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가짜이민)
독일에서의 열흘, 기억에 남는 건 학교도 집도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뜻밖의 순간들이었다.
작지만 서툼과 웃음이 어울렸던 순간들 말이다.
낯선 언어와 절차에 눌려 하루하루가 전투 같던 낮이 끝나면, 밤은 달랐다.
닫힌 상점 유리창을 들여다보며 내가 물었다.
“이건 무슨 가게일까?”
아들은 잠시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몰라.”
둘이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길모퉁이에서 불쑥 나타난 조형물 앞에선 또 나란히 “우와—” 하고 감탄했다.
관광객도, 이방인도 아닌 듯, 그저 모자가 함께 걷는 평범한 산책.
그 평범함이 가장 편안했다.
마트 REWE(레베)에서는 주도권이 바뀌었다.
아들이 구불구불한 파스타를 들고 말했다.
“엄마, 이걸로 해 먹자!”
나는 멈칫했다. ‘저걸 어떻게 삶지? 소스는 또 뭘 맞춰야 하지?’
주저하는 순간, 아들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해보면 되지.”
그 말이 묘하게 오래 남았다.
반대로 과일 코너에서는 내가 더 들떴다.
“이거 봐, 납작 복숭아야!”
덥석 집어 드는 나를 보며 아들이 킥킥 웃었다.
“엄마가 더 애 같아.”
웃음 속에서 우리는 잠시 서로의 자리를 맞바꾸었다.
식탁 위의 모험도 이어졌다.
낯선 향신료에 잠시 주저하는 나를 보며, 아들은 먼저 포크를 들어 올렸다.
한입 먹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엄마, 생각보다 맛있어.”
그 순간 나도 용기를 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들은 이미 훌쩍 자라 있었다.
창가에 앉은 아이의 얼굴도 오래 기억난다.
턱을 괴고 풍경을 바라보던 표정은 행복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슬펐다.
“엄마, 우리… 다시는 독일에 못 오면 어떡하지?”
나는 대답 대신, 아이를 바라보았다.
열흘 동안 아이는 자랐고, 그 얼굴이 낯설 만큼 깊어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 날, 한 마리 고양이.
주차장 한복판에 태연히 드러누워 있었다.
“엄마, 얘 이름은 홍*표!”
아들이 깔깔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차가 다가와도, 사람들이 곁을 지나도 꼼짝 않는 고양이.
그 당당한 태도, 눈치 보지 않는 자유가 마음에 들어왔던 걸까.
지금도 아들의 프로필 사진은 그 고양이다.
우린 종종 말한다.
“홍*표, 잘 지내고 있을까?”
그 고양이는 어쩌면 독일을 닮아 있었다.
자기들만의 속도, 눈치 보지 않는 태도, 묘한 당당함.
열흘의 여행은 짧았지만,
밤산책, 마트, 낯선 식탁, 그리고 한 마리 고양이가 남았다.
그 사소한 순간들이 모여, 낯선 독일을 우리만의 추억으로 바꾸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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