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1945년 5월 8월과 8월 15일 유럽전선과 태평양 전선에서는 총성이 멈췄습니다. 무려 4000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제2차 세계 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여기에는 승전국뿐만 아니라 식민지 국가의 민중들도 환호했습니다. 전체주의의 지배 아래, 신음하던 국가들이 드디어 기다리던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도 여기에 포함되었습니다. 8월 15일은 누구에게는 승전기념일이자 패전의 날이었지만, 식민지배를 당했던 국가들에게는 해방의 날이 되었습니다.
손에 잡힐 것 같았던 평화는 다시금 멀어졌습니다. 공동의 적이었던 추축국이 사라지자, 연합국이라는 이름 아래 동맹을 맺었던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간의 대립이 깊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대립이 시작된 것입니다.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 없이 서로 간에 노려보면서 차가운 긴장감이 도는 전쟁을 학자들은 차가운 전쟁 즉 냉전(Cold War)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은 공식적으로 냉전이 끝난 시대에 살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냉전의 여파는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냉전을 이해한다면 현대사회의 흐름을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면 이제 냉전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냉전은 총 3단계로 나뉩니다. 1947년부터 1961년까지가 냉전의 최고조 시기였으며, 1962년부터 1979년까지가 냉전의 완화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1980년부터 1991년 소련 해체까지를 냉전 말기라고 구분합니다. 사실 이런 구분이 정확히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초반에 정말 핵전쟁 직전까지 갔던 긴장 고조기에서 공산진영의 분열로 인한 완화기 그리고 소련의 몰락으로 끝나는 종료 기라고 기억하시면 이해하기 편합니다. 여전히 불쑥불쑥 등장하는 냉전을 고조시킨 사건은 등장하지만, 큰 틀에서 나누자면 3개의 시기로 구분합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나눈 것입니다.
먼저 1단계입니다. 냉전의 책임을 일방적으로 한쪽의 잘못으로 돌리기에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 진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소련을 악마화하지만 조금은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련이 동유럽을 공산화한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울타리이자 방어막의 필요성 때문이었습니다. 1941년부터 시작된 독일의 공격으로 인해 소련은 전 인구의 1/3이 죽거나 부상당하고 사회 기반시설이 거의 무너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독일 점령지로 진격하면서 많은 동유럽 국가들을 해방시켰습니다. 소련의 속내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소련은 이들을 점령하기보다는 친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하여 든든한 울타리로 삼으려 했습니다. 또한 소련이 점령한 독일의 동쪽지역에도 친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하려고 했습니다. 이는 당시 소련 지도자였던 스탈린이 다시는 직접적으로 침공당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동유럽이 공산화되고 심지어 아시아 전선에서도 중국의 공산주의 정권을 지원하는 소련의 행동이 결코 좋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영국의 수상이었던 처칠은 이런 상황에서 '철의 장막'이 동유럽에 쳐지고 있다고 경고했으며, 루스벨트를 이어 당선된 미국 대통령 트루먼더 이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터키와 그리스에서 일어난 공산주의 반란을 계기로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로 마음먹습니다. 1947년 미국 대통령인 트루먼의 의회 연설에서 시작된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 이후 미국과 소련의 대립은 본격화되었습니다. 미국의 국무장관 마셜이 발표한 서유럽 부응 계획 혹은 마셜 플랜이 시행되면서 미국은 서유럽을 부흥시켜 공산주의의 확산을 방어하려고 하였습니다. 또한 독일 점령지에서 서독을 자본주의 진영으로 개편하려고 하였습니다.
미국의 이런 움직임에 소련도 베를린 봉쇄를 단행하고 미국과의 대립을 시작했습니다. 동유럽 곳곳에서는 소련의 영향을 받은 공산주의 정권이 등장하였고 중국에서의 내전에서도 소련의 지원이 커졌습니다. 일본군에서 노획한 무기나 물자들을 마오쩌둥의 공산당 정권에 넘겨주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한반도에서의 통일정부 수립도 결국 남과 북의 분단으로 이어졌습니다. 물론 이때까지 소련과 미국은 세계 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직접 전쟁을 치를 마음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소련은 미국을 상대로 아직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미국의 핵공격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1949년 소련 역시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이제 미국과 소련 양국은 서로 건드릴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핵전쟁이 가능한 양국이 탄생했기 때문이었죠.
미국과 소련의 직접적인 대결은 없었지만, 대리전은 곳곳에서 발생했습니다. 진작에 1947년부터 발생했던 중국에서의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은 공산당의 승리로 끝났고, 여기에 힘을 얻은 소련은 북한을 통해 남한을 적화통일하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 전쟁 또는 6.25의 발생이죠. 한국 전쟁은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이면서 큰 교훈을 줍니다. 자칫하면 핵전쟁도 일어날 수 있다는 교훈과 상대방의 영토 침공이 세계 대전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줬습니다. 이는 뒤이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북베트남을 공격하지 못하는 원인이 됩니다.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은 전범국이었던 일본을 급하게 국제 사회로 복귀시키고 빠른 경제성장을 유도합니다. 그리고 프랑스가 물러난 자리에 대신 들어가 베트남을 남과 북으로 갈라놓습니다. 이 시기에 미국은 지정학적으로 관심이 없었던 국가에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자합니다. 한국과 베트남 그리고 대만이 그런 사례입니다. 게다가 일본 역시 엄청난 혜택을 입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를 대신해 새로운 국제 질서의 주도자로 우뚝 서면서 미국에 유리한 세계 질서를 구축하려고 합니다. 그런 미국의 행보에 예상치 못했던 사건이 터집니다. 바로 쿠바에서의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한 것이죠. 쿠바의 공산화는 미국의 턱밑에 가시가 생긴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련을 이 가시를 키워 생명을 위협하는 암으로 바꾸려고 했죠. 바로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1961년,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려던 미국과 소련은 핵전쟁 직전까지 갑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케네디가 해상봉쇄선을 그어놓고 넘어온다면 적대행위로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을 했죠. 다행히 당시 소련의 서기장이었던 흐루쇼프가 한발 양보하면서 세계는 핵전쟁의 위기에서 겨우 살아납니다. 그렇지만 안심할 순 없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이 이제 곧 시작되려고 했으니까요. 미국이 엄청난 자원을 퍼부어 동남아시아에 거점을 마려하려던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은 공산주의자들(베트콩)의 활동으로 인해 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미국은 결국 군대를 파견하였고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베트남 전쟁이 됩니다.
베트남 전쟁은 전 세계를 바꾸어 놓습니다. 미국은 엄청난 군사력과 비용을 지불하고 나서도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이 시기에 베트남 전쟁이 전 세계에 보도되고 민간인 학살 문제가 보도되면서 미국은 반전운동의 여파를 제대로 맞이합니다. 흑인 인권 운동과 맞물린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은 결국 1969년 닉슨 대통령의 선언으로 이어집니다. 이후 미국은 핵공격의 위협이 있지 않는 이상 직접적인 군사 개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게다가 이후 닉슨은 중국의 마오쩌둥을 방문하여 그동안 대립했었던 과거를 청산하고 국교를 수립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대표인 중국과 전 세계 공산주의의 대표인 소련의 신경전이 큰 몫을 했습니다. 중국과 소련의 대립 사이를 미국이 날카롭게 파고든 것이었습니다.
직접적인 군사대립은 아시아를 거쳐 서아시아 쪽으로 흘러갔지만 여전히 군사적 대립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979년까지는 말이죠. 1979년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의 공산화를 노리고자 다시 한번 냉전의 긴장을 끌어올렸습니다. 소련은 전격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고 공산화하는데 잠시 성공합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의 베트남 전쟁이 되어버립니다. 이번에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반군을 지원했고 결국 소련은 엄청난 군사비만 낭비한 채, 1989년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맞은 경제적 타격은 결국 소련의 붕괴로 이어집니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소련은 한계를 맞이합니다. 자본주의 진영의 경쟁과 성장에 밀리기도 하고 과도한 군비경쟁으로 인해 사회 다른 분야에서의 여건이 악화되기 시작하죠. 과거 인공위성을 먼저 쏘아 올릴 정도로 강력했던 소련은 결국 통제된 사회주의 경제의 한계를 보여주면서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는 개혁과 개방을 외치며 소련을 변화시키려 합니다. 그리고 동유럽에 퍼지고 있는 자유의 물결이 어느 정도 관용을 베풉니다. 하지만 이것이 소련을 망하게 된 치명타가 됩니다. 개혁과 개방은 곧 소련의 불간섭을 의미했고 이 물결이 동독을 거쳐 동유럽으로 퍼져 나가면서 결국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해체로 이어집니다. 1922년에 생겨나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은 결국 1991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러시아가 그 자리를 대체했지만, 극심한 경제난과 혼란에 빠져 한동안 국제 사회에서 별다른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게 됩니다.
냉전은 결국 미국의 승리로 끝이 났지만, 과거 소련이 만들어놓은 동서 간의 대립과 사회주의 국가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러시아는 독립국가연방을 조직하여 옛 소련의 울타리를 재건하려 시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울타리를 무너뜨리려는 나라에게는 철저한 응징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도 바로 이런 냉전의 흐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립되었던 북한이 다시 러시아와 손을 잡으면서 숨을 쉬게 된 것도 과거 소련 시절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냉전은 끝이 났지만, 언제 또 미국 중심의 질서가 위협받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만약 또다시 최강대국이 경쟁한다면 다시 신냉전(Neo Cold War)이 발생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번 글은 유난히 기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주제는 제3세계가 되겠네요. 이제 2편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