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는 것에 한계란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어버린..
첫 장래희망은 서점 주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책 읽기가 유일한 낙이었던 시절이었다. 응팔에 나왔던 쌍문동 근처 수유리 주택가 좁은 골목에서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고 낡아빠진 공으로 축구를 하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결국 내가 제일 좋아한 놀이는 책 읽기였다. 책을 읽으면 아버지와 봤던 영화들처럼 머릿속에서 그 장면들이 펼쳐지면서 주인공과 함께 우당탕탕 모험을 떠나는 것이 좋았다. '홍길동전'이나 '사 씨 남정기' 같은 전통 어린이 소설 속의 권선징악도 좋았고 '허클베리 핀'이나 '엉클 톰의 오두막집' 같은 미국 소설도 읽으면서 알지도 못하지만 장면장면들이 영화 속 장면처럼 펼쳐지니 다른 놀이가 필요 없었다. 도서관도 없던 동네의 가난한 집에서 보고 싶은 책을 모두 다 사서 보지는 못하기에 내 장래희망은 서점 주인이었다. 서점 주인이 되면 보고 싶은 책들을 다 볼 수도 있고 책을 팔아서 돈도 벌 수 있으니 꿩 먹고 알 먹고, 도랑치고 가재 잡고, 누워서 떡 먹는 직업이 아닐 수 없었다. 자영업이 누워서 떡 먹을 정도는 아니겠지만 학교에서 독서왕 상도 받고 하면서 서점 주인의 꿈은 초중고 12년간 굳건히 지키고 있는 내 유일한 장래희망이었다.
스무 살이 되었고 대학에 들어가 부모님이 원하는 공무원이 되려면 행정학과를 가야 했다. 착한 장남이기에, 부모님의 소원을 이뤄드려야 하기에 공부를 해야 했지만 그 시기를 결국 넘지 못하고 대학로에 들어가 공연일을 시작했을 때 내 장래희망은 조명감독으로 바뀌었다.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월급 80만 원도 제때 받지 못하고 공연장 사장과 싸우기도 했지만 결국 남았던 이유는 내 손을 통해 깜깜한 암전이 걷히던 극의 시작과 커튼콜을 마지막으로 무대가 마감되는 암전이 이루어질 때의 뿌듯함 이었기에 하루하루가 참 행복했다. 2시간여를 배우와 스탭 모두 함께 하지만 시작과 끝을 내가 맡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게 되면서 그 공연의 빛을 내가 다 만들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마지막엔 결국 새드엔딩으로 끝나긴 했지만 2년 반동안 내가 가졌던 꿈은 가장 빛나는 꿈이었다.
서점 주인이 되고 싶다는 어릴 적 꿈과 다시 이어지지만 서점 직원으로 일을 하게 되면서 단순히 꿈이 아닌 현실로서의 생활을 6년 2개월 동안 했다. 힘들었다면 힘들었고 재미있었다면 재미있었던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내세울 것이라곤 성실함밖에 없었기에 시간이 가면서 회사의 인정도 받고 하면서 승진은 했지만 동시에 꿈 따위는 사치라는 차가운 현실에 주저앉게 되는 시기였다. 대학로에서 만난 쏭과 결혼도 했고 호은도 낳고 이사도 세 번이나 하면서 지낸 6년 2개월 동안 내 장래희망은 서점 주인이나 조명 감독 같은 특정 직업이 아닌 가족의 안위로 바뀌었다. 이번 달 카드값을 걱정하고 오늘 저녁 메뉴를 고민하며, 친가와 처가 부모님들의 건강을 걱정하는 삶을 살면서 점차 장래 희망이라는 단어 자체를 잊게 되었다. 제주로 이주하게 된 이유도 '뭐가 되고 싶다'라던가 '뭐를 하고 싶다'가 아니라 '저녁은 집에서 먹고 싶다'와 '쏭의 힘듦을 덜어주자'였기에 무슨 일을 하든 상관이 없었다. 그렇게 화물기사로 9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예정인 듯하다. 빠듯한 살림을 꾸려나가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이기에 후회는 없다고 다짐하는 마음 한쪽 구석에 조금의 씁쓸함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호은이 네 살이 되어서 제주에 왔다. 나는 열세 살 때 처음 수학여행에 오는 비행기를 탔지만 호은은 네 살 때부터 비행기를 타고 육지를 왔다 갔다 하면서 비행기를 좋아하기 시작한 듯하다. 공항 탑승구부터 활주로에 대기 중인 비행기들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곤 했다. 할아버지가 뭐 사줄까 하시는 물음에도 비행기, 생일에도, 크리스마스에도 비행기 노래를 불렀다. 단순 장난감 비행기가 아니라 항공사에서 파는 비행기 미니어처를 콕 집어서 사달라고 하는 호은에게 당해낼 도리가 없었기에 국내 항공사 비행기 미니어처는 거의 다 집에 있는 듯하다. 호은의 친구들이 변신 로봇을 갖고 놀 때도 혼자 비행기 미니어처를 가지고 놀더니 아이돌을 좋아하고 총 쏘는 게임을 하는 시기인 지금 호은은 비행기를 조종하는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고 있다. 되지도 않는 파일럿 용어를 하면서 까불기에 문득 생각이 나 영화 '탑건 2'를 보여줬다. 실감 나는 전투기 조종 장면을 보던 호은이 영화가 끝난 후 '탑건 1'도 보고 싶다고 해서 다음날 보여줬더니 더 눈이 뒤집혔다. 그러면서 자기는 '탑건 1'이 더 좋다며 지금은 전투기들이 출격하는 오프닝을 틀어놓고 너무 멋이 있다고 눈물을 흘리며 보고 있다. 그렇게 호은의 장래 희망은 공군사관학교를 가서 전투기 조종사를 하겠다는 것으로 정해졌다. 안과 정기검진에 가서 난시로 안경을 쓰고 있는 것이 파일럿에 문제가 되지 않겠냐고 의사에게 꼬치꼬치 물어봤다는 쏭의 전달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적어도 가정형편에 맞춘 장래 희망이 아닌 것에 감사하다.
나는 그랬기에 호은은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던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