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아는 매일 놀라고 있다. 4학년이란 이렇게 좋은 학년이었구나! 연달아 고학년만 하던 윤아에게 4학년은 달고도 단맛이었다. K도 윤아만큼이나 4학년을 선택한 것을 아주 만족하고 있었다. 5, 6학년에 비해 수업도 빨리 끝나는 데다 아이들은 무엇이든 열심히 했다. 반항도 조소도 없는 평화로운 교실. 게다가 수업을 준비하기도 편했다. 1학년은 한 시간 동안 교과서 한 장을 가지고 수업해야 해서 진땀을 뺐다면 5, 6학년은 수업 내용이 너무 많아서 한 시간 안에 다 못할까 봐 시간에 쫓기며 수업했었다. 그런데 4학년은 딱 적당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초등학교의 골디락스 존! 고작 민원 때문에 다들 이렇게 좋은 학년을 안 썼다고? 이해할 수 없었다.
학교가 끝나고 K와 함께 맥주를 마시러 간 날이었다. 윤아는 K에게 말했다.
"여기는 천국이고 애들은 천사예요"
"맞아요. 4학년 진짜 괜찮은 거 같아요."
"근데... 저는 고학년만 해서 그런지 좀... "
"아, 윤아선생님은 고학년만 했으니까 그럴만해요."
한 달쯤 지나자 윤아의 천국에 미세한 균열이 보이기 시작했다. 윤아는 어린이들이 걸어오는 사소한 대화가 좀 귀찮아졌다. 이런 식이었다.
“저 이거 다 썼는데…”
윤아는 한 번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얘기를 왜 나한테 하지? 아이는 계속 쭈뼛거리더니 이어서 말했다.
“저 다 써서 풀이 없는데….”
풀 빌려줄까? 하면 끝날 대화였다. 그런데 이런 대화가 계속되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자기에게 이런 문제가 있다고 말끝을 흐리기만 할 뿐 원하는 것은 말하지 않는 아이들이 너무 많았다. 집에서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어른들이 다 알아서 해줬겠지. 윤아는 모른척하고 말했다.
“아~ 풀이 없어? 짝한테 빌려달라고 해봐.”
“안 빌려 준대요.”
“그럼 모둠에서 빌려봐.”
아이는 자리에 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왜? 빌려 달라고 말하기 싫어?”
“네”
“그럼 어떻게 하지?”
“선생님 풀 빌려줄 수 있어요?”
윤아는 아이의 입으로 풀을 빌려달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빌려주었다.
“이거 어디다 버려요?”
종이 조각을 들고 나온 아이가 물었다. 작은 종이조각은 종이류가 아니라 일반 쓰레기라고 알려준 이후 아이들은 이 종이조각이 종이류인지 일반쓰레기인지 와서 물었다.
“이 종이가 손바닥보다 커?”
“아니요.”
“그럼 이건 종이류야? 일반쓰레기야?”
“일반 쓰레기요.”
또 한 번의 사소한 대화였다. 윤아는 일일이 대답해 줘서는 끝이 없다고 생각하고 분리수거통 앞에 "손바닥보다 작은 종이는 쓰레기통에 버리세요." 안내문을 붙였다. 안내문 앞에서 한참 고민하던 아이가 윤아에게 왔다.
“이거 쓰레기통에 버려도 돼요?”
윤아는 같은 대화를 반복했다.
“이 종이가 손바닥보다 커?”
“아니요”
“그럼 이건 종이류야? 일반쓰레기야?”
“일반 쓰레기요.”
가끔은 안내문도 소용이 없었다. 이 아이는 정답을 원했다. 자기가 판단한 것도, 친구가 알려준 것도 정답이 아니었다. 선생님이 말해주는 것만이 정답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스스로 판단하지도 않고 친구에게 묻지도 않고 바로 선생님에게 왔다.
“바탕 꼭 색칠해야 돼요?”
미술 시간의 단골질문도 귀찮았다. 윤아는 이 질문에 항상 “네 해야 돼요.”라고 대답했지만 매주 아이들은 지치지도 않고 같은 질문을 했다.
“지우는 안 했던데…”
“지우는 선생님한테 안 물어봤거든.”
“그럼 안 물어보면 안 해도 돼요?”
“안 했는지 몰랐으니까 하라고 안 한 거지”
“그럼 지우도 바탕 색칠해야 되죠?”
“지우도 바탕 색칠하면 좋겠어?”
“네”
“왜?”
“바탕은 꼭 색칠해야 되니까요.”
“그래, 그럼 바탕은 꼭 색칠하라고 얘기해 줘야겠네. 얘들아~ 바탕은 꼭 색칠하는 거야 알았지?”
사실 미술 시간은 바탕을 색칠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다가 아니다. 수많은 '해도 돼요' 변형 질문이 빗발친다.
"제 맘대로 바꿔서 그려도 돼요?"
"저 이거 말고 이거 붙여도 돼요?"
"친구랑 재료 바꿔서 써도 돼요?"
처음에는 "와~ 좋은 생각이다! 더 멋있겠네!" 하고 대답했지만 이제 슬슬 지치고 있었다. 이제는 앵무새처럼 반복해서 말할 뿐이다.
"스스로 결정하세요."
“선생님 저 다했는데 이제 뭐해요?”
오늘은 이 질문이 왜 안 나오나 했다. 윤아는 이미 칠판에 ‘다 한 사람은 책 읽기’라고 써놨지만 다시 한번 말해줬다.
“책 읽으세요.”
"은우는 책 안 읽던데..."
"은우는 뭐 하고 있는데요?"
"문제집 풀고 있어요. 은우도 책 읽으라고 할까요?"
"아니요, 문제집 계속 풀게 두세요."
“그럼 문제집 풀어도 돼요?”
“네, 문제집 풀어도 돼요.”
“야! 문제집 풀어도 된대!!”
그림 그려도 되냐, 숙제해도 되냐 와 같은 변형 질문이 나올 것이 뻔했으므로 덧붙여 말했다.
“그림 그려도 되고 숙제해도 됩니다. 다른 친구들 방해되지 않게 혼자 할 수 있는 활동 하고 계세요.”
윤아는 맥주 한잔을 시원하게 비우고 4학년들은 왜 이렇게 자주 나오냐고 푸념했다.
"윤아 선생님 1학년도 해보셨다면서요."
윤아는 1학년 시절을 생각하자 차가운 맥주가 아랫배로 모여드는 것 같았다. 배가 살살 아파졌다. 체온이 내려가는지 팔에 닭살이 살짝 돋았다. 그랬다. 1학년은 선생님이 수업을 하고 있든지, 밥을 먹고 있든지, 화장실에 가고 있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달려 나와서 질문을 했다. 작은 목소리로 삐약삐약.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던 신규시절. 작년에 1학년을 했던 K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4학년은 진짜 천국이 맞아요."
천국에 있는 흠집 그거 뭐 얼마나 크다고 푸념을 했나. 가끔 윤아는 K앞에서 자신이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K는 힘들어도 힘들다는 내색 않고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데 자신은 작은 일 앞에서도 일희일비, 경거망동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이리보고 저리 봐도 K는 자신보다 레벨이 높아도 한참은 높다. 천천히 맥주를 넘기는 K를 바라보며 윤아는 생각했다. 오늘도 K가 있어서 하루를 무사히 넘겼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