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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최대한 간단하게 정리해 드립니다(22).

경제공황과 전체주의

1920년대의 마지막 해에 전 세계는 대격변을 맞이합니다. 검은 목요일이라 불리는 주식시장의 붕괴였습니다. 전문가들조차 제대로 예상치 못했던 미국 주식시장의 붕괴는 전 세계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옵니다. 그것은 바로 전체주의라는 새로운 권위주의 형태의 정권의 등장과 두 번째 세계 대전이었습니다. 오늘은 이 3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볼까 합니다.


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은 세계 최고의 채권국이 됩니다. 많은 물자를 유럽에 수출했고, 그 대가로 엄청난 자본을 축적하게 되었죠. 게다가 전쟁기간 동안 발달한 대량 생산 산업 시스템에 더해 포드주의(작업의 효율과 노동자의 월급 인상을 통해 구매자 양성)와 같은 사상이 발달하면서 미국은 전 세계 번영의 상징이 됩니다. 기업은 끊임없이 발전했고 회사의 가치를 상징하는 주식 시장은 끊임없는 호황을 누렸습니다. 주식은 매일매일 최고치를 경신했고, 투자는 곧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보장된 자본 투자처였습니다.


그러나 1929년 자본이 과잉투자된 주식시장에서 실물경제와 주식가치에서 발생한 거품이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열기로 타올랐던 주식시장은 대폭락을 맞기 시작했고 주식 가치는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이 되었습니다. 주식시장 붕괴의 여파는 은행의 예금 대량 인출 사태로 이어졌습니다. 은행 역시 기존에 보유한 예금이 바닥을 드러내자, 파산 신청 또는 인출 중지를 선언했으며 기억에 대여되었던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업은 은행에 진 빚을 갚기 위해 구조조정을 실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대량의 실업이 발생하게 됩니다. 대량 실업은 악순환을 만들어 냈습니다. 수입이 없어진 소비자들은 소비를 줄이기 시작했고 이는 경기 악화로 이어졌습니다. 소비 침체-기업 도산-실업 증가-수입 감소-소비 침체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구조가 이어졌습니다.


더 큰 문제는 미국이 가지고 있는 부가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지점이었습니다. 지구화로 인해 유럽에 투자되었던 자본이 회수되거나 미국의 투자가 줄어들고, 수출이 부진하면서 유럽의 물가는 폭등했고 특히 미국의 경제력에 의존하여 경기를 회복하고 있던 독일과 같은 패전국은 더욱더 치명적인 결과를 맞이합니다. 미국의 경제 대공황이 이제 전 세계의 대공황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누구도 이를 해결해 줄 수 없었고 스스로의 힘으로 이를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각국의 대응은 3가지 방향으로 나눠집니다. 먼저 영국과 프랑스는 그래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극복을 시도합니다. 워낙에 광대한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터라 이들은 나름 자급자족의 경제생활이 가능했습니다. 영국은 자국 화폐인 파운드를 활용한 경제블록을 형성하고 프랑스는 프랑블록을 세워서 수입을 막고 자국 산업의 회복을 유도했습니다. 두 번째는 미국입니다. 미국은 사실상 대공황의 진원지이지만, 워낙에 많은 영토와 자원 그리고 시장이 있었기에 회복속도가 빨랐습니다. 특히 이때 대통령으로 선출된 루스벨트는 뉴딜이라는 정책을 추진하여 국민들의 신뢰를 얻습니다. 국가가 나서서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고 세금을 활용하여 특정 부분에 투자를 유도하여 경기 회복을 꿈꿨습니다. 여기에는 자유시장경제를 비판하여 국가가 나서서 총수요를 조율해야 한다는 케인스의 목소리가 주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과 같은 국가였습니다. 독일은 1차 대전의 패전국인 데다가 엄청난 배상금을 갚아야 하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는 승전국임에도 제대로 이득을 누리지 못해 1922년에 벌써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 정권이 집권을 한 상태였습니다. 일본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불리는 경제 호황기는 경제 대공황으로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국민들은 어두운 미래 속에서 기댈 곳을 찾기 시작했고 이는 전체주의라 불리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권위주의 정권의 등장으로 이어집니다.


히틀러는 1923년 맥주홀 폭동으로 수감된 상태였지만, 그의 언벽력과 연설력 그리고 유대인을 향한 증오와 혐오의 표현은 독일 국민들에게 위로감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갈수록 커지는 공산주의 세력에 맞서 자본가들은 히틀러가 공산주의를 막고 독일을 부흥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불황의 시기에 확실해 보이는 신념과 행동은 국민들의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했습니다. 결국 독일은 1933년 투표를 통해 히틀러의 나치당을 제1당으로 만들었고 당시 독일 대통령인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습니다. 곧이어 히틀러는 총리 겸 대통령의 직책을 획득했고 나치당 외에는 다른 정당을 모두 해산하면서 1당 독재의 국가로 변모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독일의 재무장 선언과 주변 영토를 병합하기 시작합니다. 라인란트, 오스트리아 그리고 체코가 여기에 포함되었습니다. 히틀러는 겉보기에는 독일 국민들에게 번영을 상징하는 듯했습니다. 실제로 실업률은 감소했고 산업은 회복되기 시작했으며, 국가경제는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 방향의 종착점에는 전쟁이 있었지만요.


일본도 마찬가지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1931년 일본 내 존재하고 있던 군부 강경파는 정부의 지시를 무시한 채, 만주를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습니다. 그리고 만주를 점령한 후, 정부에 자신들의 행동을 인정해 달라는 형식의 선조치, 후보고의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이 시기 일본 군부 강경파들 중에서도 어린 장교들이 2.26 사태와 5.15. 사건과 같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많은 정치인들이 희생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내각은 군부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상실했고 이제 일본 정계는 군인들이 장악하게 됩니다. 다음 행보는 예상했던 대로 중국 본토를 점령하려는 중일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일본은 이제 아시아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국가로 그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과거에 서양의 눈치를 보던 일본은 없어졌습니다. 국제 연맹이 이를 제지했지만, 일본은 국제 연맹 탈퇴로 답했습니다.


이탈리아는 진즉부터 등장한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책이 지속되면서 독일과 관계를 긴밀히 하고 일본과 3국 방공협정을 맺으면서 동맹국 체제를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훗날 우리가 추축국(Axis)라고 불리는 국가들의 탄생이었습니다. 이탈리아 역시 과거 자기가 점령하지 못했던 에티오피아를 무력으로 침공하고 점령하였습니다. 에티오피아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국제 사회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괜한 이탈리아와의 충돌은 제2차 세계 대전을 여는 행위가 될까 봐 강대국은 침묵하게 됩니다.(이는 에티오피아가 6.25 전쟁에 한국 편으로 참전한 계기가 됩니다)


2차 세계 대전까지 적으려고 했는데, 벌써 적다 보니 분량이 초과되었네요. 다음 편에서는 2차 세계 대전을 중점적으로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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