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 Jung Seon
겸재 정선 謙齋 鄭歚
인왕제색도 仁王霽色圖
1751년
138.2 x 79.2㎝
종이에 먹
국보 제216호
1751년 정선이 이 작품을 그린 후, 정선의 손자 정황이 소유하고 있다가, 조선 의정부 영의정 직책을 지낸 문신 심환지가 정선의 작품 7점을 소유하는데 그 중 하나가 된다. 심씨 집안에서 내려오다가 일제강점기 말 개성 최씨 집안인 ‘대동신문’ 편집국장인 언어학자 최원식의 소유로 넘어간 후, 개성의 부호(사업가, 언론인, 수집가)인 진호섭이 소유하게 된다. 진호섭은 1948년 삼성무역주식회사 사장을 역임하였는데, 이 인연으로 이 작품이 삼성가에서 소유하게 되지 않았을까 추정해 본다. (황정연, ‘심환지의 서화수집과 수집-18세기 경화사족 수장가의 재발견’, 『대동문화연구』105호)
겸재 謙齋 정선 鄭歚, 1676 - 1759,
조선 시대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이다. 겸손할 겸 謙, 공경할 재 齋 인 겸재는 정선이 주로 쓰던 호인 겸재(謙齋), 겸초(兼艸), 난곡(蘭谷) 중 하나로, ‘주역 周易’ 의 64괘 중 15괘인 ‘겸괘 謙卦’에서 따온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한다’ 라는 뜻이다. 정선의 성품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게끔 하는 호이다.
1676년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현 경복고등학교 자리에서 양반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52세까지 그곳에서 살다가, 인왕산 아래 인곡정사(현 옥인동)로 이사해 생을 마감하는 84세까지 이곳에서 생활한다. 그래서 인왕산은 그에게 가장 친근한 산인 것이다. 현재 경복고등학교 자리에 그의 집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 하나가 세워져 있는 이유이다.
20세에 그림을 잘 그리는 능력을 추천받아, 국가의 필요한 그림을 그리는 도화서 圖畵署 의 화원이 되어 꾸준히 관료생활을 한다. 더불어 여행을 좋아해 금강산 등 전국의 여러 명승지들을 다니면서 많은 작품을 남긴다. 정선 나이 65세에 약 5년 동안 양천 현감을 지내는데, 그 연유로 현재 강서구 양천로에 겸재 정선미술관이 있다.
정선은 생각보다 아주 가까이 우리와 함께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는 화가이다.
주머니에 가지고 있는 천 원 지폐를 한 번 꺼내어 보자. 지금의 천 원 지폐 앞면에는 퇴계 이황의 초상이 그려져 있고, 그 뒷면에는 이황이 제자를 가르치던 곳이었던 계상서당과 주변 산수를 담은 풍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이 그림이 바로 정선이 그린 ‘계상정거도’ 작품이다.
그럼, 그의 이름 앞에 항상 붙는 '진경산수화' 란 무엇일까?
조선 전기에는 중국의 송원 宋元 명청 明淸 시대에 발달한 다양한 산수화풍에 영향을 받아 수용하면서 우리의 산수화도 발달하였다. 이 당시 사대부들이 이상적 모델로 간주해 온 산수화는 중국 문인들이 주로 그렸던, 작가의 상상과 느낌으로 그려낸 관념산수화 觀念山水畵 였다. 실제로 산수를 보고 그리기보다는 작가적 상상력, 관념 속의 모습으로 산과 풍경을 더 웅장하고 드라마틱하게 그려낸 산수화를 최고로 꼽았다. 우리가 딱 봤을 때, 너무나 멋진 산수의 풍경인데 실제로 저런 모습의 산이 있을까, 현실에는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거야, 라는 생각이 드는 산수화가 바로 관념산수화이다.
이 시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안평대군이 꿈에 무릉도원에서 놀았던 꿈 얘기를 안견에게 말한 후 3일 만에 그려낸 산수화인 안견의 ‘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 이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현재 일본에 있는데, 일본에 불법 반출되었다는 정확한 자료가 없어, 현재까지도 일본 나라현의 덴리 대학 중앙 도서관이 소유하고 있다. 언제 우리나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조선 중기에는 초기의 산수화풍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자연경관과 명승지를 직접 보고, 실제 우리의 산수의 모습을 그려서 실용적 목적으로 사용했던 실경화 實景畵 또는 실경산수화 實景山水畵 가 발달하였다.
조선 중, 후기에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가, 실제 우리의 자연경관을 보고, 실제의 모습에서 느꼈던 작가의 감동을 화폭에 최대한 담아내기 위해 실제 모습에 얽매이지 않고 작가가 더하고 빼고 생략하고 과장하는 작업을 거쳐 그려낸, 참진 眞, 경치 경 景 인 진경산수화 眞景山水畵 가 발달하였다. 그 대표적인 화가가 정선인 것이다.
이러한 진경산수화는 크게는 실경산수화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가 그린 금강전도를 보면 진경산수화의 묘미를 가장 극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 금강산의 모습이 이처럼 원형으로 빙 둘러져 있진 않을진대, 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빙 둘러진 금강산의 아름다운 여러 봉우리들의 모습에서 어마어마한 감동을 온몸으로 느끼게 만든다.
조선 후기에는 또한 서민의 모습을 담담하게, 조금은 해학적으로 그린, 서민이 주인공인 풍속화가 발달하였는데, 그가 바로 단원 檀園 김홍도 金弘道 (1745 -?)이다. 사실 김홍도는 우리에게 풍속화가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산수화, 불화(불교) 등도 많이 그렸던 화가이다.
이 시기에 서양 미술은 어느 정도에 와 있었을까?
르네상스 Renaissance 에서 신고전주의 Neoclassicism 정도의 사이이다. 신고전주의 또한, 고전인 르네상스로 돌아가자 이니 크게는 르네상스 미술의 영향권에 있다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놀라운 건, 그 다음으로 오는 사실주의 Realism, 현실의 일상적인 리얼리티 Reality 를 있는 그대로 그리자는, 서민의 삶을 그리는데 관심을 보였던 서양의 사실주의보다 우리의 서민화인 풍속화가 한 세기 정도 먼저 앞서 나왔다는 건, 지나친 한국인의 시각에서의 해석일까? 우리 민족이 새삼 자랑스럽다.
이건희 컬렉션, 인왕제색도 仁王霽色圖 , 1751년
인왕은 인왕산의 ‘인왕’ 일 테고, 그럼, 제색은 무슨 뜻일까?
비 갤 제 霽, 색 색 色 으로 비가 갠 인왕산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위 오른쪽에 쓰여진 신미윤월하완(辛未閏月下浣)이란 글을 보니, 신미년 윤달 하순이란 뜻인데, 그럼 그 당시 신미년인 1751년 윤 5월 20~30일(양력 7월 말) 임을 알 수 있다. 왕과 부서 등의 일을 기록한 그해 승정원일기에 ‘지루한 장마 끝에 윤 5월 25일 오후가 되어 갰다’ 는 기록으로 보아 이 날에 그린 걸로 추정한다.
1751년, 이 해가 정선의 나이 76세이다. 대단하다. 그 노년의 나이에 이렇게 힘찬 필치로 최고의 걸작을 그려냈다. 또한, 이 날짜로부터 약 5일 후인 윤 5월 29일에 정선의 절친한 친구인 다섯 살 더 많은 사천 이병연이 죽은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이 친구 이병연의 쾌유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린 게 아니겠느냐 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병연은 조선의 시인으로, 정선이 그림을 그려 보내면 이병연이 시를 붙이고, 이병연이 시를 써서 보내면 정선이 그림을 그리는, 그 당시 최고의 놀이를 나눴던 친구이다. 서로 시를 받고 그림을 받을 때 얼마나 설레고 좋아라 했을까? 이번에는 내 친구가 어떤 시를, 어떤 그림을 보냈을까? 어떤 시일까? 내 친구는 이렇게 표현했구나, 내 친구는 이렇게 감동을 받았구나…
실제 인왕산의 모습과는 얼마나 다를까?
정선의 마음으로 그린 인왕산은 실제의 인왕산과 얼마나 다를까? 얼마나 비슷하게, 다르게 표현했을까?
산세의 형상은 어느 정도 비슷하게 그린 듯 하다. 인왕산의 모습을 띄고 있다.
그런데 실제 인왕산의 모습보다 더 웅장하고 멋져 보이지 않는가? 그 이유를 다시점으로 그렸기 때문으로 보는 이도 있다. 인왕산은 멀리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시점으로, 아래에 집이 있는 곳은 지붕이 저렇게 많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 즉 다시점으로 그려 더 웅장하고 가까운 느낌을 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림에서 보이는 실제는 아래와 같다.
바위들의 색깔이 하얀 바위가 아니라 짙은 먹으로 푹푹~ 굵고 힘차게 그려냈다.
좀 더 자세히 보자.
붓의 힘이 엄청나구나. 실제 인왕산에서 보이는 하얀 바위가 아니라 검은 바위의 모습으로 그렸다. 비 온 뒤, 물을 먹은 바위의 모습이라 검게 표현했다고 보기도 하는데 그보다는 검은 먹으로 바위의 웅장하고 묵직한 느낌을 맘껏 표현해 낸 듯하다. 검은 붓선이 결결이 살아 있어 웅장한 바위의 표면 결처럼 느껴진다. 붓에 먹을 흠뻑 적시고 눕혀서 힘 있게 여러 번 덧칠하여 그려낸 기법(적묵법)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검은 바위의 웅장함과는 대조적으로, 비 온 뒤의 아래 하얀 구름과 안개 낀 모습이 인왕산의 신비로움을 더 한다. 흑백의 절묘한 조화이다. 저 하얀 구름 자리에 뭔가를 채워서 그려 넣었다면, 지금의 감동을 느낄 수 있었을까? 아래의 하얀 구름은 사실 하얀색을 칠한 게 아니라 비워둔 종이의 모습에서 한 번 더 놀란다. 우리 그림의 아름다운 여백의 미를 여실 없이 드러낸다.
디테일한 나무의 표현이 놀랍다. 비 온 뒤 물기를 머금고 있는 모습을 작은 점들의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물을 많이 넣어 농도가 낮은 옅은 먹을 붓으로 여러 번 찍어 덧칠해 나타내, 비가 온 뒤의 물 먹은 소나무의 표현이며, 축축~ 늘어진 버드나무의 표현이며 다양한 나무들의 표현력이 대단하다. 디테일을 보는 재미가 엄청나다.
또한, 보통의 인왕산에는 보이지 않는 폭포를 3개나 그려 넣어 비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 가늠하게 해 준다.
위에 잘린 바위는 의도적이었을까? 전체 바위가 온전히 나온 것 보다는 의도적으로 잘라서, ‘얼마나 큰 바위이길래 저렇게 다 담지 못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게끔 한 게 아닐까 추측해 보았지만, 찾아보니 원래는 전체 바위의 모습으로 온전히 그렸는데, 후대에 표구하다가 안타깝게도 손상되었다고 한다.
오른쪽 아래의 집은 누구의 집일까?
여러 설들이 많다. 병상에 있는 친구 이병연의 집을 그려 넣어 빠른 쾌유를 바랬다는 얘기도 있고, 그의 스승이었던 김창집의 집이 있는 위치로 보기도 하고, 또한 정선에게 많은 그림을 주문했던 주문자 이춘재의 집을 그려 넣은 게 아니냐 설도 있지만, 이는 이춘재가 이 그림을 소유한 적이 없었기에 설득력은 적다. 1790년 이 그림을 넘겨받은 심환지가 이 그림에 붙인 시에서, ‘늙은 주인이 깊은 장막 아래에서 하도, 낙서(주역)를 즐긴다’ 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심환지는 이 집을 정선의 집으로 보았다. 말년에 그린 그림으로 보아, 정선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자신에게 주는 그림으로, 자신의 집을 그려 넣은 게 아닐까 라고 보는 이도 있다. 당신의 생각은?
여러 가지 대조가 너무나 멋들어지게 잘 어우러진 작품이다.
수직으로 내리꽂는 바위의 형상과 수평으로 넓게 흐르는 구름과의 대조, 어두운 검정의 바위, 숲들과 밝은 하얀 구름, 안개와의 대조, 역동적인 산의 형세와 정적이고 평화로운 마을 집과의 대조 등이 너무나 조화롭게 잘 어우러진 작품이다. 잠깐, 여기에서 이런 대조와 조화가 잘 어우러진 또 다른 작품이 생각난다.
역동적인 산의 형세 vs. 역동적인 밤하늘,
정적이고 고요한 오른쪽 아래의 집 vs. 평화로운 마을,
수직 붓터치의 큰 바위 vs. 높이 솟은 사이프러스 나무,
집과 마을의 위치는 우연일까?
겸재의 인왕제색도,
참 많은 생각과 감동을 주는 너무나 멋진 우리 작품이구나 싶다.
인생에서 한 번은 예술이 주는 기쁨과 위안을 받아 보시길 바라는 작은 바람입니다. 본 저작물에 인용된 자료의 저작권은 해당 자료의 저작권자에 있음을 알립니다. 본 저작물에 인용된 자료의 게시 중단 등을 원하시면 shaan@daum.net 로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즉시 삭제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