불어닥칠 대변혁을 예고하는 신호탄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접한 방사선 영상은 환자에게 엑스레이라는 강력한 광선을 쏘아 인체를 투과한 빛이 엑스레이 필름을 감광시켜 만들어낸 평면 사진이었다. 하지만 새로 나온 초음파와 C.T.는 각각 음파와 엑스레이를 이용하여 인체 내부를 무채 썰 듯 자른 단면(斷面) 영상이다.     


이제, 여러 장기가 겹쳐서 나타나는 2차원의 세계에서 각 장기가 분리되어 나타나는 3차원의 세계로 넘어가는 신시대가 도래하였고 그 속에서 나영은 일종의 경계인(境界人)이었다.

3년간의 트레이닝 기간 중 절반은 재래식 방사선학(Conventional radiology)을 익히고 나머지 절반은 새로운 신학문을 익히는 절묘한 타이밍에 놓이게 된 것이다.


초음파(超音波)와의 운명적 만남


차원이 다른 새로운 진단 기기와 신학문이 서울에 들어왔다면, 그것이 부산까지 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러면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교수 중 누군가는 미리 가서 배우고 공부하고 대비해야 했다.      

하지만, 나영이 트레이닝받던 병원의 교수들은 그 누구도 신학문의 바다에 뛰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장비는 곧 들어오는데 기기 조작부터 판독까지 지도하고 가르쳐 줄 사람이 없었다.      


결국, 모든 것을 레지던트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상황이되었다.

나영은 어디서 많이 듣던 용어가 생각났다. ‘자력갱생(自力更生)’ '각자도생(各自圖生)'.

이러한 상황은 나영이 일찍부터 자생력을 길러 새로운 분야를 혼자 개척해나가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전공의들은 새로운 장비가 들어올 때마다 밤 늦게까지 남아 장비 설치를 담당하는 장비회사 기술자들에게 밥 사줘가며 그들로부터 장비 조작법과 작동원리를 배웠고, 판독에 관해서는 외국의 논문집들을 가지고 초독을 통해 익혀나갔다.     


초음파 장비가 들어왔을 때, 2년차 중에서는 나영이 맨 먼저 초음파 파트를 돌게 되어 4년차인 성 선생 밑에서 2개월 동안 지도를 받게되었다.  

당시 병원에 들어온 장비는 미국 산 피커(Picker) 제품이었다.

이 장비는 요즈음처럼 실시간으로 모니터를 보아가며 검사하는 리얼타임 스캐너(Real-time scanner가 아니라 한 번 쓱 그으면 고정된 영상만 나타나는 정지영상 스캐너(Contact compound scanner)였다.     


장비는 슈퍼컴만 한 커다란 본체와, 로봇팔처럼 생긴 기다란 암(arm)과 그 끝에 붙은 몽당연필처럼 생긴 탐촉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시 대부대병원에 들어온 것과 같은 모델의 제품으로서 장비 몸체는 왼쪽에 아주 일부만 보인다.

    

왼손으로는 암을 움직이는 컨트롤러를 조작하고 오른손으로는 탐촉자로 스캔을 하게 되는데, 영상 하나 만들어내는 데는 상당한 테크닉이 필요했다. 또한, 암은 세팅한 대로 고정되기 때문에 한 번 긋고 난 다음 1 cm 하방 레벨에서 그을려면 컨트롤러를 조작한 후 철커덕하고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런 방식으로 영상이 만들어지다 보니 상복부 초음파 검사 한 명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시술자의 숙련도에 따라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였다.  또한 이렇게 어렵게 얻어지는 영상을 보면 마치 일기예보 시간에 보여주는 구름 사진 같았다.    

(1983년, 나영이 전문의가 되어 다른 병원에서 잡은 사진)

    

초음파로 요관결석을 잡아내다

    

나영이 초음파를 시작한 지 두 달째 중반에 들어섰을 무렵에는 장비 조작도 익숙해지고 영상도 눈에 익어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다.     

어느 날, 요관결석(ureter stone) 환자 한 명이 왔다.

환자의 진단은 I.V.P.( Intravenous pyelography, 경정맥 신우 조영술)에서 이미 내려진 상태였다.     

    

요관 결석의 모식도(사진출처: 동글사마의 블로그)



나영은 '이미 답도 나와 있겠다, 이 정도야 못 잡아내랴?' 하며 호기롭게 덤벼들었다.      

그런데, 엑스레이 사진에 빤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본 후 잡으러 들어갔는데도 불구하고, 1시간이 다 되어 가도록 결석의 그림자도 구경할 수 없었다.

     

나영의 짧은 지식과 경험으로는 초음파로, 그것도 리얼타임이 아닌 정지영상 초음파로, 요관결석을 잡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도전인지 알 턱이 없었다. 나영은 점점 초조해졌다.

‘임상 증세와 단순 엑스레이 한 장만으로도 진단할 수 있는 케이스를 최첨단 영상진단 장비로 잡아내지 못한다면 과연 비뇨기과에서 무어라 비웃을까?’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판독실에서 검사 끝났다는 보고를 기다리던 성 선생이 기다리다 못해 초음파실로 와보고는 "아직도 안 끝났어요?" 하고 물었다. 그럴 때마다 나영은 "아~ 예, 다 돼갑니다." 하며 돌려보내기를 두 번. 어느덧 검사 시작한 지 1시간 반이 흘렀다.    

 

환자의 왼쪽 옆구리는 탐촉자로 하도 문질러 벌겋게 변색되어 피부가 벗겨지기 일보직전이고, 환자는 아프다고 오만 상을 다 찡그리고, 나영의 손바닥은 땀으로 끈적거렸다. 더 이상 환자를 고문하는 것도 못할 짓이라, '에이, 썅, 이번이 마지막이다.' 하며 탐촉자를 옆구리 깊이 쑤셔 넣으며 휙 그은 순간, 돌 모양이 그려졌다.     '으으윽! 드디어 잡았다.' 나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환희에 젖었다.     

     



나영은 현상된 필름들을 들고 판독실로 가서 성 선생 앞 뷰박스에 I.V.P.와 초음파 사진을 죽 걸어놓고

"환자의 진단명은 좌측 요관결석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래, 초음파에서 병변을 잡았어요?" 

"예!"
     

자신 있게 대답하는 나영을 보고 그는 어디서 공갈치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힐난하듯 말했다.     

"한 선생이 그걸 잡았단 말이오? 그럼, 어디 한 번 설명해 보소."

나영은 초음파 사진 한 장 한 장을 설명해가다 단 한 커트에서 잡힌 사진을 가리키며 소견을 설명하였다.

     

"바로 여기에 I.V.P.에서 보이는 결석과 같은 크기의 강력한 고에코성 포커스가 있고, 그 뒤로 전장(全長)에 걸쳐 확실한 후방음영이 내려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요관 결석임에 틀림없습니다."      


성 선생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안경을 고쳐 쓰고 앞으로 다가와 한참 동안 뚫어지게 쳐다본 후 한마디 했다.     

"한 선생, 축하하요. 우째 이걸 다 잡아냈소?"     

 

초음파에 인생을 걸다


나영이 보기에는 이같이 큰 덩치의 기계에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영상의 질도 형편없었지만, 음파를 이용해서 사람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경이로웠다.     


지금껏 인체에 해로운 방사선만 사용하던 방사선과에, 인체에 전혀 해가 없는 음파를 사용하는 신물(新物)의 등장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만했고 어쩌면 이것 때문에 과 이름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실제 그로부터 26년 후인 2007년,  방사선과는 영상의학과로 개명하게 된다.)       


그때, 나영은 다음과 같이 확신했다. 

'모든 측면을 고려해 보았을 때 초음파야말로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이고 유용한 의료영상 장비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는 결심했다. 

'앞으로 나는 이 초음파 하나에 내 인생을 걸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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