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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분 일기-14. 만화

한번 내뱉은 말은 절대 굽히지 않아 - 나루토

by 선호

글자로 가득한 책도 좋지만 만화책도 좋아한다.


90년대 중반 아파트 단지 안에 영화마을이라는 대여점이 있었다. 비디오테이프와 DVD 뿐만 아니라 만화책과 소설책들을 빌려주는 가게였다. 아버지가 쉬는 날이면 비디오나 DVD를 빌려 영화를 보기도 했지만 성인극화 만화책을 몇 권씩 빌려 보시기도 했다. '신이라 불리는 사나이' 나 '대털' 같은 스포츠 신문에 연재되던 만화책들을 잔뜩 빌려서 두 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뚝딱 읽고 반납하라고 심부름을 시키셨는데 그렇게 당일 반납을 하면 얻을 수 있는 쿠폰 도장으로 내가 보고 싶은 책을 빌릴 수 있었다. 그럴 때면 나도 '드래곤 볼' 같은 만화책을 한두 권 빌려서 볼 수 있었다. 한창 학교에서 유행하던 '짱'이나 '20세기 소년', '열혈강호' 같은 만화책들도 그 시절에 그 대여점에서 빌려서 봤던 추억이다.


대학교에 들어와서 한창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시기에 PMP라는 것이 나왔다. 워크맨이나 MP3 플레이어 같이 음악을 듣는 것을 넘어서 영상을 휴대용으로 볼 수 있다는 최첨단 기계였다. 두 달여간의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50만 원 정도였던 PMP를 샀다. 인터넷 안에서 저작권이 지금 같지 않았던 시절이기에 불법 다운로드로 내려받은 영화와 미드, 일본 애니메이션들을 PMP에 넣어 서른 다섯 정거장을 가야 하는 통학길을 버텨냈다. 어느 전자기기이든 발매 초기에는 오류 투성이었기에 30분짜리 영상 하나를 보는데 온갖 에러와 재부팅을 거쳐 1시간이 넘게 걸리긴 했지만 나름 얼리어답터라는 쓸데없는 자부심을 부리며 버텨냈다. 그 시기에 시작됐던 애니메이션 '나루토'에 빠진 나를 보며 학교 친구들은 '이런 바보 같은 오타쿠랑 같이 놀아야 하나'라는 생각으로 손절하려고 했다고 한다. 아직 친구로 남아있는 것을 보니 참으로 고맙다.


세간에서 이야기하는 '오타쿠'라는 이미지까지 갈 정도로 만화에 빠져들어 보는 것은 아니지만 온갖 소설책을 읽었던 만큼은 만화책을 본 듯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님의 지브리 스튜디오 애니메이션도 좋고 '20세기 소년'의 우라사와 나오키 님의 만화책도 수도 없이 봤다. 왠지 만화는 일반 책과는 달리 '읽었다'라는 말보다 '봤다'라고 해야 할 듯하다. 'H2'나 '아기와 나' 같은 순정만화에서부터 '피안도'나 '기생수' 같은 SF 만화까지 어느 순간 재미있겠다는 생각에 꽂히면 만화방에 가서 전권을 쌓아놓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곤 했다. 단순히 재미로 보는 만화도 있지만 나도 몰랐던 인간의 심리와 세상의 이치에 대한 심오한 철학이 담겨있는 만화들도 많이 있기에 애니메이션이던 만화책이던 어떤 주제로 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지 생각하려고 노력하면서 보곤 한다. '화자의 숨겨진 의도를 찾아보시오' 같은 수능문제는 아니겠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느낄 때 글자 책을 읽을 때와 비슷한 만족감을 가지게 된다.


그런 것을 호은에게도 알려주고 싶지만 쉽지 않다. 게임과 만화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쏭에게 아빠와 만화 보기를 교육적 측면으로 설득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본인이 결혼한 남편이 판타지 소설인 '드래곤 라자'를 통해 가치관을 성립했고 만화책인 '20세기 소년'의 주인공 '켄지'와 '몬스터'의 주인공 '덴마'를 통해 좋은 인간이 되기로 결심을 했다고 하지만 아들에게 아빠가 보여주는 만화는 유해영상일 뿐이라 참 힘들다. 물론 디즈니의 '인사이드 아웃' 같은 애니들이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답겠냐만은 사춘기에 들어선 남자아이에게 필요한 '용기'나 '우정' 그리고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같은 것을 심어주기 위해 내가 고른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은 마뜩잖아 하기에 내가 참 불만이 많다. 쏭이 퇴근 전이나 다른 일정으로 외출 중에 몰래 보여주다가 걸려 혼이 나기도 해서 참 섭섭하다. 웹툰이 원작이 되어 영화나 드라마로 탄생하는 시대에 만화를 본다고 타박을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해 저녁자리 토론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이기지는 못하기에 매우 분하다.


책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는데 그 책 안에 만화책도 포함이라고 말하고 싶다.

다큐만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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