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기차를 타고 혼자 친척 집에 가던 중에, 누군가 소나무에 관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귀를 쫑긋 세웠다.
“소나무는 잘 키워야 해. 6·25가 일어나기 전 소나무를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했었거든. 동네 어른들의 그런 말이 지금에야 알겠네. 저기 좀 봐. 소나무가 잘 자라니까 지금 우리나라가 이렇게 잘살게 되었네.”
그때까지 소나무에 관해선 관심도 없었는데, 마침 창밖에 푸르른 소나무들이 보였고, 기차 안에서 수다 떠는 사람이 중년 정도 돼 보이는 것을 확인하고는 소나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옛날에는 정보도 별로 없었기에 집안 어른의 말이라면 사실과 무관해도 의심하지 않고 믿었을 테지만 시간이 흘러 그때 그 말이 역시 맞았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느새 내 무의식에도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을 한참 뒤에야 알 수 있었다.
20대의 사회초년생이었던 나는 꿈에 그리던 회사에서 일할 수 있어서 기뻤었다. 아니, 기쁘다기보다 기뻐야 하는 것이 맞았을 것이다. 누구든 자기가 소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그럴 것이라고 상상하지 않는가. 나도 그런 마음에 힘든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적응하기까지 배워야 할 일들이 많았기에, 주말은 잘 쉬기로 하고 있었다. 그러다 찾아가게 된 것이 소나무 길이 있는 산책로였다. 내 기억력이 이곳으로 언젠가 날 부를 예정이었기에, 힘들었던 시간을 잘 견디게 했나 보다. 아마도 출퇴근길 먼발치에서 집 근처에 소나무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이 산책로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던 것 같다. 소나무 길을 걷다가 긴 의자가 있어 앉아 보았다. 당장은 아니고 30분 정도 지났을 무렵,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가뿐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시간 정도 지나니까 회사 일로 쌓였던 피로가 완전히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소나무가 내 안에 있는 것들을 깨끗하고 싱싱한 것들로 회복시켜 주었다. 그것이 소나무에 대한 나의 두 번째 기억이다.
소나무는 다른 사람에게도 특별한 기억이 되었다. 처음으로 간 백일장에서 만난 여자분인데 백일장이 끝난 후에도 가끔 안부 인사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분도 소나무를 좋아하셨단다. 등산을 좋아해서 대한민국 안 가본 산이 없을 정도인데 한 번은 생명이 위험한 순간이 있었다고 했다. 발을 헛디뎌 벼랑에 떨어질 뻔했는데 소나무에 몸이 걸려 살아났다는 것이 아닌가.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뭐라고 이야기를 하고는 싶었지만, 그냥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서로 소나무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유는 각자의 편안함에 있어서 사람도 아닌 소나무에 대해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소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고 그런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그 후 몇 번 만난다고 하고선 약속을 못 잡고 있다. 아마도 소나무 이야기를 했더라면 더 친하게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냥 인연이 되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소나무의 세 번째 기억을 말할 차례이다. 지금 사는 아파트 안에 소나무 길이 생겼다. 전에는 한 그루 있던 것도 기분 좋게 바라보곤 했는데 이젠 매일 소나무 길을 걸을 수 있다니. 한 그루의 소나무는 무려 내 키의 다섯 배 정도의 스무 그루가 길을 만들어 주고 있다. 소나무는 그냥 소나무일 뿐이지만 우리 동양인에게는 이 땅에 인간이 살아가게 하는 이유를 깨우쳐 주는 고마운 친구와 같은 존재인 것 같다. 옛 기억의 기차 안 아주머니의 이야기에서는 대한민국을 다시 살아나게 했고, 내 백일장 친구에게는 목숨의 은인이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는 매일 소나무 길을 걸으며 나날의 무르익음을 감사하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