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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 도슨트북 Sep 30. 2021

이건희 컬렉션, 천경자의 노오란 산책길

천경자 千鏡子 Chun Kyungja


천경자 千鏡子 Chun Kyungja

노오란 산책길

1983

종이에 채색

96.7x76cm 


작품 속의 모델은 천경자의 첫째 며느리인 유인숙으로 천경자 자신의 홈드레스를 입혀 놓고 그리고, 하얀 강아지는 천경자와 함께 했던 꽃순이를 이쁘게 그려 놓았다. 며느리는 이 작품뿐만 아니라, ‘알라만다의 그늘 1, 2’, ‘황금의 비’, ‘환상여행’ 등에서 시어머니 앞에 모델로 선다.   



커피를 가져다 드리고 나오려는데 어머니가 부르셨다.
‘인숙아’ 어머니는 내 얼굴을 바라보셨다.
‘거기 서 볼래?’ 나는 어머니가 하라는 대로 서 있었다.
그날부터 나는 어머니의 모델이 되었다.

-유인숙 저서, ‘미완의 환상여행’-



‘미인도’ 위작 논란으로 그렇게 갈등을 빚었던 국립현대미술관에 이번에는 그녀 없이 홀로 찾은 작품.






문선호 작가가 1975년 천경자 화백의 모습을 담은 사진. 가나문화재단.


천경자 千鏡子 1924 - 2015,

한국 최고의 화가이자 ‘꽃과 여인의 화가’로 대중적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천경자는 수묵의 한국화에 그만의 독창적인 채색 기법을 더해 독특한 한국채색화의 작품 세계를 구축한 천재 화가이다. 전통 안료인 분채(조개 가루, 생선 뼈 등 자연 생물을 재료로 한 물감)와 석채(돌가루를 뽑아 만든 물감)를 활용하여 흡수력이 좋은 전통지 위에 반복적으로 색을 쌓고 지우는 과정을 통해 밑에서부터 은은하게 우러나오게 색채를 표현하여 천경자만의 독특한 무게감과 특유의 몽환적인 느낌의 작품을 선보였다. 천경자라는 이름이 그녀의 뛰어난 작품 인생보다 ‘미인도’ 위작 논란, 가족 갈등 등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듯하여 안타깝다. 그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인의 한과 환상, 꿈과 고독이 그녀의 삶이 그대로 투영된 그녀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다.


꿈은 화폭에 있고
시름은 담배에 있고
용기 있는 자유주의자
정직한 생애
그러나
그는 좀 고약한 예술가다.

-천경자를 노래하다, 박경리-


1924년 전남 고흥에서 1남 2녀 중 장녀로 외할아버지가 옥구슬처럼 이쁜 손녀라고 하여 지어준 이름 ‘옥자 玉子’ 로 태어난다. 경자 鏡子 라는 이름은 17살인 1941년 일본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현 도쿄여자미술대학)에 유학 가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한다. 유학 가기 전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현 전남여고)를 다녔는데, 이번 이건희 컬렉션 작품 중 21점이 전남도립미술관에 기증되었는데 그중 천경자 작품 2점이 포함된 이유이다.


천경자식의 화려한 꽃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꽃과 나비, 1973, 천경자, 39x59.5cm, 이건희 컬렉션, 전남도립미술관
배에 가득 찬 물고기와 바다 소품들로 만선의 기쁨을 경쾌한 리듬으로 표현한 만선, 1971, 천경자, 121x105cm, 이건희 컬렉션, 전남도립미술관


천경자가 다녔던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는 남자들이 다니던 도쿄미술학교에 대응하여 세운 명문 여자미술학교로 나헤석, 백남순, 박래현 등이 다닌 학교이다. 이 학교에서 천경자는 서양화보다는 곱고 섬세한 동양화가 더 좋아 전공으로 택하고, 바로 다음 해인 1942년 그녀의 나이 18살 때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외할아버지를 그린 ‘조부 祖父’ 로 입선하고 1943년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는 외할머니를 그린 ‘노부 老婦’가 수석 입상을 하면서 놀라운 재능을 뽐낸다.


노부老婦, 1944, 천경자. 1995 호암미술관 도록에서 재촬영. ⓒ 호암미술관


우와, 대단하다. 19살 소녀가 그린 작품이라고 누가 믿겠는가? 우리의 할머니를 이렇게 세련되고 멋진 현대 여성으로 그려 놓았다. 붉은 저고리의 무늬며, 검은 치마의 비단 무늬며 어쩜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담배 곰방대가 저렇게 멋진 소품이었나? 눈처럼 하얀 머리가 일부러 멋 부리기 위해 염색이라도 한 것처럼 너무나 멋있다. 이처럼 아름답게 나이를 먹어 갈 수 있다면 너무 좋겠다. 천경자, 천생이 화가 맞구나.

 

1944년 귀국하던 길에 구하기 어려웠던 여객선 표를 구해준 인연으로 도쿄 유학생 이철식을 만나 결혼하여 1945년 장녀 이혜선과 1946년 아들 이남훈을 낳고 전남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도 한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그해 10월 이철식은 장결핵증에 걸려 일찍 세상을 떠난다. 두 살, 한 살 아이들과 함께 힘겨운 시간을 보내던 천경자는 1948년 목포 신문기자인 김남중을 만나 둘째 딸 김정희와 막내 김종우를 낳는다. 하지만 김남중은 사실 이미 부인이 있는 사람이었다.



2015년 10월 28일자 YTN 뉴스. www.ytn.co.kr/_ln/0106_201510281804232820


설상가상으로, 1950년 전쟁통에 동생 천옥희 마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천경자는 너무나 힘든 삶의 고통을 토해 내듯이 작품으로 분출해 내는데 그 작품이 바로 광주역 부근 뱀집에서 보았던 뱀들을 모티브로 35마리의 독한 뱀들이 우글거리는 1951년작 ‘생태 生態’ 이다.  


생태 生態, 1951, 천경자. 1995 호암미술관 도록에서 재촬영. ⓒ 호암미술관



이런 판국에 어찌 찔레꽃 향기나 찾는 시심 깃든 뱀 따위를 그리겠는가?
차라리 수십 마리의 뱀을 화면 가득 집어 넣음으로써
이 슬픔을 극복하고,
그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천경자-



힘듦을 더 힘든 상황으로 나를 몰아 이겨냈던 것일까? 집안이 힘들어져 셋방살이하던 시절 자주 등장하는 뱀이 너무 무섭고 징그러웠지만 다른 곳으로 이사할 수도 없어 피할 수 없었던 그 뱀, 피할 수 없는 지금의 힘든 상황을 그 뱀을 맞닥들었을 때라고 생각한 걸까? 천경자는 그렇게 뱀과 기싸움을 하고 있었다. 저 노려보는 뱀을 유순하게 내편으로 길들여야 내 삶도 내편으로 길들일 수 있는 거야!


이 작품으로 천경자라는 이름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이후 1954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도 임용된다. 1972년 베트남전 기록화를 그리기 위한 종군화가에 참여하기도 하고, 약 30여 년간 타히티, 유럽, 아프리카, 중남미, 인도, 미국 중서부 등 해외여행을 하며 현지에서 스케치로, 그림으로 인물화와 풍경화를 많이 그린다. 이 시기 즈음부터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초현실적이고 이국적인 여인이 등장하는 환상적인 화풍으로 바뀐다.


고 (孤, 외로울 고), 1974, 천경자, 종이에 채색, 38.5×23.3cm.


이렇게 화려한 꽃을 머리에 꽂고 있는 여인인데, 작품명이 ‘외로움’ 이라니, 아이러니이다. 화려함 속의 공허함을 표현한 걸까? 화려함의 끝을 보는 것 같은데, 작품명이 자꾸 걸린다. 나비가 꽃에  앉아 있지 않고 그녀의 어깨에 앉아 있다. 그녀가 꽃이구나. 인물화가 아닌 꽃을 그린 정물화였구나. 그녀의 눈을 보니, 슬퍼 보인다. 눈동자가 하얗게 비어 있다. 하얀 눈물이 맺혀 있는 듯하다. 비어있는 눈동자가 멍하니 더 공허해 보인다. 비어있는 눈이 외로움이었구나. 이 작품이 외롭다고 느끼게 만든건 저 눈 때문이었구나. 가만히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니, 옆모습인데도 정면의 나를 쳐다보고 있다. 옆모습인데도 나와 눈맞춤을 하고 있다. 이리저리 옮겨보는데도 계속 나를 따라다닌다. 나를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 혼자 있기 싫은가 보다. 외로움, 맞구나. 어느새, 나도 외롭다.



제 작품 속의 여인들은 한결같이 목이 길고 멍한 눈동자를 지녔어요.
의상은 화려하고 머리에는 예쁜 꽃을 꽂았지만 저는 그 화려함 뒤에 숨은 고독을 찾고 싶었어요.
인간들은 누구나 현실을 뛰어넘고자 하고 신비와 환상을 좇지요.
아마도 현실이 너무도 삭막해서 그럴 거예요.
저는 신비와 환상의 세계에 대한 동경심이 남들보다 훨씬 강해서 환상적인 작품을 그릴 것이에요.
그림을 그릴 때 광기가 없으면 재미없으나 이 광기를 좇는 것도 힘들고 이 광기를 잘 다스려 그림으로 승화시키기도 힘들었어요.
작품 제작 때의 고통이란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을 부를 정도지요.
그래도 지나고 나면 그때처럼 행복한 순간이 없고 또 살아야 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음을 깨닫게 되요.

-천경자 鏡子-




길례언니, 1973, 천경자, 종이에 채색, 33.4×29cm.


아, 작품명이 길례언니, 우리 동네에 꼭 살고 있는 언니 같다. 서울에 취직이 되어 갔던 그 길례언니, 이번 설에 두 손 가득 선물세트 들고 왔던 그 길례언니, 서울 아가씨 물이 잔뜩 들어서 온 그 길례언니, 내가 아는 우리 동네 길례언니를 보는 것만 같다. 길례언니는 천경자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라고 수필집에서 얘기한다. ‘어린 시절 어느 여름 축제 날 노란 원피스에 하얀 챙이 달린 모자를 쓴 여인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아 직접 붙인 이름과 만들어낸 이야기’ 라며 '길례 언니는 국적, 나이도 불분명한, 화가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 숨 쉬는 아가씨’ 라고 말한다. 생각했던 길례언니의 모습이 나오지 않아 수십 번 지우고 그리기를 반복했다는 그 길례언니의 본명(?)은 사실 경자언니 鏡子 아닐까?


금세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순결한 눈망울,
뾰로통한 처녀 특유의 표정이 매혹적이었던 언니,
집이 가난해 소록도의 간호부가 돼 동생들 공부를 돌봐주었고,
그러면서도 누구보다도 유행에 민감했던 멋쟁이 길례 언니.

-천경자, 수필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



노오란 산책길, 1983, 천경자, 종이에 채색, 96.7x76cm, 이건희 컬렉션, 국립현대미술관


노오란 산책길,

 ‘노오란이라는 말이  좋다. ‘노란 아닌 ‘노오란 다른 색깔 같다. ‘ 아닌 ‘꼬옥느낌처럼,  감성적인 컬러의 느낌이랄까. ‘노란 산책길’ vs. ‘노오란 산책길확연히 다르지 않나? 그렇다고 모든 색깔을  이렇게   없다. 빠알간, 파아란, 하이얀,  이런 컬러들이  좋다.


꽃순이와 함께  산책길에서 만난 노오란 꽃이  세상을 노오랗게 물들였다. 길도 노오랗다. 오른쪽  뒤에 나무도 온통 노오랗다. 그녀의 머리  쏟아지는 비처럼 내려앉은 푸릇푸릇한 버드나무 잎도 이별을 준비하는 것처럼 서서히 노오랗게 물들어 가고 있다. 아직 물들지 않은 나뭇잎  보라색이  세상이 아닌 것처럼 몽환적이다. 그녀의 머리도 노오랗게 물들었다. , 노오랗게 물든 눈동자 없는 하얀 눈동자의 , 그녀의 눈을 보고야 말았다. 그녀도 노오란 꽃이였구나.


큰며느리를 그렸다고 하는데,  화가의 얼굴이 자꾸 보인다. 현재 우리와 다른 세상인 보라색 세상에 그녀가 꽃을 들고  있는 것만 같다. 꽃순아, 함께 있어 줘서 고마워. 안녕하세요, 경자씨? 鏡子.  




1980년대 전시장에서 시어머니 천경자(오른쪽)와 함께 한 유인숙. 이봄출판사.


처음으로 모델을 섰던 작품은 ‘황금의 비’ 였는데 크기가 작은 그림이지만
어머니는 2년에 걸쳐 혼신을 다해 그리셨다.
작품이 완성된 후에는 오랜 세월 항상 거실 벽에 걸어 놓으셨다.
어머니는 내게 "사람들이 저 그림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고 하더라" 라고도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어머니가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예사롭지 않은 눈빛’ 으로 표현하신 거라고.  

-첫째 며느리 유인숙, 책 ‘미완의 환상여행’-


황금의 비, 1982, 천경자, 종이에 채색, 34x46cm, 서울시립미술관




제발 그 가짜 미인도를 화면이나 지면에 소개하지 말라.
그러면 대중은 그 그림이 천 화백 것이라고 계속 오해한다.  
-장녀 이혜선의 2015년 주간 동아 인터뷰-



아직도 막은 내려지지 않고,

1991년 4월 그녀의 나이 68세,  ‘내 자식도 몰라보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 며 시작된 ‘미인도’ 위작 논란에 천경자는 결국 절필 선언을 하고 1995년 8만 명 이상의 장사진을 이뤘던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천경자 회고전’을 마지막으로 1997년 9월 장녀 이혜선이 있는 뉴욕으로 떠난다. 같은 해에 그녀의 자식과도 같은 작품이 흩어지지 않고 영원히 사람들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며 서울시립미술관에 작품 93점을 기증한다. 2003년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소식이 뉴욕에서 전해 왔고, 2015년 8월 6일 그 뉴욕에서 하늘 나라로 갔다는 소식을 약 2달 후에 전해 듣는다. 그녀를 품지 못하고 집을 나가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하다. 집 밖에 영원히 살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하다. 우리는 아직도 끊이지 않는 여러 이슈로 천경자를 편하게 놓아주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쯤 그녀의 막을 내려 줄 수 있을까? 고맙고, 미안하다.


2015년 7월 8억 6천만 원에 낙찰된 '막은 내리고', 1989년, 천경자, 종이에 채색, 4x31.5cm


힘들었던 삶을 뛰어난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으로 같이 회자되는 두 화가 천경자와 프리다 칼로. 천경자는 머리 위에, 프리다 칼로는 목에 뱀을 걸어 놓은 건 우연일까.

Left: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1976, 천경자.    Right: Self-portrait with Monkey, 1938, Frida Kahlo


웃는 얼굴이 보고 싶다. 화가 천경자 ⓒ뉴시스ㆍ여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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