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했다. 이사를 하면 주변 정세?를 살피는데 그중에 중요한 일 중에 하나가 나만의 미용실을 찾는 것이다. 여자들에게 미용실 언니는 뷰티 어드바이저, 나만 그런가? 아무튼 미용실은 중요하다. 연예인도 아니면서 중요하다. ㅎ 작은 1인 미용실이 좋다. 혼자 자신만의 멋으로 꾸려가는 공간.
우선 동네 미용실 몇 군데를 돌아다니며 관찰하는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 공간의 느낌과 청결상태 등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미용실 언니의 캐릭터가 중요하다. 우선 웃는 상이 좋다. 학생들에게 반말을 하지 않고 친절하면 합격선. 동네 아줌마들이 음식을 나눠주는 분위기면 합격. 아줌마들은 까다롭다. 그녀들이 음식을 가져다준다는 것은 미용실 언니가 동네에 잘 자리 잡았다는 증거. 이번에 간 미용실에서 무화과 스콘, 대파 스콘, 샤인 머스캣과 밤을 얻어먹었다. ㅎ 얻어먹으러 가는 건 아니고; 다음에 나는 뭘 사서 나눠드릴까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아무래도 머리에 대한 프로의식이겠다. 나는 볼 수 없는 나의 뒤통수, 뒤꼭지를 유심히 살펴보며 나를 가장 돋보이게 하는 스타일링을 연구하는 모습. 내가 원하는 바를 귀 기울여 듣는 자세. 내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전문적 소견을 보태어 적절한 선에서 협상하는 태도. 결코 내 말에 휘둘리지도 않고 자신의 의견만을 강요하지 않는 자세가 중요하다. 그리고 머리를 다루는 동안 나름 진지한 태도. 가끔 명랑한 대화. 적당한 내버려 둠. 완성작을 함께 보며 감탄하는 연기. 자기, 진짜 분위기 확 달라졌다~라는 멘트와 함께.
진로상담 일을 오래 하다 보니 직업인을 만나면 열심히 관찰하고 대화를 할 수 있을 때면 언제든 인터뷰 형식의 대화를 하게 된다. 늘 첫 질문은 '이 일을 하면서 즐거운가?'이다. 대답을 말로 듣는 것도 좋지만, 그 질문을 받았을 때 그 사람의 표정이 정답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말로는 아니.. 뭐 일은 다 힘들지,라고 말하면서도 얼굴에 그늘이 지지 않고, 뭐 이런 질문을 다하니? 하는 쑥스러운 듯한 느낌이 있다면, 그는 그 일을 어느 정도 즐기고 있다고 볼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언니, 언니는 일하는 거 즐거워요?"
"어머, 자기 웃긴다. 그런 질문은 또 처음이네 ~~"
"그냥요, 미용실에서 일하는 건 어떤가 해서요"
"음.. 뭐 힘들 때도 있지만 난 즐거워" (와우~)
"어떤 점이 즐거워요?"
"우선 제일 좋은 건 사람들이 예뻐져서 나간다는 거야" (이런 멋진 관점이라니!)
"아...."
"내가 사브작 사브작 머리를 만져줬더니 마치고 뿌듯한 표정으로 나갈 때 기분이 좋아. 왜 마지막에 웨이브나 컷 나왔을 때 의자 돌려서 거울로 뒷머리 보여주잖아. 그때 사람들 표정 보는 재미가 있어. 표정이 없는 사람들도 약간은 자기 딴의 만족을 표시하는 표정이 있거든."
"아..."
"내가 큰 병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을 했었거든. 거기서 보니까 병원에서 일하는 분들 힘들어 보이더라고. 사람들 다 아파서 소리 지르고 짜증 내고. 나도 평소 신경질 안 내는데 아프니까 미치겠더라고. 괜히 간호사한테 짜증 내고 나중에 미안해서 또 마음이 무겁고. 그거 반복하다 알았지. 아, 나 좋은 일 하는 거였구나, 머리 만져주는 거 사람들 기분 좋게 하는 직업이구나.. 얼른 다시 일하고 싶다... 그랬지."
"아... 아프셨었구나... 지금 이렇게 다시 즐겁게 일하시니 다행이에요"
"그냥 그렇더라, 머리하러 오는 게 별거 아닌 거 같은데 이게 난 별거 같아. 대체로 사람들 좋은 날이 있을 때, 데이트나 어디 여행 가거나 무슨 행사가 있을 때 머리하는 경우 많거든. 설레는 이야기 듣는 것도 좋고, 일상사 듣는 거도 좋고. 사람들 얘기에 힘이 나기도 하고, 힘내라고 응원해주기도 하고. 그냥 마음 나누는거더라고. 머리하는 거 아니고. 그런 것들이 즐거워"
"언니는 진짜 멋진 직업인이네요~"
"그런가. 자기도 즐겁게 살아, 가끔 머리하고 예뻐지면 좋은 데 가서 분위기도 잡고 즐겁게 보내. 오래 아파보니까 알겠더라고. 나 즐겁게 살다 가기로 했어."
뭐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들을 생각은 없었는데, 그녀의 힘든 사연까지 들어버렸고 인생 철학까지 들어버렸다. 무라카미 류의 '식스티 나인'라는 책을 고등학교 때 무척 통쾌하게 읽은 기억이 있다. 기억나는 문장은 바로 이것.
"즐겁게 살지 않는 것은 죄다. 유일한 복수 방법은 그들보다 즐겁게 사는 것이다."
책의 주인공은 고3 학생으로, 그가 말하는 복수할 '그들'은 기성세대다. 나도 어른들에게 반항하며 내 멋대로 살 거야! 하던 시절이었기에 더 공감하고 읽었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즐겁게 살겠다는 생각을 했던 혈기왕성했던 청춘의 시절은 지나갔다. 이제는 누군가와 상관없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즐겁게 살고 싶다. 남들이 뭐라 하든 간에, 자기 일을 즐겁게 하는 사람은 당해낼 수가 없으니까.
이 미용실 어쩌지. 아주 오래도록 단골이 돼버릴 것 같다. 펌도 아주 잘 나왔다. 가을엔 웨이브니까. 머리를 찰랑이며 즐겁게 걸어 나왔다. 가을 햇살이 눈부시다.
당신도 즐겁게 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