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진심으로 풍요롭게 살기

by 사과이모


아침 6시부터 밤 11시까지 촘촘하게 짜여있는 날들을 보냈다. 식사시간 단축을 위해 주먹밥을 입에 넣고 1분 만에 씹은 후, 지하철을 타는 시간까지 계산한 적도 있다. 일상을 사는데 한없이 완벽을 향해 달려가다가

주말쯤 세상에서 가장 게으름뱅이로 흠씬 두들겨 맞으며 살았다. 한 치의 오차가 나지 않아야 안심이 되었고, 내가 그린 그림대로 되어야 숨이 쉬어졌다. 자면서 깨어있었고, 앉아있으면서 마음은 뛰었고, 뛰어다니면서 다음 순간 속에 살았다. 말 그대로 내 마음은 전쟁통이었다.


나만 이런 게 아니라고, 더 열심히 살라고 나에게 잘못된 정보를 송신했고, 착실하게 수신하며 살던 어느 날 문득, 나는 멈춰버렸다. 내가 멈춘 것이 아니라 멈추어진 것 같다.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들이 '더 이상은 안돼. 이제 멈춰'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던 날들을 거쳐... 나는 뚜렷한 계획 없이 15년간의 직장생활에 점을 찍게 되었다. 치열하게 살았던 삶의 반대쪽에는 '느리게 사는 풍요로움'이라는 선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느리게 진심으로 사는 삶

쉬면서 내가 하기로 한 것은

1. 의도적으로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 가지기

2. 의도적으로 느리게 걷기

3. 매일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어슬렁거리기 (운동하기 아님 주의)

4. 하루 중 자주 1분 명상하기

5. 감사일기 쓰기


이 중 느리게 진심으로 사는 방법에 가장 가까운 것이 '어슬렁거리기'인 것 같다.


'어슬렁거리기'의 사전적 정의는

"몸집이 큰 사람이나 짐승이 몸을 조금 흔들며 계속 천천히 걸어 다니다"


유사어는 꾸물거리다 / 배회하다 / 서성거리다 / 산책하다/ 쓸데없이 돌아다니다 / 방랑하다 / 헤매다 / 돌아다니다 / 거닐다 / 방황하다 / 구경하다


생각보다 부정적 의미가 많은데, 이 중에 나는 '거닐다'가 제일 마음에 들어 내 맘대로 정의를 내려보았다.


"어슬렁거리기"


“ 딱히 할 일 없이, 아무런 생각 없이, 지금 여기 발을 디딜 때 느껴지는 발의 촉감을 느끼는 것.

지저귀는 새소리, 빵빵거리는 경적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재잘대는 소리를 듣는 것.

눈앞에 보이는 이정표, 신호등, 나무, 꽃,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

지금 이 순간을 음미하며 거니는 것 ”


이것이 진심으로 지금 여기에서 느리게 사는 것, 이것이 내가 내리는 '어슬렁거리기'의 정의이다.


나는 어슬렁거리며 살고 싶다. 동네 시찰 나가듯 뒷짐을 지고 거닐며 사람들을 관찰하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면서 내 삶의 여백을 가지면서 지금 여기에 살고 싶다. 인생은 자기만의 사전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원하는 삶에 대해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물어본 것이 언제였던가? 어떤 삶을 원하는가? 내가 원하는 삶에 대해 몇 마디 문장으로 정의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위해, 왜 사는가?


이효리처럼 ‘나는 돈이 많잖아요’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소한 차이가 있을 뿐, 느리게 진심으로 사는 나의 삶은, 간소하고 소박하지만 충만하다.



#돈에 시간을 팔지 않는, 풍요로운 삶


사람들은 풍요롭게 살기를 원한다. 많은 이들에게 ‘풍요 = 돈’이라는 수식어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하지만 시간의 풍요도 그만큼이나 충만감을 준다. 마치 세상에 시간은 다 내 것이라는 듯 시간에 대한 느긋한 태도는 삶을 풍요롭게 한다. 돈에 시간을 팔지 않기로 결정한 후, 시간은 내게 넉넉하게 주어졌다. 일상에서 그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


비행기

제주행 비행기의 착륙 알림이 울리고, 비행기 문이 열리기도 전에 마치 자석에라도 이끌리듯 일제히 일어나는 사람들 속에서 ‘의도적으로 천천히 나가기‘를 결정해본다. 마치 시간의 풍요가 나에게만 있는 양 가만히 앉아서 여유를 부린다. (빨리 나가고 싶어 안달대는 마음의 소리를 가라앉히며) 사람들이 모두 나간 후, 고요해진 비행기 안을 스윽~ 바라보며 우아하게? 걸어 나가 본다. 따뜻한 미소로 스튜어디스분들께 '감사합니다'를 전하는 센스 발휘까지 하고 나면 이게 뭐라고, 막 내가 여유롭고 부유해진 느낌. 15분 정도 시간이 더 소요된 것치고 대단히 평온하게 여행이 시작되는 기분.. 15분 일찍 나간다고 상 받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살았을까? 그것이 나의 조급함의 습, 도시 생활의 습이구나..


머리 감기

머리를 감다 보면 헤어트리트먼트를 3-5분 발라두고 헹구라고 나와있다. 그동안 나는 그 3분을 기다리지 못했구나 알아진다. 30초 기다리면서도 조급했고, 바르고 바로 감아버리기도 했고, 뭘 뒤집어쓰고 다른 생산적인 일을 하기도 했다. 1분 1초가 아까웠던 건가? 뭣이 그리 바빴을까? 오늘은 헤어트리트먼트를 머리에 꼼꼼히 바르고 아무것도 안 하고 멍 때리고 서 있었다. 물소리 들으면서, 호흡도 바라보면서.. 멋지게 이름 붙이자면 3분 머리 감기 명상... 금세 개운해지고 조용해지는 마음..


매 순간 문득, 나에게 물어본다. 지금 나는, 이 순간에 존재하고 있는가?

조급한 성미인 시간이 어쩐지 온순해지는 느낌..

지금 이 순간, 내게 주어진 시간의 풍요를 고요히 느껴본다.




keyword
이전 22화내게 오신 귀한 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